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보는 즉시 사라지게 하는 작용심(作用心)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0. 19. 11:43

보는 즉시 사라지게 하는 작용심(作用心)

 

 

흔히 깨달은 자에 대하여 탐, , 치가 소멸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깨달은 자인지 알려면 그가 얼마나 욕심을 부리는지, 얼마나 화를 내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정말 깨달은 자는 하나도 욕심이 나지 않고 화가 나지 않는 것일까?

 

2022 10월 첫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는 오염원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에서 현자인지 현자가 아닌지에 대해 알아보는 척도는 무엇인가?’를 합송하고 토론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아지따의 경(Ajitasutta)’(A10.116)에 대한 것이다.

 

십정도는 혜, , , 혜로

 

부처님은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무수하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생겨난다고 했다. 여기서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위는 십사도를 말한다. 팔정도에서 앎āa)과 해탈(vimutti)을 추가하면 십정도가 되는데 이와 반대되는 것이 십사도인 것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십정도는 혜, , , 혜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팔정도는 계, , 혜 삼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계학이 가장 먼저 오는 것이 아니라 혜학이 먼저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정견이 바로 서야 함을 말한다.

 

여기 두 갈래 갈림길이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부처님은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두 길이 나타난다. 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S22.85)라고 했다. 오늘날 좌파와 우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당시에 통용되던 말이다. 경에 따르면 오른쪽 길로 가는 팔정도의 길이 된다. 왼쪽으로 가면 팔사도가 될 것이다.

 

팔정도에서 순서가 혜학, 계학, 정학인 것은 정견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는 다름 아닌 예비적 지혜에 해당된다. 그런데 십정도가 되면 혜학, 계학, 정학, 혜학이 된다는 것이다. 이때 앞의 혜학은 정견과 정사유로서 예비적 지혜이고, 뒤의 지혜는 앎과 해탈에 대한 것으로서 완성된 지혜를 말한다.

 

으로 번역되는 담마

 

경에서 무수하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팔사도와 십사도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무수하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를 번역한 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여러가지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라고 번역했다. 담마에 대하여 달리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빠알리어 담마(dhamma)의 뜻은 매우 다양하다. 한역 경전에서는 대개 법()으로 통일 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리 번역될 수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는 담마에 대하여 진리, 원리, 가르침, , 것 등으로 상황에 맞게 번역되어 있다. 반면 초기불전연구원(초불연)에서는 담마에 대하여 법이라는 말로 일괄처리하고 있다. 이는 업으로 번역되는 깜마도 마찬가지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법으로 일괄번역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이 담마라고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래서 함부로 다른 번역어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태도는 빅쿠보디의 영역본 해제에서도 발견된다.

 

악하고 불건전한 것은 아꾸살라 담마를 말한다. 이는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해로운 법이라고 했다. 이는 의 차이다. 담마를 법으로 통일 하여 말할 때 악한 것도 법이 된다.

 

담마는 때로 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는 아꾸살라 담마에 대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법이라기 보다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으로 번역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아의 성자에게도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생겨날까?

 

팔정도와 십정도는 담마(dhamma)에 대한 것이다. 반면 팔사도와 십사도는 아담마(adhamma)에 대한 것이다. 담마와 담마 아닌 것에 대한 차이인 것이다. 이때 담마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담마를 가르침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부처님 가르침은 진리의 말씀이다. 진리를 설하는 자에게는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이 일어날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에게도 역시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이 일어날 수 없다. , , 치로 대표되는 오염원이 소멸되었을 때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에서는 어떠할까?

 

선정의 상태에서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일어날 수 없다. 마음이 대상에 집중된 상태에서는 아꾸살라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 대신 꾸살라, 착하고 건전한 법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런데 선정에서 나오면 상황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무아의 성자에게도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생겨날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과 같은 불선한 것들을 말한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마주쳤을 때 느낌과 지각과 의식이 생겨나는데 아라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아의 성자에게도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생겨난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도 괴로움을 느꼈다!

 

초기경전을 보면 도처에서 사띠하라는 말이 나온다. 대개 사띠와 삼빠자나가 함께 쓰인다. 이를 KPTS에서는 새김을 확립하며 올바로 알아차린다.’라고 번역했다. 초불연에서는 마음챙기고 알아차린다.’라고 번역했다.

 

부처님도 아픔을 느꼈다. 이는 돌조각의 경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돌조각 때문에 발에 상처가 났을 때 세존께서는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을 심하게 느끼셨다.”(S1.38)라고 묘사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도 괴로움을 느낀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은 자이다. 그렇다고 목석과도 같은 자가 아니다. 부처님도 느낌이 있고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부처님이라고 하여 감정이 마른 에이아이(A.I)와 같은 기계인간이 아님을 말한다.

 

영화 이퀄스(Equals)에서

 

영화 이퀄스(Equals, 2015)가 있다. 감정이 통제된 SF판타지 로맨스 영화를 말한다. 영하를 보고 영화 이퀄스(Equals)와 불교적 세계관’(2017-10-15, https://bolee591.tistory.com/16158082?category=1117952 )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바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인 것은 우월한 것이고, 감정적인 것은 열등한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영화에서는 미래 어느 때 두 개의 공동체를 대비시켜 보여준다. 하나의 공동체는 감정이 제거된 우월적 공동체이고, 또 하나의 공동체는 감정이 있는 열등적 공동체이다. 마치 한 공간에서 문명인과 원시인이 구역을 달리하여 살아가는 것과 같다.

 

영화에 따르면, 이성이 지배하는 공동체에서는 모든 것이 동등하다. 유전자 조작으로 감정적 요소를 모두 제거했기 때문에 지적으로도 평준화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영화에서는 동등하다는 의미로 이퀄스(Equals)라고 한다. 과연 이런 공동체가 이상적이고 행복할까?

 

감정이 배제된 이퀄스들에게는 사랑도 증오도 없다. 사랑이 감정이 없기 때문에 남녀결합에 따른 출산도 불가능하다. 심지어 감정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서 병이 난 것처럼 질병의 상태로 본다. 오로지 이성만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에이아이와 같고 목석과 같은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 이상적인 세상일까?

 

끼리야찟따,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

 

부처님은 목석이 아니다. 부처님도 다리에 상처가 나면 아픔을 느꼈다. 다만 육체적 아픔이 정신적 아픔으로 전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S1.38)라고 한 것이다.

 

번뇌가 다한 무아의 성자 아라한에게도 감정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감정이 갈애와 집착이 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결과 어떤 과보도 생기지 않게 한다. 악업은 물론 선업도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아라한의 마음을 작용심(作用心)이라고 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네 가지 마음이 있다고 했다. 선심, 불선심, 과보심, 작용심을 말한다. 번뇌다한 무아의 성자에게도 이와 같은 네 가지 마음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범부에게는 작용심이 없다는 것이다. 작용심은 무아의 성자 아라한에게만 있는 것이다.

 

작용심을 빠알리어로 끼리야찟따(kiriyacitta)라고 한다. 이를 작용만 하는 마음또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따라서 어떤 과보도 산출하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아비담마에서는 작용심에 대하여 기쁨이 함께한, 지혜가 결합한, 자극받지 않은 큰 작용만하는 마음”(붓다아비담마 75, 멤 틴 몸)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지혜는 기본적으로 업과 업의 과보를 아는 지혜를 말한다.

 

어떤 업이든지 업을 지으면 윤회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선업이든 악업이든 짓지 않아야 한다. 이는 작용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대상에 대하여 갈애를 일으키지 않고 알아차림 하면 없을 짓지 않게 되어 있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만 일어나는 것이다.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말아야

 

 

윤회의 흐름을 끊은 수행승,

그에게는 집착이 없고,

선하거나 악한 모든 일이 끊어졌기 때문에

타오르는 번뇌가 없습니다.”(Stn.715)

 

 

게송에서 윤회의 흐름을 끊은 수행승에 대하여 선하거나 악한 모든 일이 끊어졌다라고 했다. 육조단경에서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이라는 말이 연상된다. 이는 선악(善惡)의 사량(思量), 곧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생각을 끊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게송에서는 업의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않는 것이다.

 

작용심은 업을 짓지 않는 마음이다. 이는 다름 아닌 아라한의 마음이다. 번뇌 다한 성자에게 불선심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항상 사띠가 있기 때문에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다. 느낌 단계에서 제압되는 것이다.

 

아라한은 어떤 업도 짓지 않는다. 이는 선하거나 악한 모든 일이 끊어졌다’(Stn.715)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말은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S7.20)라고 했다.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말라는 것이다.

 

범부들은 선업을 지어야 한다. 선업공덕을 지어서 인간이나 천상 등 선처에 나야 한다. 그러나 윤회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수행승은 선업도 짓지 말아야 한다. 그그래서 주석에서는 거룩한 길(阿羅漢 向)은 착하고 건전한 습관들의 소멸을 닦는 것이고, 거룩한 경지(阿羅漢 果) 그것들은 소멸되었다고 말해진다.”(Pps.III.207)라고 했다.

 

몸을 가지고 있는 한 번뇌가

 

니까야 공부모임에서 가장 논란거리는 번뇌 다한 무아의 성자도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무수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사라진다.”라는 말을 했다. 니까야에 있는 말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번뇌 다한 성자에게도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일어날 수 있다.

 

범부와 아라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똑 같은 사람임에도 차이가 있다. 아라한에게는 범부에게는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작용심이다. 범부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갈애가 일으켜 집착하게 된다. 그것이 악업이든 선업이든 업이 되기 때문에 세세생생 윤회하는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에게는 범부에게는 없는 작용심이 있다. 대상에 대하여 알아차림 하기 때문에 업이 되지 않는다.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55)

 

 

테라가타에서 레바따 장로가 읊은 게송이다. 이 게송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번뇌다한 무아의 성자에게도 사띠가 계속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제까지 사띠를 하는 것일까? 이는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사띠와 삼빠자나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작용심이다.

 

몸을 가지고 있는 한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아라한이라고 하더라도 목석같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 보는 에이아이도 아니고 감정이 제거된 이퀄스도 아닐 것이다. 아라한도 아픔을 느낀다. 단지 알아차릴 뿐이다. 단지 작용만하는 마음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업도 짓지 않는다.

 

보는 즉시 사라지게 하는 작용심

 

부처님은 일체지자이다.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아는 자이다. 당연히 불선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래서 무수한 악하고 불건전한 것(아꾸살라)이 사라진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무수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일어남을 말한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자각적인 것으로 설명했다.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사라짐을 말한다.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자각하면 사라진다. 바로 이것이 작용심이라고 볼 수 있다. 보는 즉시 사라지는 것이다.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아라한은 보는 즉시 사라진다.

 

 

2022-10-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