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살기 보다 승가공동체 생활을 해야
수행이 안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을 돌아 봐야 할 것이다. 먼저 계율을 지키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계행부터 바로 세우고 수행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경전을 펼치는 순간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되면 스승을 찾아 가야 할 것이다.
재가수행자로 살고자 한다. 출가하지는 않았지만 출가자처럼 살고자 한다. 출가자보다 더 출가자답게 살고자 한다. 그래서 경전을 읽고, 경전을 근거로 하여 쓰고, 경을 외우고, 경을 암송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때로 마음이 흐트러진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법회에 참석하여 삼귀의하고 오계를 받아야 한다. 법문을 듣다 보면 마음을 다잡게 된다. 금요니까야 모임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9월 두 번째 니까야모임에서 두 번째로 합송한 경이 있다. 경의 제목은 ‘수행자가 숲속의 외딴 처소의 삶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어떠한 것인가?’라는 긴 길이로 되어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우빨리의 경(Upālisutta)’(A10.99)을 말한다.
준비되지 않은 새내기 수행자
수행승 우빨리는 어느 날 부처님에게 숲속에 가서 홀로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숲속에서는 깨달음을 이루기 어렵다고 말씀하시면서 삼매를 얻지 못하면 숲이 그의 정신을 빼앗을 것이라고 하며 만류했다.
우빨리는 누구일까? 부처님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자로 보인다. 우다나 메기야의 경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있는데 메기야도 시자였다. 그러나 주석을 보면 오늘날 율장을 있게 한 우빨리 장로로 알려져 있다.
부처님은 수행승이 홀로 숲에 가서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한사코 만류했을까? 그것은 명백하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수행자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만류했는데 그 중에 코끼리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여기 커다란 연못이 있다. 연못은 깊기도 하다. 코끼리가 목욕하면 문제 없을 것이다. 토끼나 고양이가 목욕한다면 어떻게 될까? 빠져 죽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토끼나 고양이는 “나와 코끼리 사이에 무슨 차이가 나는가?” (A10.99)라고 생각했다.
코끼리와 토끼는 크기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그런데 코끼리와 토끼는 같은 포유류이다. 그래서 코끼리도 네 발이고 토끼도 네 발이다. 네 발인 것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 밖에도 같은 포유류로서 차이가 없는 것이 많다. 그래서 토끼는 “나와 코끼리 사이에 무슨 차이가 나는가?”라는 자만이 생겨났다. 이는 만용이다.
토끼가 코끼리가 목욕하는 호수에서 목욕한다면 어떻게 될까? 경에서는 “그는 바닥에 가라앉거나 표면으로 떠오를 것이다.”(A10.99)라고 했다. 새내기 수행승이 홀로 숲에서 살고자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토끼의 경우와 같을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바닥에 가라 앉는 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매인 사유로 가라 앉는다는 것을 말하고, 표면으로 떠오른다는 것은 분노에 매인 사유와 폭력에 매인 사유로 떠오른다는 것이다.”(Mrp.V.67)라고 했다.
수행승 우빨리는 새내기 수행승임에 틀림 없다. 이는 경을 읽어 보았을 때 부처님이 계행부터 설명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살생등 일곱 가지 학습계율과 함께 종자나 식물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등의 스무 가지 계율도 설명했는데 후자는 다른 경에서 좀처럼 볼 수 없다. 이는 아마도 우빨리가 나중에 계율을 전수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번역 차이가 나는데
홀로 숲에서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준비 안된 자가 숲에서 살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먼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경에서는 계율, 감관수호, 그리고 올바른 앎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올바른 앎은 위빠사나에 대한 것이다. 특히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를 갖추었을 때 동굴이나 묘지 등 숲에서 사는 조건이 된다.
부처님은 우빨리에게 오장애의 극복과 함께 아홉 가지 선정을 말했다. 그런데 아홉 가지 선정을 설명할 때마다 후렴구로 “그러나 아직 최상의 의미를 체득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심지어 상수멸정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상수멸 이상의 경지가 있는 것일까?
선정에서 상수멸정이 최상이다. 상수멸정은 열반과 동의어로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직 최상의 의미를 체득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초기불전연구원(초불연)에서는 이 부분과 관련하여 “그들 자신의 이상을 실현했다면 그곳에 거주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번역과 차이가 있다.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았다.
“Imampi kho, upāli, mama sāvakā attani dhammaṃ sampassamānā araññavanapatthāni pantāni senāsanāni paṭisevanti, anuppattasadatthā ca viharanti. Iṅgha tvaṃ.”
“우빨리여, 나의 제자들은 자기 안에서 이러한 원리를 보면서 한적한 숲에 있는 숲속의 외딴 곳의 처소에서 지낸다. 그러나 아직 최상의 의미를 체득한 것은 아니다.”(KPTS역)
“우빨리여, 내 제자들은 이러한 법을 역시 자신에게서 과찰하기 위해 숲이나 밀림의 외딴 거처에 거주하는 것이지, 그들 자신의 이상을 실현했다면 그곳에 거주하지 않는다.”(초불연역)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최상의 의미를 체득한 것이 아님’과 ‘이상을 실현했다면 그곳에 거주하지 않음’이다. 이는 “anuppattasadatthā ca viharanti. Iṅgha tvaṃ”를 번역한 말이다. 여기서 ‘anuppatta’는 ‘reached; attained’의 뜻이고 ‘sadattha’는 ‘one's own welfare’의 뜻이다. 따라서 ‘anuppattasadatthā’는 최상의 선을 달성한 것을 말한다. 빠알리어 ‘viharanta’는 ‘living ; abiding; dwelling; sojourning.’의 뜻이다. 빠알리어 ‘iṅgha’는 ‘come on; look here’의 뜻이다.
부처님은 우빨리에게 선정이 최상의 목표가 아님을 말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거주지에 대한 임무(vāsa dūra)’와 ‘족쇄에 대한 임무(gantha dūra)’ 두 가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거주지에 대한 임무는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것이고, 족쇄에 대한 임무는 율장에 관한 선도자를 말한다.
우빨리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 율장 결집을 이끌었다. 아마 이것이 우빨리에게 부여된 임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우빨리가 새내기 수행승 시절이었다. 이는 부처님이 경의 말미에 “그대는 참모임 안에서 지내라.”(A10.99)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왜 우빨리에게 상수멸정까지 설명하고서 아직 최상의 의미를 체득한 것은 아니라고 했을까? 더구나 초불연 번역에서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했다면 그곳에 거주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전혀 다르게 번역했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선정을 달성했을 때 그곳을 떠나라’는 의미로 보인다. 이는 KPTS에서 ‘최상의 의미를 체득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과 다른 것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는 빠알리어 'viharanta'에 대한 번역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초불연에서는 ‘viharanta’에 대하여 ‘dwelling’의 뜻으로 보았기 때문에 직역하여 머무는 것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KPTS에서는 의역했다. 같은 의미이지만 번역어를 달리 사용함에 따라 전혀 다른 번역으로 보이는 것이다.
먼저 선우를 만들어야
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의 말미에 “그대는 참모임 안에서 지내라. 참모임 안에서 지내면 평안하리라.”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숲속 동굴이나 묘지에 살며 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선정을 닦아야 한다. 선정 없이 동굴이나 묘지에서 보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선정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상수멸정을 성취했지만 남은 것은 아라한이다. 아라한이 되어야 최상의 의미를 체득하는 것이고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준비 되지 않는 자는 숲속에서 살기 힘들다. 그래서 부처님은 먼저 참모임, 즉 상가에서 지내라고 했다. 이 말은 홀로 살지 말고 승가공동체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라는 말과 같다. 이와 관련하여 우다나 메기야의 경에서도 부처님은 비슷한 얘기를 했다.
메기야는 부처님 시자였다. 메기야가 숲에서 홀로 수행하고자 할 때 부처님은 말렸다. 해탈할 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부처님은 먼저 승가에서 공동체 생활을 잘 해야 할 것을 말씀 하셨다. 그래서 해탈의 성숙에 도움이 되는 다섯 가지 원리를 말씀 하셨다. 그 중 하나를 보면 선한 벗과 사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메기야여, 착한 벗, 착한 친구, 착한 동료와 사귀는 자는 다음과 같은 것이 기대된다.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살고 마음을 여는데 도움이 되고 오로지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적멸하여, 곧바로 알고, 올바로 깨닫고, 열반에 드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 예를 들어 소욕에 대한 이야기, 만족에 대한 이야기, 멀리 여읨에 대한 이야기, 사교의 여읨에 대한 이야기, 정진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삼매에 대한 이야기, 지혜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는 이러한 이야기를 원하는 대로 얻고 어렵지 않게 얻고 힘들이지 않고 얻을 것이다. 메기야여, 착한 벗, 착한 친구, 착한 동료와 사귀는 자는 다음과 같은 것이 기대된다. 그는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제거하고 착하고 건전한 원리를 갖추기 위해 착하고 건전한 원리에 대하여 견고한 자이고 확고하게 노력하는 자이고 멍에를 내려놓지 않는 자로서 열심히 정진할 것이다. 메기야여, 착한 벗, 착한 친구, 착한 동료와 사귀는 자는 다음과 같은 것이 기대된다. 그는 지혜로워 고귀한 꿰뚫음으로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를 갖출 것이다.”(Ud.34)
부처님은 선우를 사귀는 것에 대한 이점과 이득을 설명했다. 이는 승가공동체 생활에서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홀로 숲에서 수행한다고 했을 때 위험성이 있을 것이다. 감각적 쾌락에 매인 사유, 분노에 매인 사유, 폭력에 매인 사유가 일어나기 쉽다는 것이다.
홀로 살기 보다 승가공동체 생활을 해야
부처님은 우빨리의 경에서 그대는 참모임 안에서 지내라고 했다. 이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해탈의 성숙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먼저 익히라는 말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우빨리의 경은 우다나 메기야의 경과 연관성이 있다.
니까야를 보면 서로 연계가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니까야에서는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저 니까야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우빨리의 경과 메기야의 경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상호보완적이다. 하나의 니까야만 읽어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니까야도 읽어 보아야 하는 당위성이 된다. 홀로 살기 보다 승가공동체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경이라고 볼 수 있다.
2022-10-1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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