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저하늘 끝까지 나는 오늘도 달린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2. 8. 24. 09:45

저하늘 끝까지 나는 오늘도 달린다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 새벽에 일어나 씻고 밥 먹고 일터로 달려 간다. 오늘 하늘을 보니 맑다. 푸른 하늘에 구름이 떠 있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오늘 새벽노을이 굉장했을 것 같다.

 

일터에 도착해서 18층 꼭대기층으로 갔다. 평촌방향 동쪽 하늘을 촬영하기 위해서이다. 해는 구름에 가려 있다. 진회색 구름사이로 햇살이 내비친다. 마치 커튼같다. 영화의 한장면을 연상케 한다.

 

 

하늘은 시시각각 변한다. 도시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하늘의 구름은 흘러가는 것이 보일 정도이지만 도시의 스카이라인의 변화는 느리다. 십년전과 비교해 보면 하늘선이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장관이다. 그러나 하늘만 못하다. 하늘의 조화는 장엄하다. 오늘 같은 하늘은 보기에도 경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물며 우주 저 끝에 있는 세상은 어떠할까?

 

제임스웹 망원경

 

최근 제임스웹 망원경이 선보였다. 우주를 촬영한 사진을 보면 우주는 밑도 끝도 없는 것 같다. 새로운 망원경이 개발될 때마다 우주학은 다시 쓰여지는 것 같다. 사람들은 왜 우주 끝까지 가려 하는 것일까?

 

우주 끝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무리 빠른 우주선이라도 우주의 끝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는 과거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원시우주와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이 있다. 제임스웹 망원경으로 촬영된 우주는 빅뱅보다 더 오랜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우주가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팽창했다고 설명한다.

 

과학의 시대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과학자들의 말을 믿는다. 과학적 사실을 들어 말하면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직접 본 것은 아니다. 과학적 근거와 데이터를 가지고 말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신은 있을까? 과학적 유물론자들은 신은 없다고 말한다. 리차드 도킨슨이 대표적이다. 당연히 내세도 부정되고 윤회도 부정된다. 오로지 지금 여기만 강조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신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제일원인이 되는 창조자, 조물주로서의 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물질을 탐구한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모든 과학은 물질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우주도 물질에 대한 것이다. 망원경을 개발하여 우주 끝까지 보고자 하는 것도 물질적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인류는 우주 끝을 볼 수 있을까? 우주 끝을 봐서 어쩌겠다는 건가?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호기심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호기심이 여기까지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호기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마침내 우주 끝까지 볼 수 있는 망원경이 개발 되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단계는 우주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항상 언제나 앎과 봄이 현전한다는데

 

인류는 우주 끝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 빛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을 보면 달려서 우주 끝까지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달려서는 우주 끝에 이를 수 없다. 그런데 생각으로 달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육사외도의 스승 뿌라나 깟싸빠와 니간타 나따뿟따가 대표적이다. 바라문들은 두 외도의 스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자 고따마여, 뿌라나 깟싸빠는 일체를 아는 자, 일체를 보는 자, 한계 없는 앎과 봄을 지닌 자라고 주장하며 이와 같이 내가 걷고 있거나 잠자고 있거나 깨어 있거나 항상 언제나 앎과 봄이 현전한다.’라고 말하고 또한 나는 무한한 지혜로 유한한 세계를 알고 또한 본다.’라고 말합니다.”(A9.38)

 

 

뿌라나 깟싸빠에 대해서만 소개 했다. 니간타 나따뿟따가 말한 것도 똑같다. 그럼에도 바라문들은 양자의 이론에 대하여 서로 다르고 모순된 이론이라고 했다. 그러나 번역서를 아무리 보아도 똑 같은 내용이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를 열어 보았다. 문제가 되는 구절을 찾아 보니 뿌라나 깟싸빠에 대해서는 나는 끝이 있는 지혜로라고 했고, 니간타 나따뿟따에 대해서는 나는 끝이 없는 지혜로라고 번역했다. 상반된 번역이다. 바라문들이 말한 것과 일치된다.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았다.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빠알리사전 PCED194에 실려 있는 것이다. 관련 문구를 찾아 보니 두 외도 스승이 주장한 것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aha anantena ñāena ananta loka jāna passa viharāmī라고 되어 있다. 이는 나는 무한한 지혜로 유한한 세계를 알고 또한 본다.”라는 뜻이다.

 

뿌라나 깟싸빠나 니간타 나따뿟따 모두 ‘anantena’라 하여 무한(endless)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이 맞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뿌라나 깟싸빠에 대하여 끝이 없는이라 하여 무한의 의미로 번역했고, 니간타 나따뿟따에 대해서는 끝이 있는이라고 하여 유한의 의미로 번역했다. 그러나 빠알리 원문을 보면 모두 ‘anantena’을 사용하여 무한의 뜻이다.

 

세속철학 로까야따

 

이 경의 제목은 로까야띠까브라흐마나숫따(Lokāyatikasutta)이다. 한국빠일리성전협회에서는 바라문 세속철학자의 경’(A9.38)이라고 이름 붙였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바라문경이라고 했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812일 두 번째로 합송한 경이다.

 

외도 스승들은 무한한 지혜로 유한한 세계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외도스승이 말하는 무한한 지혜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내가 걷고 있거나 잠자고 있거나 깨어 있거나 항상 언제나 앎과 봄이 현전한다. (carato ca me tiṭṭhato ca suttassa ca jāgarassa ca satata samita ñāadassana paccupaṭṭhita)”(A9.38)라고 했다. 잠자고 있을 때도 정말 지āa)와 견(dassana)이 있는 것일까?

 

 

경의 제목을 보면 로까야따(lokāyata)라는 말이 있다. 한역으로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한다. 세속을 따르는 철학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세속철학은 일종의 궤변론이라는 것이다. 왜 궤변론인가? 이는 자신의 결론을 논리적 귀결에 종속시키지 않고 변증법적으로 끌어 내려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았다.”(DA.I.25)라고 했다.

 

로까야따는 논리적이지 않다. 단지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언제나 앎과 봄이 현전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것도 한계가 없는 앎과 봄이 현전한다고 했다.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다. 이를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dassana), 여실지견이라고 한다. 이는 현상을 잘 관찰했을 때 가능하다. 그런데 외도스승들은 언제나 지와 견이 현존한다고 했다. 심지어 잠 잘 때도 그렇다는 것이다.

 

두 외도스승 뿌라나 깟싸빠와 니간타 나따뿟따는 세속철학자들이다. 일종의 궤변론자들이다. 그들의 이론은 증명된 것도 아니고 경험된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들의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다. 일종의 망상가들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달려서 우주 끝까지 이르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걸어서 하늘 끝까지

 

바라문들은 누구 말인지 맞는지 몰랐다. 바라문들은 외도 스승들의 말을 전하면서 부처님에게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입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최상의 보폭을 가진 자의 비유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있다. 그는 보폭이 넓다. 그리고 잘 달린다. 어느 정도일까? 속력으로 말한다면 화살보다 더 빠르다. 보폭으로 말한다면 동쪽바다에서 서쪽바다까지 한걸음에 걷는다. 이 사람은 우주 끝까지 달릴 수 있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때 동쪽으로 향해 선 사람이 나는 걸어서 세계의 끝에 도달하겠다.’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그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삼키지도 않고 잠자지도 않고 대소변도 보지 않고 나태와 피곤을 몰아내며 백세의 수명을 지니고 살면서 백년 동안 간다하더라도, 마침내 세계의 끝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도중에 죽고 말 것입니다.”(A9.38)

 

 

니까야를 보면 세계의 끝까지 가고자 하는 것에 대한 경이 종종 보인다. 상윳따니까야 로히땃싸의 경을 보면 로히땃싸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참으로 태어나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일어나지 않는 그 세계의 끝을 걸어서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도달할 수 있습니까?”(S2.26)라며 물어 본다.

 

걸어서 하늘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그것도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열반의 세계를 말한다. 열반의 세계를 걸어서라도 갈 수 있다면 평생 걸어갈 것이다. 아니 달려 갈 것이다. 탈 것이 있다면 타고 갈 것이다. 우주선이라도 있다면 우주선을 타고 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부처님은 “그 세계의 끝을 걸어서는 알 수 없고 볼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S2.26)라고 답했다.

 

어떻게 해야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영원한 행복의 세계에 대하여 걸어서는 갈 수 없다고 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우주선을 타고 가도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러나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가르침을 설했다. 그런데 그 세계는 평생 지구 끝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우주선을 타고 도달할 수 있는 세계도 아니다. 그 세계는 바로 이 몸과 마음에서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라고 말한 것이다.

 

세속철학자의 말을 들으면 인생을 허송하기 쉽다. 부처님은 동서남북으로 아무리 달려 봐도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외도 스승들의 세속철학을 비판한 것이다.

 

세속철학은 궤변이고 망상과도 같은 것이다. 부처님은 검증가능하고 경험가능한 세계의 끝을 말했다. 그런 세계는 물리적 세계는 아니다. 제임스웹 망원경으로 우주 끝까지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세계를 보는 곳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라문들이여, 그러한 경주를 통해서는 세계의 끝을 알 수 없고 볼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바라문이여, 그렇지만 나는 세계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A9.38)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의 관심사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것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에서 나는 예나 지금이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가르친다.”(M22)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모든 번뇌가 부수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괴로움을 끝낼 수 있을까? 이어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오욕락을먼저 끝내라고 했다. 다음으로 선정에 들라고 했다. 그러나 선정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왜 안되는가? 선정에 머물렀을 때 이것이 세상의 끝이라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선정에 들어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 사람도 이 세계에 머물러 있지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A9.38)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우물안 개구리가 있다. 개구리는 평생 우물안에서 살았다. 우물에서 보는 하늘이 세계의 전부인줄 알 것이다. 우물 밖에도 세계가 있다. 그런데 선정의 세계도 일종의 우물안도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벗어나라고 했다.

 

부처님은 초선정부터 시작하여 비상비비상처정에 이르기 까지 여덟 가지 선정의 세계를 소개했다. 누군가 선정에 들었을 때 어느 선정에 머물러 있다면 우물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세계의 끝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계의 끝은 어디일까? 분명한 사실은 걸어서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주선 타고서도 도달할 수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계의 끝은 이 몸과 마음 안에 있다. 최종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라문들이여, 또한 수행승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듭니다. 지혜로써 보아, 그에게 모든 번뇌가 부서집니다. 바라문들이여, 이것을 두고 그 수행승이 세계의 끝에 도달하여 세계의 끝에서 지내며 세계에 대한 집착을 여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A9.38)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계의 끝은 열반이다. 이에 대하여 상수멸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단계를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번뇌가 소멸된 단계를 말한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단계는 정신적 형성이 소멸된 단계이다. 네 번째 선정에서는 호흡이라는 신체적 형성이 소멸된다. 두 번째 선정에서는 사유와 숙고라는 언어적 형성이 소멸된다.

 

상수멸정은 열반과 동의어이다. 언어적 형성, 신체적 형성, 정신적 형성이 소멸된 상태가 상수멸정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것을 두고 그 수행승이 세계의 끝에 도달하여 세계의 끝에서 지내며 세계에 대한 집착을 여의었다.”(A9.38)라고 했다.

 

세계의 끝은 상수멸정의 상태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의 상태와 같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고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이다. 세계의 끝은 우주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작은 몸과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에서 번뇌를 소멸하면 세계의 끝에 이르는 것이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

 

인생은 괴로움이다. 실제로 살아 보니 그렇게 생각이 된다. 누구나 괴로움을 영원히 끝내기를 바란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복과 수명이 다하면 아래 세상으로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괴로움을 끝내려면 세계의 끝에 도달 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 두 가지 세계가 있다. 하나는 물리적 세계이고 또 하나는 정신적 세계이다. 물리적 세계는 걸어서 도달할 수 없다. 이상향을 걸어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세계는 도달할 수 있다.

 

정신적 세계는 이 몸과 마음에서 형성된다. 그래서 “벗들이여, 그것을 통해 세계에 대하여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할 때에 그것을 고귀한 님의 정의에 따라 세계라고 부릅니다. 벗들이여, 무엇을 통해 세계에 대하여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합니까? 벗들이여, 시각을 통해 세계에 대하여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합니다.(S35.116)라고 했다.

 

눈으로 보았을 때 정신적 세계가 형성된다. 시각의 세계이다. 청각의 세계도 있고 후각의 세계도 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세계인 것이다. 이런 세계는 끝에 이를 수 있다.

 

저하늘 끝까지 나는 오늘도 달린다

 

나는 이동할 수 있는 물리적 세계에 살고 있다. 행동반경은 넓지 않다. 사는 곳과 일터를 왕래할 뿐이다. 가끔 해외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세계 끝까지 가지 않는다. 우주 망원경이 있어서 오래된 우주 사진을 보내 오지만 “so what?”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라는 뜻이다.

 

걸어서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자전거로 국가와 국가간을 이동한다. 어떤 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대륙을 여행한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현재 처한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도움이 된다면 걸어서라도 대륙을 여행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당면한 괴로움이 있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이와 같은 괴로움을 끝장내려면 달려 가야 한다. 이 몸과 마음에서 달려야 한다. 이동해서 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정신적 세계이다. 업력으로 이루어진 형성의 세계(sakhāraloka)에서 끝장을 보아야 한다.

 

누구나 유토피아를 꿈꾼다. 어떤 이들은 천상의 세계를 꿈꾼다. 죽어서나 갈 수 있는 세계라면 지금 여기서 달려 갈 수 없다. 그러나 죽지 않고 갈 수 있는 세계의 끝이 있다. 업력으로 이루어진 상카라로까, 형성된 세계를 초월하면 된다.

 

세계의 끝에 도달하려면 업력으로 형성된 세계를 초월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번뇌의 소멸이다. 번뇌를 소멸하면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있다. 세계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 저하늘 끝까지 나는 오늘도 달린다.

 

 

2022-08-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