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 모임은 내년에도 계속된다
어제 금요니까야 모임 가졌다. 이제 니까야모임도 거의 끝자락에 와 있다. 한번만 더 하면 끝난다. 회향일은 11월 11일이다. 왜 회향일이라 하는가? 지은 모든 공덕을 되돌리기 때문에 회양이라고 한다. 어떤 공덕인가? 니까야 6년 결사에 대한 것이다.
니까야모임이 처음 시작된 것은 2017년 2월 둘째주 금요일의 일이다. 왜 이렇게 자세하게 아는가?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다.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를 노트에 기록해 놓았다. 전재성 선생이 말한 것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자 했다. 모임이 끝나면 후기를 작성했다. 그날 이후 작성된 글을 보니 167개에 달한다. 블로그 니까야강독모임 카테고리에 보관되어 있다.
금요모임은 녹음도 되어 있다. 홍광순 선생이 스마트폰으로 녹취한 것이다. 언제부터 녹취했는지 알 수 없지만 초창기 때부터 한 것 같다. 홍광순 선생은 거의 한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6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백회가 넘는 모임에 대하여 빠짐없이 녹음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쩌면 훗날 역사적 사료가 될지 모르겠다.
언젠가 니까야모임에 대하여 글을 쓸 때 ‘결사(結社)’라는 말을 했다. 결사의 사전적 의미는 “뜻이 같은 사람들이 공통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여 단체를 만듦”이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금요니까야모임도 일종의 결사체에 해당된다.
금요니까야 모임이 시작 되었을 때 결사라는 말은 없었다. 니까야를 합송하고 설명을 듣고 토론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도 모른 채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것이야말로 한국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금요니까야결사’라고 이름 붙여 본 것이다.
한국불교가 중흥하려면 결사체가 많이 생겨야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소그룹모임을 말한다. 니까야읽기 모임이 이곳 저곳에 생겨서 니까야를 읽고 토론한다면 한국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임에 틀림 없다. 왜 그런가? 니까야를 읽어 보아서 알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니까야는 새로운 하늘과 땅이다. 니까야는 나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니까야를 만나지 못했다면 우물안 개구리 신세와 다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니까야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기 위한 창과 같은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수많은 사람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것은 니까야가 좋은 줄 알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저자 직강이다. 삼장에 대하여 꿰뚫고 있는 전재성 선생이 직접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까? 그래서 안양에서 고양까지 왕복 5시간 걸림에도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백회가 넘는 모임에서 결석한 것은 서너번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어제 모임에는 열명 모였다. 도현스님, 장계영, 홍광순, 유경민, 김경예. 방기연, 이성기, 정진영 선생이 참석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열명 안팍이다. 아무리 훌륭한 강사가 있어도 아무리 교재가 훌륭해도 가치를 알고 모이는 사람들은 드물다. 아직 시절인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 사정이 있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지나가면 끝이다.
어떤 일이든지 결실이 있어야 한다. 니까야모임의 결실은 어떤 것일까? 금요일 저녁 러시아워 때 2-3시간 이동하여 힘들게 참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전의 말씀을 아는 것은 기본이다. 전재성 선생의 설명을 듣는 것은 행운이다. 그러나 더 가치 있는 것은 도반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모임은 모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모임은 모여야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임도 모임 나름이라는 것이다. 모임에는 불화의 모임도 있고 화합의 모임도 있고 정진의 모임도 있다. 이 중에 최상은 정진의 모임이다. 이는 배워서 알고 있다. 금요모임 교재에 있어서 합송한 바 있다.
누구든지 불화하는 모임에 들어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저사람 꼴보기 싫어서 나가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불화의 모임에 해당된다. 모임에 나가면 하나라도 배울 것이 있어야 한다. 화합의 모임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정진의 모임이다.
왜 정진의 모임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향상이 있고 성장이 있기 때문이다. 정진의 모임에서는 반드시 배우고 싶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나도 저 사람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사람처럼 되고자 정진을 한다. 이것이 정진의 모임 최대의 장점이다.
금요니까야모임은 정진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다. 모임을 가질 때마다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합송한 경에서 배울 것을 말한다. 진리의 말씀이 실려 있는 경이 있고, 경을 해설하는 삼장에 통달한 전재성 선생이 있고, 또한 배움에 열정에 불타는 도반들이 있다. 이런 모임이야말로 최상의 정진의 모임 아닐까?
언제나 그렇듯이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서고겸 사무실에 일찍 도착한다. 모임이 시작 되기 한시간 전에 도착한다. 먼저 와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전에는 바닥을 닦고 쓰레기를 비우는 등 청소를 했다. 빠짐 없이 하는 일은 차를 준비하는 것이다. 주전자에 보이차를 넣는 일이다. 사람들이 오면 한잔씩 주기 위한 것이다.
서고에 일찍 도착하면 전재성 선생과 이야기할 기회를 갖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무엇보다 관심 있는 것은 현재 번역중인 자타카에 대한 것이다. 번역이 힘들어 일까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맞아 준다. 그러나 어제는 달랐다. 무언가 홀가분한 것 같았다.
자타카를 볼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어제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고 한다. 이에 전재성은 매우 홀가분해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무려 3년 3개월 걸렸다고 한다.
자타카 번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다. 교정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자타카는 다른 니까야와는 달리 번역이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어떤 때는 울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직까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갔기 때문일 것이다. 빠알리원문과 주석을 번역한 것은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자타카는 처음부터 통합본으로 출간된다. 본래 자타카는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의 상윳따니까야 정도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를 한권으로 만들었는데 특수하게 제작된다. 작크가 달린 인조가죽케이스와 특수 종이를 사용한다. 두께가 매우 얇은 종이인데 현재 품절상태라고 한다. 수입을 해서 제작해야 한다고 한다.
인조가죽케이스로 만들어지는 자타카는 책을 만드는데만 한달 반가량 걸린다고 한다. 종이를 수입하는 보름기간을 합하면 지금부터 두 달 후에 자타카를 시중 서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2023년 2월이 될 것 같다.
자타카 번역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대장정’같다고 했다. 번역이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니까야 모임에 갈 때 지친 모습이 그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마침내 2,816쪽에 달하는 2단 칼럼의 자타카를 보게 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자타카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고리역할을 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원형은 자타카에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보살사상이다. 자타카는 부처님이 전생에 십바라밀 수행한 것에 대한 대서사시이고 대영웅담이다. 자타카가 출간되면 한국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지 모른다.
자타카는 어쩌면 니까야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전이 될지 모른다. 남방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는 재가신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경전은 자타카라고 한다. 이는 재가불교와 관련된 것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태국 유명 사원에 가면 자타카에 실려 있는 이야기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자타카 대미를 장식하는 벳싼따라 자타카가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자타카는 부조로도 남아 있다. 산치대탑이나 앙코로왓트, 보르보두르 등 옛 사원 석조건축물에는 자타카에 실려 있는 이야기가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자타카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재가신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경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타카는 스토리로 되어 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어린 아이에게 이야기로 들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자타카는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교리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보살의 영웅담이 실려 있어서 인기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자타카를 볼 날이 이제 머지 않은 것 같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는 빚지고 사는 사람 아닌가?”라고. 왜 그런가? 사회에서 혜택 받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파트에서 뜨거운 물에 샤워하며 사는 것도 여러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쓴다. 글을 쓸 때마다 경전 번역자의 노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마치 산소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경전 번역자에 대하여 빚을 지고 산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빚진 음식을 즐기는 것과 같다.
출가자가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했을 때 빚진 음식을 즐기는 것과 같다. 계행이 엉망인 자는 도둑질한 것을 즐기는 것과 같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유산을 즐기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유산을 즐기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면 자기 것을 즐기는 자가 된다. 탁발음식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여 먹는 것이다. 복전이 된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이 밥 먹는 것에 대하여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기네.”(M86)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어쩌면 빚진 자들의 세상인지 모른다. 누구도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다. 누군가 나홀로 살아가는 것을 즐긴다면 그는 빚진 자라고 볼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다른 사람의 노고가 실려 있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날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게 된 것은 행운이다. 불과 십여년전까지만 해도 이런 가르침이 있는 줄 조차 몰랐다. 아마 지금도 이런 가르침이 있는 줄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니까야가 뭐꼬?”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부처님의 원음은 빠알리삼장으로 전승되어 왔다. 구전 되어 온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에서도 부처님 원음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빠알리 삼장을 꽤뚫고 있는 전재성 선생으로부터 무려 6년 동안 설명을 들었다. 이런 행운은 언제나 찾아 오지 않는다.
빠알리니까야 금요모임은 정확하게 5년 8개월 되었다. 이를 감히 결사라고 칭한다. 한번만 더 열리면 회향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내년 2월경에는 새로운 교재로 니까야모임이 열린다. 교재는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방대한 상윳따니까야를 한권으로 요약한 것이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을 선별한 것이다. 니까야 모임은 내년에도 계속된다.
2022-10-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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