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깨달음사칭 감별 열 가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9. 30. 10:53

깨달음사칭 감별 열 가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낮과 밤이 매우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 벌써 금요일이다. 월요일인 것 같은데 금요일다. 납기에 쫒기다 보니 밤낮없이 보냈다.

 

아무리 바빠도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글을 쓰는 것이다. 잠시 짬을 내서 쓴다. 하나의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그 틈새를 이용해서 쓴다. 두시간 정도 시간이 있으면 충분하다.

 

오늘 니까야 모임날이다. 구월에는 추석이 있어서 한주씩 밀렸다. 니까야모임을 앞두고 써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지난 모임에서 합송했던 경에 대한 후기를 작성하는 것이다.

 

구월 첫번째 니까야모임이 916일 금요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서고에서 열렸다. 언제나 변함없이 고정멤버들이 나온다. 여기에 새로 온 분들이 있어서 평균연령이 대폭 하향 조정된 것 같다.

 

구월 첫번째 모임에서는 모두 다섯 개의 경을 합송했다. 이제까지 가장 많이 진도가 나간 것 같다. 더구나 법수가 열에 달했다. 앙굿따라니까야는 총 열한 가지 법수가 있는데 법수가 열이 되었으니 책이 끝날 날이 머지 않았다.

 

 

합송한 다섯 개의 경에서 깨달음 사칭에 대한 것이 있다. 교재에서는 궁극적 앎을 선언한 자에 대하여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까?’로 제목이 되어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선언의 경(Byākaraasutta)’(A10.84)에 해당된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 사람은 깨달았을까?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떤 이는 그 사람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떤 근거로 말하는 것일까?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깨달았다고 말하는 자도 깨달은 자이어야 한다. 왜 그런가?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알 수 없다. 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더구나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 속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선정을 얻고 성취에 밝고 타인의 마음에 밝고, 타인의 마음의 상태에 밝은 여래나 여래의 제자가 자세히 조사하고 질문하고 대화합니다.”(A10.84)라고 했다.

 

깨달음의 경지는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한 제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이 깨달았다고 떠벌리고 다닌다면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수행승이 있었던 것 같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가 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인간을 뛰어넘는 특별한 경지를 체험했다고 말하는 자이다. 주로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한 목적이 크다. 수행승이 재가신도를 대상으로 하여 깨달음을 사칭했다면 이는 바라이죄가 되어서 승단에서 추방당한다.

 

경에 따르면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라한선언으로 나타난다. 어떤 수행승이 나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지고, 해야 할 일을 해 마쳤으며, 더 이상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라고 떠벌리고 다닌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임에 틀림 없다.

 

수행자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수행자가 열반과 같은 궁극적인 체험을 하고 나면 반조하게 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수행자는 나에게 이러한 오염이 남아 있다.”(Vism.22.20)라며 남아 있는 오염원을 소멸하기 위하여 상위의 세 가지 길에 대한 수행을 한다. 이는 일래향, 불환향, 아라한향을 말한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아라한선언을 하게 된다. 이는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선언이다. 타인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태어남은 부서지고..”로 시작되는 아라한선언을 떠 벌리고 돌아 다닌다면 깨달은 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흔히 말하길 깨달음은 있어도 깨달은 자는 없다고 말한다. 누군가 나는 깨달았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깨달은 자는 무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깨달았다고 하여 자신을 드러냈을 때 이는 깨달은 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깨달음사칭이 되기 쉽다.

 

왜 깨달음사칭이 최악인가?

 

깨달음을 사칭하는 것은 승단추방죄에 해당된다. 이는 율장 비구계에 명시되어 있다. 율장 비구계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고 생겨나지 않은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했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큰 도둑이다.”(Vin.II.90)라고 했다.

 

율장 비구계에 따르면 세상에는 다섯 가지 큰 도둑이 있다고 했다. 어떤 도둑인가?

 

첫번째 도둑은 백 또는 천의 대중에 둘러싸여 존경받고 존중받고 존숭받고 공경받고 숭앙받고 재가자들 내지 출가자들의 옷과 탁발음식과 와좌구와 필수약품을 얻으며 마을과 마을을 돌아 다닌다.”라고 했다.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경도된 수행승을 말한다.

 

두번째 도둑은 여래가 가르친 가르침과 계율을 배워서 자기것이라 여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가르침의 도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번째 도둑은 청정한 삶을 사는 자를 근거없이 청정한 삶을 살지 않는 자라고 비난한다.”라고 했다. 사리뿟따를 비난한 꼬깔리까가 대표적이다.

 

네번째 도둑은 재가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감언이설로 속인다.”라고 했다. 승원의 재물을 이용하여 재가자에게 베풀고 더 많은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다섯번째 도둑은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것이 최상의 도둑이다.”라고 했다.

 

깨달음사칭이 왜 최상의 도둑일까? 이는 그들은 도둑의 마음으로 나라의 음식을 축내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누군가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Uttarimanussadhamma)’를 말하고 다닌다면 이는 어떤 이득을 보고 말한 것이기 때문에 도둑질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거짓말이다. 깨닫지도 않은 자가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큰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는 두 가지 커다란 죄악을 짓게 된다. 하나는 큰 도둑질이고, 또 하나는 큰 거짓말이다. 큰 도둑질과 큰 거짓말이 합해진 것이 깨달음사칭이다. 다섯 가지 바라이죄중에서 최악에 해당된다. 그래서 율장 비구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되어 있다.

 

 

어떠한 수행승이든지 곧바로 알지 못하면서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에 대하여 자신과 관계하여 ‘나는 이와 같이 안다. 나는 이와 같이 본다.’라고 충분히 고귀한 앎과 봄을 선언한다면, 그리고 나중에 규명되건 규명되지 않건 간에 타락하여, 죄의 정화를 기대하고 이와 같이 ‘벗이여, 나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고 운운하며 허황된 말, 거짓된 말, 망언을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자는 승단추방죄를 범하는 것으로 함께 살 수 없다.(Vin.II.90)

 

 

율장 비구계에 따르면 깨달음사칭은 다양하다. 네 가지 선정 또는 여덟 가지 선정도 사칭되고, 사향사과도 사칭되고, 심지어 열반도 사칭된다. 모두 인간을 뛰어 넘는 것들이다.

 

그가 어떤 정신세계를 가졌는지 알려면

 

누군가 깨달음을 사칭할 때 미혹한 자들은 넘어갈 것이다. 왜 그런가? 그 경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지를 아는 자는 파악할 수 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는 알 수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에 대하여 조사하고 질문하고 대화하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세계는 알 수 없다. 그가 어떤 정신세계를 가졌는지 알려면 대화를 해 보아야 한다. 체험한 것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들은 사람과 함께 논의 하면서 이와 같이 ‘이 존자는 탐구하는 자세와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르면, 이 존자는 지혜가 열악하고 이 존자는 지혜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는 심오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존자는 가르침을 설할 때에 간략하고 혹은 상세하게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힐 힘이 없다.’라고 안다.(A4.192)

 

 

그 사람의 지혜가 얼마나 되는지는 토론하면 알 수 있다. 이는 경에서 심오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체험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는 말이다.

 

그 사람보다 지혜가 더 많아야 그 사람의 지혜를 파악할 수 있다. 지혜가 낮은 자는 자신보다 지혜가 높은 자의 정신적 경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바라문이여,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참사람이 아닌 사람에 대하여이분은 참사람이다.’라고 알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불가능합니다.”(A4.187)라고 했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본다. 그가 선정 체험했다든가, 사향사과를 말한다면 그 정도 경지에 올라 갔을 때 진짜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길과 경지를 알 때는 그것은 무한적 대상을 갖는다. 그래서 그 경우 범부는 흐름에 든 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한번 돌아오는 님(一來者), 돌아오지 않는님(不還者), 거룩한 님(阿羅漢)의 마음을 알지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룩한 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안다. 다른 자도 위에 있는 자는 아래에 있는 자의 마음을 안다. 이와 같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Vism.13.110)라고 했다.

 

깨달음사칭 감별 열 가지

 

세상에는 수많은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누가 깨달았는지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깨달음은 있어도 깨달은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깨달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 선정 체험했다고 말하는 자도 있고 사향사과를 증득했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이에 대하여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른 자가 그와 토론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깨달았다고 말했을 때 범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공양을 하고 보시를 한다. 그렇다고 아예 알 수 없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선언의 경’(A10.84)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알 수 있다고 했다.

 

 

1) 이 존자는 분노하고 있다.

2) 이 존자는 원한을 품고 있다.

3) 이 존자는 위선을 품고 있다.

4) 이 존자는 잔인하다.

5) 이 존자는 질투하고 있다.

6) 이 존자는 인색하다.

7) 이 존자는 기만하고 있다.

8) 이 존자는 허상을 품고 있다.

9) 이 존자는 삿된 욕망을 가지고 있다.

10) 이 존자는 새김을 잃고 있다.

 

 

열 가지는 모두 불선법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불선법은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들이 가진 천안이 아니더라도 범부의 눈으로도 파악된다. 깨달았다고 하는 자가 분노한다면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에 비추어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퇴전이다.”(A10.84)라고 했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를 감별하는 열 가지 방법이 있다. 모두 불선법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열번째 항을 보면 이 존자는 새김을 잃고 있다.”라고 했다.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사띠를 놓치고 있다면 깨달은 자가 아닌 것이 된다.

 

앙굿따라니까야를 보면 선언의 경에만 깨달음 사칭하는 자에 대한 가르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랑하는 자에 대한 경’(A10.85)을 보면 선정을 사칭하는 자가 있다. 선정을 사칭하는 자를 알 수 있는 열 가지 방법이 소개 되어 있다. 이는 계행, 믿음, 배움이 없는 것과 훈계하기 어려운 것, 악한 친구를 사귀는 것, 나태한 것, 새김을 잃는 것, 부양하기 어려운 것, 지혜가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교만한 자의 진리

 

깨달음과 선정을 사칭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 보려면 그들의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다. 행위에서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식으로만 아는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교만의 경’(A10.86)에서 드러난다.

 

교학만 하고 수행이 없는 수행승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태어남은 부서졌고,..”라며 아라한선언을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머리로만 알고 체험이 없는 자의 아라한 선언에 대하여 교만한 자의 진리(adhimānasacca)’라고 했다.

 

많이 배운 자에게는 배움의 교만이 있다. 마치 바라문이 태생의 교만이 있는 것과 같고, 부자에게 가진 자의 교만이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교만한 자의 진리는 어떤 것일까? 이는 망상에 가깝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그는 그가 얻은 교만을 진리라고 말한다.”(Mrp.V.55)라고 했다.

 

많이 배운 자는 교만하기 쉽다. 체험도 하지 않고 아라한 선언을 했을 때 천안이 있는 부처님이나 부처님 제자들은 이를 한눈에 파악한다. 어떻게 아는가? 이는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 존자는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기억하고 배운 것을 모으고,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되고,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선언하는, 그와 같은 가르침을 자주 배우고 언어로 숙달하고 정신으로 관찰하고 견해로 꿰뚫는다.”(A10.86)

 

 

교학만으로도 지혜가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선정이나 열반과 같은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체험하지 못했을 때 한계가 있다. 오로지 가르침을 배우고 언어로 숙달한 것으로 지혜가 생겨났을 때 아라한선언을 하면 허물이 되는 것이다.

 

배운자에게는 자만이 있다. 배운 것을 마치 체험한 것으로 여겼을 때 교만한 자의 진리(adhimānasacca)’가 된다. 이와 같은 자는 열 가지로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탐욕,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 회의적 의심, 일하기 좋아함, 말하기 좋아함, 잠자기 좋아함, 사귀기 좋아함, 새김을 잃는 것으로 보았다.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있다면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본다고 했다. 범부들은 깨달은 자를 알아 보지 못한다. 정신적 상태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큰 거짓말이 되고 큰 도둑질이 된다. 왜 그런가? 깨달음을 사칭해서 이득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범부들의 눈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탐, , 치로 파악된다. , , 치를 뿌리로 하는 불선법이 남아 있다면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닌 것이 된다. 이를 퇴전이라고 했다.

 

몸이 아닌 머리로만 깨달은 자도 있다. 지식에 의한 깨달음이다. 이런 것도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 , , 치의 경계에 부딪쳐 퇴전한다면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탐욕과 분노와 함께 공통적으로 언급된 것이 있다. 그것은 새김을 잃어 버리는 것이다.

 

새김은 사띠를 말한다. 사띠를 유지하고 있을 때 깨달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올바른 사띠, 삼마사띠를 말한다. 사띠는 기억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있다면 그는 어느 정도 깨달은 사람 아닐까?

 

 

2022-09-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