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여인의 흰 치아를 보고서 아라한이 된 장로

담마다사 이병욱 2022. 7. 30. 11:38

여인의 흰 치아를 보고서 아라한이 된 장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글쓰기이다. 하루에 하나 의무적으로 써야 한다. 요즘에는 몇 개 늘었다.

 

경을 암송하는 것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하루에 한번 이상 해야 한다. 요즘 암송하고 있는 것은 빠다나경이다. 이를 정진의 경’(Sn3.2)이라고 한다.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데 부처님이 마라 나무찌와 싸워 이기는 것에 대한 경이다.

 

경전읽기도 의무적으로 하고 있다. 요즘 읽고 있는 것은 맛지마니까야이다. 머리맡에 있어서 언제든지 열어볼 수 있다. 매일 한두개의 경을 읽는다. 읽다 보니 125번경까찌 읽었다. 참고로 맛지마니까야는 152경이다.

 

금요니까야모임에 대한 후기를 작성하는 것도 의무적으로 한다. 2017년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5년째 하고 있는 일이다. 모임에서 들었던 것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글로 쓰는 것이다. 쓴 글은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려 놓는다. 모임의 카톡방에도 공유한다.

 

축적의 힘은 무섭다. 피로가 누적되면 죽음에 이른다. 은행에 정기적금 해 놓으면 나중에 목돈이 된다. 글도 매일 쓰면 해가 갈수록 축적된다. 금요모임에 대한 글도 그렇다. 일년이 지나면 쓴 글을 모아서 하나의 책의 형태로 만든다.

 

보리수 잎을 선물 받고

 

7월 두 번째 금요모임이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사무실에서 열렸다. 도현스님이 오셨다. 지난번 모임에 오지 못했기 때문에 한달 만에 본 것이다. 도현스님이 오셔야 모임에 활기가 돋는 것 같다.

 

도현스님이 선물을 준비했다. 보리수 잎을 말한다. 절에 보리수 나무가 있는데 잎파리 여러 장을 따 온 것이다.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스님은 어떻게 보리수를 키우게 되었을까?

 

 

스님에 따르면 보리수는 스리랑카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작은 나무를 비행기에 실어 가져 온 것이다. 놀랍게도 부처님 당시 보리수이다.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보리수를 말한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바로 그 보리수와 같은 것이다.

 

보리수 잎은 특징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하트모양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특징은 꼬리가 길다는 것이다. 보리수는 하트모양으로 꼬리가 긴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보리수를 깨달음의 나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미얀마 선원에 가면 보리수가 종종 발견된다..

 

보리수는 인도에서 흔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소나무처럼 흔한 것이 보리수이다. 거리나 마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교인들에게는 신앙화 되어 있다. 이른바 보리수신앙을 말한다.

 

보리수신앙이 가장 발달되어 있는 나라는 아마도 스리랑카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원에서 행사가 있는 날에 재가불자들은 흰 옷을 입고 보리수 주위를 도는 의식을 행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무불상 시대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덟 가지 해탈에 대하여

 

722일 두 번째 모임에서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선정에 대한 경이다. 첫번째로 합송한 것은 팔해탈에 대한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여덟 가지 해탈의 경’(A8.97)이 그것이다.

 

팔해탈에 대한 경은 똑 같은 형태로 해탈의 경(A8.66)’이 병행한다. 차이는 도입부에서 성냄에 대한 문장의 유무에 있다. 성냄의 소멸을 위해서 팔해탈을 닦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팔해탈은 어떤 것일까?

 

 

“1)물질을 지닌 자로서 물질을 본다. 이것이 첫번째 해탈이다.

2)안으로 물질의 지각을 여의고 밖으로 물질을 본다. 이것이 두번째 해탈이다.

3)청정한 아름다움에 전념한다. 이것이 세번째 해탈이다.

4)물질에 대한 지각을 완전히 뛰어넘어 감각적 저촉에 대한 지각을 종식하고 다양성에 대한 지각에 정신활동을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공간이 무한다라고 알아채며 무한공간의 세계에 뛰어든다. 이것이 네번째 해탈이다.”(A8.97)

 

 

팔해탈 중에서 네 가지만 열거해 놓았다. 나머지 네 가지는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상수멸정에 대한 것이다.

 

초월에 대한 기초를 보면

 

어떻게 해야 해탈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경전에서 이렇게 명확하게 밝혀 놓았다. 그런데 해탈에 대한 가르침은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니까야 도처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팔해탈과 관련하여 기초가 되는 경이 있다. 이를 초월의 기초에 대한 경’(A8.65)이라고 한다. 비교적 상세하게 설해 놓은 경이다. 첫번째 초월에 대한 기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안으로 형상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밖으로 한계가 있는 아름답거나 추한 형상을 본다. 이것들을 초월해서 이와 같이 나는 안다. 나는 본다.’라고 지각한다. 이것이 첫 번째 초월의 길이다.”(A8.65)

 

 

대체 이 말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수행을 해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그러나 주석을 보면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명상자는 푸른 빛이 가득한 세계를 위해서 눈, 노란 빛이 가득한 세계를 위해서 피부, 붉은 빛이 가득한 세계를 위해서 피, 흰 빛이 가득한 세계를 위해서 치아의 내적 형상에 대한 일차적인 명상을 한다.”(Pps.III.259)

 

 

주석에 따르면 집중할 때 그 인상들(nimitta)은 외부적이라고 했다. 경에서는 형상을 초월한다고 했는데 인상이 일어남과 함께 하는 선정의 성취를 말한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나는 안다. 나는 본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각은 성취 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취에서 나온 뒤에 일어나는 관념작용(ābhoga)”(Pps.III.259)이라고 했다.

 

까시나를 이용한 선정의 성취

 

경과 주석서에서는 까시나를 이용한 선정의 성취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선정수행을 해보지 않아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단지 언어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럴 때는 청정도론을 열어 보아야 한다.

 

청정도론에 까시나 수행에 대한 것이 있다. 4장을 보면 땅의 두루채움이 있는데 까시나(kasia: 두루채움, )수행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서문에서 인위적이나 자연적인 인상을 파악해야 한다.”(Vism.4.22)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인위적인 두루채움과 자연적인 두루채움이 있다. 인위적인 것은 흙으로 쟁반만한 원판을 만들어 이를 땅의 두루채움 명상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적인 두루채움에 대해서는 자연적인 땅의 경작지 내지는 탈곡장에서 인상이 일어난다.”(Vism.4.23)라고 했다.

 

자연적인 두루채움이 인위적인 두루채춤 보다 훨씬 더 수승하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자연적인 두루채움이 일어나는 자는 전생에 수행을 한 자에 해당된다. 그래서 과거세에 부처님의 교법이나 선인의 출가에 출가하여 땅의 두루채움에서 네 가지 선정이나 다섯 가지 선정을 일으킨 적이 있고”(Vism.4.23)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누구나 선정수행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전생에 수행자로 산 자가 이번 생에서도 수행자로 살 가능성이 높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런 사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여인의 흰 치아를 보고서 아라한이 된 장로

 

두루채움(kasia) 수행을 한 자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띳사 장로의 일화를 소개 하고 있다. 이는 장로 띳싸가 이빨만을 보았는데, 부인이 전체적으로 시체의 해골더미로서 현현한 것 등도 여기서 범례가 되는 것이다.”(Vism.6.81)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마하 띳싸 장로는 아누라다뿌라에서 탁발 중에 있었다. 길에서 꽃단장을 한 여인을 만났다. 여인은 남편과 다툰 후에 친정으로 가는 길이었다. 여인은 장로를 보자 이빨을 보였다. 장로를 유혹하고자 하얀 치아를 드러낸 것이다. 이에 장로는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며 쳐다 보았다.

 

장로는 흰 치아를 드러낸 이빨을 보았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그녀의 이빨에 대한 부정(不淨)을 지각하고는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Vism.1.55)라고 했다. 여인의 치아에서 부정상(不淨相)을 취하여 아라한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그녀의 이빨을 보고

이전의 지각을 떠올려,

그 자리에서 선 장로는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Vism.1.55)

 

 

장로는 여인의 흰 치아를 보고서 아라한이 되었다. 장로는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것이다. 그때 남편이 뒤따라 왔다. 남편은 장로를 보고서 존자여, 어떤 여인을 보았습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이에 장로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했다.

 

 

여인이나 남자가

여기서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단지 해골의 다발이

이 큰 길을 지나갔다.”(Vism.1.55)

 

 

장로는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것은 부정관 수행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는 열 가지 부정관에서 해골이 드러난 시체에 대한 것이다. 해골을 보고서 근본삼매에 드는 것을 말한다. 이는 습득인상과 대응인상으로 설명된다.

 

습득인상과 대응인상

 

습득인상은 어떤 것일까? 이는 흉측하고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런 모습으로 현현한다.”(Vism.6.80)라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해골이 드러난 시체에서 습득인상을 본 것이다. 이와 같은 해골을 접했을 때 혐오스러운 해골이 드러난 시체, 혐오스러운 해골이 드러난 시체라며 정신활동(manasikāra)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여인의 치아도 습득인상에 해당될 것이다. 평소 해골이 드러난 시체에서 부정관을 닦았다면 여인의 흰 치아에서 해골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혐오스러운 해골이 드러난 시체, 혐오스러운 해골이 드러난 시체”(Vism.6.80)라며 혐오의 정신활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를 습득인상과 대응인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습득인상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 ‘싫어하여 떠남, 싫어하여 떠남,’이라고 거듭해서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자에게 차례로 근본삼매가 일어난다. 그때 머리카락 등의 색깔, 모양, 방향, 장소, 한계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 습득인상이다.”(Vism.8.141)라고 했다.

 

습득인상은 경에서 “1)물질을 지닌 자로서 물질을 본다. 이것이 첫번째 해탈이다.”(A8.97)와 같은 것으로 본다. 이는 푸른 빛은 눈에 대한 것이고, 노란 빛은 피부, 붉은 빛은 피, 흰 빛은 치아에 대한 것”(Pps.III.259)이라고 주석에서 설명된다. 이는 인위적인 까시나가 아닌 자연적인 까시나에 해당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전생에 까시나 수행을 했던 자에게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띳싸 장로도 전생에 까시나 수행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응인상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일체의 유형으로부터 싫어하여 떠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대응인상이다.”(Vism.8.141)라고 했다. 습득인상을 통해서 대응인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응인상에 대하여 그것을 익히고 닦은 자에게 첫번째 선정만의 근본삼매가 일어난다.”(Vism.8.141)라고 했다.

 

습득인상이 있으면 대응인상이 있다. 습득인상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대응인상은 원만한 것이라고 했다. 습득인상이 대응인상이 되었을 때 근접삼매를 가져오기 때문에 희열과 만족을 가져오는 것이다.”라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해골의 사슬일 경우에는 습득인상에는 틈이 있는 것으로 현현하고, 대응인상은 원만한 것으로 현현한다.”(Vism.6.80)라고 했기 때문이다.

 

장로는 여인의 흰 치아를 보고서 아라한이 되었다. 여인의 흰 치아를 보고서 해골을 본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해골의 다발이 이 큰 길을 지나갔다.”(Vism.1.55)라고 했다. 장로는 자연적인 까시나를 한 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부정관 수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전생에서 부정관 수행을 했기 때문에 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니까야에는 수행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특히 선정에 대한 가르침이 그렇다. 이렇게 본다면 니까야는 수행지침서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수행에 대한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경전을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큰 수확일 것이다. 언젠가 인연이 된다면 가르침에 있는 대로 실행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리수 잎을 불상처럼

 

도현스님으로부터 귀한 보리수 잎을 받았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코팅하는 것이다. 압착해서 보관하는 것이다. 그러나 녹색이 있기 때문에 압착과정에서 물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좀더 마르면 코팅하려고 한다.

 

보리수 잎을 선물 받은 것이 있다. 진주선원에서 선물 받은 것이다. 20181월에 진주선원 불자들과 원담스님과 함께 인도성지 순례 갔었는데 앨범과 함께 받은 것이다. 코팅처리한 것이다.

 

진주선원에서 받은 보리수는 녹색이 다 빠진 것이다. 어떤 기술로 압착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보리수 내부가 마치 실핏줄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처리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주선원에서 받은 보리수를 액자에 넣었다. 받은지 무려 4년만이다. 그동안 책갈피 속에 있었다. 이번에 도현스님으로 부토 받은 보리수가 인연이 되어서 액자처리 한 것이다.

 

 

보리수는 불교의 상징과도 같다. 무불상시대에 불교인들은 보리수나 탑묘 등을 신앙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보리수는 깨달음의 나무라고 해서 스리랑카에서는 신앙화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보리수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밖에서 키울 수 없다. 그래서 실내에 화분에서 키우는 것이 보통이다. 밖에 온실이 별도로 설치 되어 있다면 열대식물 키우기에 적합할 것이다. 아산에 있는 스리랑카 사원 마하위하라가 대표적이다.

 

 

사무실에 불상은 없다. 경전을 불상처럼 여겼다. 부처님 말씀이 담긴 것이기 때문에 불상이나 다름 없다. 이제 보리수 잎을 얻었으니 앞으로 불상 역할을 할 것 같다. 보리수 잎을 보시해 주신 도현스님에게 감사드린다.

 

 

2022-07-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