금요니까야모임

차폐(遮蔽)와 열개(裂開)의 가르침

담마다사 이병욱 2022. 8. 17. 10:43

차폐(遮蔽)와 열개(裂開)의 가르침

 

 

보리수는 불교의 상징이다. 부처님의 금강좌에 보리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보리수는 깨달음의 나무라 하여 불자들에게는 신앙시되고 있다. 특히 스리랑카에서 그렇다.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에 보리수가 있다. 부처님의 금강좌에 있었던 보리수가 이식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 보드가야에 있는 보리수는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보리수에서 이식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 보리수 잎파리가 하나 있다.

 

보리수 잎은 도현스님이 준 것이다. 아누라다푸라에서 가져져 온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금강좌에 있었던 바로 그 보리수와 같은 것이 된다.

 

귀한 보리수 잎을 영원히 보존하기 하고자 했다. 문구점에서 코팅 처리했다. 그리고 액자로 만들었다. 이 액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812일은 금요니까야모임이 열리는 날이다. 보리수 액자를 가져 갔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사무실에 놓기 위한 것이다. 전재성 선생과 도현스님 등 도반들이 보는 앞에서 보리수 액자를 기증했다.

 

 

도반들과 우정이 있어야

 

사람은 정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남녀간의 애정이 아니다. 남녀간의 애정을 초월하는 우정(友情)을 말한다. 같은 길을 가는 도반들과도 우정이 있어야 한다.

 

우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선물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선물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정이 생겨난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 자애수행 편에서 최종단계는 주는 것이다.

 

백번천번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보다 한번 주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보시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를 길들이고 보시는 일체의 이익을 성취하게 하는 것, 보시하는 것과 사랑스러운 말로써 머리를 들고 그리고 머리를 숙인다.”(Vism.9.39)라고 했다.

 

청정도론 자애게송에서 머리를 들고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주는 자는 머리를 들고, 받는 자는 머리를 숙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주면 원한 맺힌 자의 마음도 녹일 수 있다고 했다.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친구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베풀어야 할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야차 알라바까가 부처님에게어떻게 해서 친교를 맺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그는 보시함으로써 친교를 맺습니다.”(Stn.187)라고 답했다. 친교의 조건이 보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친구를 사귀려면 먼저 베풀어야 한다. 베풀지도 않고 친구를 사귀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마치 부부사이에 상대방이 잘 해주기만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먼저 베풀 때 상대방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약을 먹어도 약발이 먹히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8월 첫번째 금요니까야모임이 812일 열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고정멤버는 변함 없다. 매달 둘째와 넷째 금요일이 되면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도반들을 말한다.

 

니까야모임에서 종종 새로운 얼굴을 본다. 이번 모임에서도 한 명 있었다. 모임이 다 끝난 다음 자기 소개시간에 안 사실이지만 누군가 권유로 찾아 온 것이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찾아 온 사람들로 인하여 자리가 모처럼 찬 듯 했다.

 

새로 온 두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전재성 선생의 번역서를 읽고 감명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직접 듣기 위해 찾아 왔다고 한다. 현재 다니고 있는 최고학부 과정이 있기는 하지만 이곳 니까야 모임이 더 나은 것 같다는 취지로 말했다.

 

약을 쓰면 약이 듣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약을 먹어도 약발이 먹히지 않는 사람도 있다. 말을 물가로 데려 갈 수 있지만 물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다. 모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니까야 모임에 대하여 수도 없이 알렸다. 그러나 찾아 오는 사람은 드물다. 설령 왔다고 하더라도 한두번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포기 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약을 써도 듣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이러한 환자를 조건으로 다른 환자들도 간호될 수 있다.(A3.22)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약이 듣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해야 할까? 주석에 따르면 희망이 없는 환자도 간호를 해서 섭섭하게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 때문에 화를 내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 때문에 괴로운 세계로 윤회하지 말도록 해야 한다.”(Mrp.II.191)라고 했다.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람이 많건 적건 간에

 

전재성 선생의 금요니까야모임은 최상의 모임이다. 왜 최상의 모임인가? 이는 정진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정진의 모임에서는 누군가를 닮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래서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한다.”(A3.90)라고 했다. 최상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서 앞서 가는 사람과 닮고자 하는 것이다. 그 사람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진의 모임이자 동시에 최상의 모임이 된다.

 

금요니까야모임은 정진의 모임이자 최상의 모임이다. 20172월 이후 한결 같다. 사람이 많건 적건 간에 정시에 시작된다.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늦게 시작사는 법이 없다. 아마 한명만 있어도 7시에 시작할 것이다.

 

언젠가 전재성 선생이 이런 말 한적이 있다. 자신이 20대 때 함석헌 선생의 공부모임에 다녔다고 한다. 그때도 사람들이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적었던 것 같다. 함석헌 선생의 명성이 있었음에도 공부모임에 나오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은 두 명이 앉아 있어도 정시에 시작했다는 것이다.

 

모임에서 어떤 이는 사람 숫자를 따진다. 사람이 많이 모여야 법문도 할 맛이 나고 강연도 할 맛이 난다는 것이다. 모임에서 두세명 앉아 있다면 맥 빠질 것이다. 그러나 어제 읽은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은 이런 것에서 초탈한 것 같다.

 

맛지마니까야에 여섯 감역에 대한 분석의 경’(M137)이 있다. 경에서 고귀한 님이 닦는 세 가지 새김의 토대가 있는데, 이는 모임에서 제자와 스승의 태도와 관계가 있다. 스승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평정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어느 모임이든지 문제가 없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의 승가모임도 그랬던 것 같다. 이는 제자들이 잘 들으려 하지 않고, 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으로부터 등을 돌린다.”(M137)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럴 때 스승은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

 

학교에서 학생들이 집중하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또는 학생들이 떠나 버리고 몇 명 남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선생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이것에 대하여 여래는 만족하지 않아 만족하지 않은 것을 느끼지만, 동요하지 않고 새김을 확립한다.”(M137)라고 했다.

 

스승은 제자가 많건 적건 간에 항상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제자들이 귀 기울지 않는다고 하여 불쾌하게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잘 모이고 잘 귀를 기울이면 고무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에 부처님은 이것에 대하여 여래는 만족하여 만족을 느끼지만 동요하지 않고 새김을 확립하고 알아차린다.”(M137)라고 했다.

 

부처님은 항상 사띠와 삼빠자나를 강조했다. 이를 번역서에서는 새김과 알아차림이라고 했다. 제자들이 스승에게 귀를 잘 기울이건 기울이지 않건 간에 스승은 항상 평정한 마음을 유지해야 함을 말한다.

 

어떤 위빠사나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단 한명만 남아도 수업을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방이 꽉 찼으나 가면 갈수록 줄어서 나중에 세 명만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스승은 동요하지 않고 평소대로 수업을 진행했다.

 

전재성 선생의 니까야모임은 만 5년이 넘었다. 매달 두 차례 수도 없이 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은 한결 같았다. 처음 시작했을 때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저녁 7시 정각이 되면 종을 치며 모임을 시작한다.

 

모임에서는 예경문과 삼귀의, 오계를 빠알리로 합송한다. 다음에 10분간 입정에 들어 간다. 그리고 경을 합송하고 경을 해설하고 경에 대하여 토론한다. 끝나는 시간은 9시 정시에 마친다. 사람이 많건 적건 간에 이런 패턴은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

 

차폐(遮蔽)와 열개(裂開)의 가르침

 

서설이 너무 길었다. 이번에 합송한 것은 선정수행에서 감각영역을 초월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아난다의 경’(A9.37)에 해당된다. 이를 차폐와 열개의 가르침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 한쪽 문이 있다. 이방에서 저방으로 갈 때 문을 열면 이방은 닫히고 저방은 열린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닫힘과 열림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에 아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 존경 받는 님, 아는 님, 보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차폐에서 열개를 찾아 알고 또한 보아 뭇삶들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어 고통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고 올바른 길에 도달하여 열반을 실현하십니다.”(A9.37)

 

 

경에서 말하는 차폐와 열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차폐를 뜻하는 삼바다(sambādha)는 주석에 따르면 오장애와 오욕락을 의미한다. 오욕락과 오장애가 선정에 있어서 방해가 됨을 말한다. 그런데 선정에 들면 자연스럽게 오장애와 오욕락은 닫혀 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폐라고 하는 것이다.

 

열개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오까사(okāsa)이다. 한쪽이 열리면 한쪽이 닫히는 것이다. 첫번째 선정이 열리면 오욕락과 오장애는 닫힌다. 두번째 선정이 열리면 첫번째 선정의 사유와 숙고는 닫힌다. 이런 식으로 선정의 경지는 높아진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삼바다와 오까사와 관련하여 재가에서도 기회를 터득할 수 있도록이라고 번역했다.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재가(sambādha)란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과 함께한 군중을 말한다.”라고 했다. 기회(okāsa)는 출세간법의 증득이라고 했다.

 

차폐와 열개, 그리고 재가와 기회는 너무나 다른 말이다. 삼바다(ressure; crowding) 오까사(room; open space)에 대하여 이렇게 차이가 나게 번역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역하지각에 대하여

 

경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선정의 경지를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경에서 설명되어 있는 것이 잘 와 닿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추론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심오한 말이 있다.

 

 

바로 시각이 존재하고 형상이 존재하더라도 그 감역을 감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A9.37)

 

 

시각과 형상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 감역을 감지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눈에 보인다고 해서 모두 감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야 감지된다. 청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온갖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천둥과 같은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후각도 마찬가지고, 미각도 마찬가지이고, 촉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에 보인다고 해서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는 역하지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모임 참석자 중에 방기연 선생이 말한 것이다.

 

역하지각(subliminal perception)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방기연 선생은 코카콜라 광고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영화에서 코카콜라 한컷을 광고로 넣었다면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코카콜라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간접광고에 해당된다.

 

역하지각이란 모든 사람들이 자극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미세한 자극은 처리되고 있음을 말한다. 영화에서 코카콜라 광고 한컷을 삽입했을 때 손에 코카콜라를 들고 있는 것과 같다.

 

역하지각 광고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독재자들이 역하지각 선전을 하면 어떻게 될까? 독재자를 찬양하는 놀라운 일이 발생될 것이다.

 

경에서는 시각과 형상이 존재하더라도 그 감역을 감지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역하지각의 예를 든다면 잘 설명이 되는 것 같다.

 

선정에서 지각의 의미는?

 

보여지는 것이라고 해서 다 지각되는 것도 아니고 들려지는 것이라고 해서 다 지각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지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빨알리어 빠띠삼베디(paisavedī)를 말한다. 영어로는 ‘one who feels; experiences’의 뜻이다. 경험되는 것을 말한다.

 

역하지각에서 코카콜라 광고는 경험되지 않는다. 그러나 선정에서는 경험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차폐와 열개로 설명될 수 있다.

 

한쪽이 닫히면 또 한쪽이 열린다. 선정에 들어가면 오욕락과 오장애는 닫힌다. 따라서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지각할 수 있다. 이는 경에서 우다인과 아난다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확인된다.

 

 

벗이여, 아난다여, 그 감역을 감지하지 못하는데, 지각을 합니까, 지각을 하지 못합니까?”

 

벗이여, 그 감역을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지각을 하며, 지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A9.37)

 

 

아난다는 우다인의 질문에 분명히 그 감역을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지각을 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은 이잔 상태의 지각을 말한다. 오욕락의 상태에서는 미세한 지각을 할 수 없지만, 선정의 상태에서는 오욕락이 극복된 상태이기 때문에 미세한 영역을 지각할 수 있음을 말한다.

 

선정에서 지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니밋따로 설명할 수 있다. 니밋따는 마음이 만들어낸 물질이다. 이는 시각과 형상으로 인식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오로지 마음으로 만들어낸 물질에 대한 지각은 있다는 것이다.

 

선정에서 니밋따는 시각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낸 물질이기 때문에 지각가능한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빠띡삼베디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선정상태에서는 계속 지각되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paisavedīssati’라고 했다. 마치 수념하듯이 계속 지각되고 경험 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전 것은 감지할 수 없지만 현재 것은 지각할 수 있다

 

선정에서 차폐(sambādha)와 열개(okāsa)는 초선정에서부터 상수멸정까지 진행된다. 한쪽이 닫히면 한쪽이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는 이 모든 과정을 다 지각하고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상수멸정까지 지각하고 경험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KPTS본 각주에서는 빅쿠보디의 각주를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Ndb.1829에서는 이 경에서처럼 여기에 해당되는 감역을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지각할 수 있는 것으로 비물질계의 사선정만 포함시킬 것이 아니라 미세한 물질계의 사선정과 이 경의 끝에서 언급하는 특별한 삼매인 상수멸정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KPTS 통합본, 3805번 각주)

 

 

흔히 상수멸정 상태에 대하여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라고 말한다. 지각과 느낌이라는 정신적 형성이 소멸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마치 기절한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앙굿따라니까야 아난다의 경에 따르면 그 감역을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지각을 합니다.”(A9.37)라고 했다.

 

색계에서 무색계 선정으로 넘어 갈 때 감역이 바뀐다. 이전 것은 닫혀지고 새것이 열린다. 이전 색계선정에 대한 감역은 감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색계의 공무변처는 감지된다.

 

공무변처에서 식무변처로 넘어 갈 때 공무변처는 차폐되고 식무변처는 열개가 된다. 한쪽이 열리면 한쪽이 닫히는 것이다. 닫히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새로운 것이 열린다. 새로운 것이 열릴 때 이전 것은 없는 것이 된다.

 

이전 것을 초월하면 이전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초선정에 들었을 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극복된다. 초선정에 들었을 때 감각적 욕망은 없는 것이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감각적 욕망이 초월된 것이다. 따라서 감각적 욕망을 감지할 수 없다. 단지 현재 지각하는 것만 지각이 될 수 있다.

 

지금 식무변처에 든 자가 있다. 그는 공무변처를 극복했다. 공무변처를 극복했다는 것은 공무변처가 영원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조건에 따라 발생된 경지라는 것이다. 그가 지금 식무변처에 있다면 그는 공무변처를 감지하지 못한다. 공무변처는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각은 있다는 것이다. 공무변처가 극복된 지각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조건에 따라 발생된 경지는

 

경에서 각 선정단계마다 정형구가 하나 있다. 그것은 그 감역을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지각을 합니다.”라는 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서로 다른 번역 같아 보이지만 같은 말이다. 이는 “tadāyatana no paisavedeti”라는 말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선정은 체험된 것이고 경험된 것이다. 이는 ‘paisavedeti’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전의 선정에 대해서는 ‘tadāyatana’라고 했다. 이는 그때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전 선정의 영역을 말한다.

 

새로운 선정이 열릴 때 이전 선정은 닫혀지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 경험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tadāyatana no paisavedeti’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KPTS에서는 그 감역을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지각을 합니다.”라고 번역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런 인식을 가진 자도 그 영역을 경험하지 않습니다.”라고 번역을 했다.

 

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 이는 삼바다와 오까사로 설명된다. KPTS에서는 이를 차폐열개라고 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재가기회라고 했다. 새것이 열리면 이전 것은 닫히게 되는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됨을 말한다.

 

초선정에 들었을 때 감각적 욕망은 극복되는데 감각적 욕망은 감지 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정에서 아홉 단계도 차폐와 열개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선정에 대하여 차폐와 열개로 설명하다 보면 최종적으로 상수멸정에 이른다. 상수멸정 상태가 되었을 때 지각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그 감역을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지각을 합니다. (tadāyatana no paisavedeti)”라는 말을 적용하면 상수멸정도 지각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상수멸정 전단계인 비상비비상처정이 있다. 상수멸정 상태에서는 비상비비상처정에 대한 감역을 감지하지 못하지만 그런 경지가 있었다는 것은 지각하게 된다.

 

상수멸정에서 깨어 났을 때는 어떠할까? 상수멸정 단계를 감지할 수 없지만 그런 단계가 있었다는 것은 지각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감역을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지각을 합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선정의 전개 과정을 보면 차폐와 열개로 설명되어 있다. 최종적으로 상수멸정이다. 이를 경에서는 부동의 삼매라고 했고 궁극적인 앎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상수멸정까지의 과정은 모두 조건발생이라고 볼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조건발생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차폐와 열개로 설명되는 각 선정의 단계는 무상한 것이 된다. 부동의 삼매, 궁극적인 앎이라 볼 수 있는 상수멸정이 최종단계인 것이다.

 

상수멸정도 차폐와 열개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이는 그 감역을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지각을 합니다.”라는 문구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절하는 듯한 삼매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시바신이 딴다바 춤추는 것을 예로

 

선정을 체험해 보지 않아서 경전에 쓰여 있는 문구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두 종류의 번역서와 주석서를 참고하여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으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오류가 있게 된다면 커다란 구업을 짓는 것이 된다.

 

쓰다보니 긴 길이의 글이 되었다. 모임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모두 다 기록할 수 없다. 그 중에 하나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전재성 선생은 차폐와 열개에 대하여 시바신이 춤추는 것을 예로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책 중에 천수다라니와 붓다의 가르침이 있다. 언젠가 남양주 정혜사에서 특별 모임을 가졌는데 그때 전재성 선생이 참석자 모두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책에서 도로 도로 미연제 마하 미연제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시바신의 춤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바신이 한쪽 다리를 춤을 추고 있는 형상이 사진으로도 소개 되어 있다.

 

전재성 선생은 차폐와 열개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딴다바춤을 추는 시바신을 하나의 예로 들었다. 이에 대한 앙굿따라니까야 각주를 보면 힌두교의 딴다바 춤을 즐기는 시바 신은 우주적인 신으로 다섯 가지 활동영역, 즉 창조, 유지, 파괴와 베일의 차폐와 열개이다.”(KPTS통합본, 3804번 각주)라고 했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시바 신의 딴다바 춤에서 차폐는 무지를 상징한다고 했다. 시바 신의 발 아래 있는 난쟁이가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한쪽이 닫히면 한쪽이 열린다. 무지 또는 무명이 닫히면 승리자가 된다. 그래서 시바 신은 무지의 악마를 짓밟고 승리의 춤을 추는 것이다.

 

부처님을 왜 승리자라고 하는가?

 

부처님에 대한 여러 칭호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승리자이다. 이는 사함빠띠 브라흐마가 청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함빠띠는 전쟁의 승리자여, 세상을 거니소서.”(M26)라고 했다.

 

부처님을 승리자로 묘사한 경이 종종 있다. 이에 대하여 전쟁의 승리자라는 표현이 있다. 부처님은 승리자이다. 마치 전장에서 승리한 자와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승리자가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팔정도를 닦는 것에 대하여 위없는 전쟁의 승리자(sagāmavijaya)”(S45.4)”라고 했다.

 

부처님은 승리자이다. 어떤 전쟁에서 승리했을까? 그것은 번뇌와의 싸움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승리자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번뇌가 부수어지면 그들도 나와 같은 승리자가 되리.”(M26)라고 했다.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놀라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도 많다. 이런 가르침을 접했을 때 어떤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황당한 이야기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 신통을 이야기 했을 때 이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체험해 보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경전에는 체험해 보지 못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그 중에 하나가 선정에 대한 것이다.

 

선정 체험을 하지 않은 자가 선정에 대하여 쓰는 것은 구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최대한 경전과 주석에 근거해서 쓴다. 이렇게 쓰다 보면 직접 체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알게 되는 것 같다. 이 모두가 니까야모임에 나가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니까야 모임은 매달 두 번 열린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법수가 아홉에 이르렀으니 끝날 날이 오래 남지 않았다. 최근 인연 맺은 사람들은 이런 점을 아쉬워하는 것 같다. 기회는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인연을 맺는 자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다음 모임은 826()이다.

 

 

2022-08-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