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금요니까야모임 회향의 날에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12. 16:54

금요니까야모임 회향의 날에


금요니까야모임이 회향했다. 5년 10개월만이다. 2017년 2월 처음으로 모임이 생긴 이래 6년이라는 세월을 달려왔다. 어제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실로 숨가쁘게 달려 왔다. 6년을 한결같이 참석했다. 참석해서 글을 남겼다. 블로그에 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책으로 낼 예정이다.

무엇이든지 첫경험은 강렬하다. 니까야모임이 처음 열리던 날 사람들을 보았다. 그때 보았던 사람들이 끝까지 완주했다. 도현스님과 장계영 선생이다. 홍광순 선생은 다음 번 모임부터 나와서 완주했다. 이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모임이 유지되어 왔다.

모임에 몇 차례 빠졌다. 어쩔 수 없이 빠진 경우를 말한다. 백회가 넘는 모임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전재성 선생을 말한다.

모임은 전재성의 모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재성 선생이 모임을 주도 하기 때문이다. 모임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재성 선생이 참여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전재성 선생이 미국에 가면 그 달은 방학이 된다.

2022년 11월 11일, 흔히 말하는 빼빼로데이날 서고에 사람들이 모였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서고겸 사무실을 말한다. 회향일에는 좀더 일찍 모이기로 했다. 30분 일찍 와서 다과회를 하는 것이다.

음식을 준비했다.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준비 했다. 장계영 선생은 케이크를 준비했다. 김경예 선생은 떡을 준비했다. 나는 롤케익빵과 음료수와 과일을 준비했다. 빼빼로데이날이어서 빼빼로 과자도 준비했다.


모두 17명 참석했다. 고정멤버들 뿐만 아니라 최근에 합류한 사람들, 그리고 오래 전에 인연 있었던 사람들을 초대했다. 한번이라도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문자를 보내서 성사된 것이다.

6시 반에 다과회를 시작했다. 떡과 빵과 음료를 마시면서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소감을 말했다. 주로 모임에 오게 된 인연을 말했다. 블로그를 보고 왔다는 사람이 많았다.

회향모임에 참석한 연령대는 다양하다. 주로 5060이 많지만 2030도 있다. 특히 20이 눈에 띈다. 기특한 일이다. 더구나 그는 누나까지 데리고 왔다. 이십대 때부터 불교를 접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더구나 빠알리 삼장을 꽤뚫고 있는 전재성 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는 것은 일생일대에 있어서 행운 중의 행운일 것이다.


모임은 도현스님이 있어서 시작되었다. 도현스님이 없었다면 모임도 없었을 것이다. 이전에 모임이 있긴 있었지만 흐지부지하여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도현스님과 재가수행자들이 합류하여 오늘의 금요니까야모임이 있게 되었다.

도현스님은 모임이 벌써 6년된 것에 놀랐다고 했다. 엊그제 같았는데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세월을 잊고 산 것이다. 매번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새로웠고 행복했다고 한다. 앞으로 모임이 10년 결사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각자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했다. 전재성 선생 차례가 되었다. 이날 전재성 선생은 꽤 길게 이야기 했다. 그것은 니까야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것이었다.

한국불교에 니까야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동아시아불교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니까야를 접하게 되는 것은 필연으로 본다.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세계가 글로벌화 됨에 따라 니까야는 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전재성 선생이 니까야를 번역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독일 유학시절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중반까지 독일에서 8년 공부했었는데 페터 노이야르 선생을 만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한다.

페터 노이야르 선생은 거지성자로 잘 알려져 있다. 전재성 선생이 독일 유학시절 페터 노이야르와 만난 것을 자전적으로 쓴 것이 거지성자이다.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서와 같다.

왜 거지성자인가? 이는 책에서 페터 선생이 “나는 집없이 돈없이 여자없이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 페터선생은 부처님처럼 살았다. 누더기 옷을 입고 쾔른대학 숲속의 나무아래서 잠을 잤다. 음식은 얻어 먹었다. 낮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았다. 유학생들하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 전재성 선생과도 만난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거지성자를 만난 것에 대하여 운명적이라고 했다. 거지성자는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처님 가르침도 잘 알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이미 1910년대에 니까야가 독일어로 번역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재성 선생은 거지성자를 만나고 난 다음 니까야 번역을 꿈꾸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를 알아야 했다. 독일어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티벳어 등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산스크리트어는 포글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았고, 티벳어는 미카엘 교수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번역은 의욕과 열정만 있어서는 부족하다. 가장 중요한 곳은 언어적 소양이다. 물론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다 수행력까지 겸비하면 최상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적 소양이다.

전재성 선생은 유학기간 중에 언어적 소양을 탄탄히 하고자 했다. 독일어, 산스크리트어, 티벳어 뿐만 아니라 힌디어도 공부했다고 한다. 여기에 일본어와 한문 독해는 필수에 해당된다. 그래서 영어를 포함하여 7개 국어 독해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번역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언어를 다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각 언어로 되어 있는 경전을 독해할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까야를 번역할 때 영역, 독역, 한역, 일역, 티벳역 등 일곱 종류의 경전을 모두 본다고 했다.

전재성 선생은 귀국 후에 니까야 번역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돈연스님과 함께 했다. 돈연스님이 후원한 연구소라고 했다. 경복궁 옆에 있었는데 1년 가량 번역했다고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출간을 앞두고 연구소가 불에 타버렸다는 것이다. 한옥 목조건물에 불이 난 것이다.

전재성 선생이 처음 번역했을 때는 원고를 손으로 썼다고 한다. 육필원고가 1990년 화재로 인하여 잿더미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너진 잿더미속에서 기적적으로 원고를 발견했다고 한다. 다른 것은 다 탔는데 원고만 타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부처님 가피겠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원고는 살아 남았다. 출간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과정을 보면 순탄치 않다. 후원을 약속했던 돈연스님은 차일피일 미루었다. 강원도에 된장공장 일에 열중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후원자가 나타났으나 잘 되지 않았다.

생계가 안정되어야 한다. 안정적 수입이 있어야 계획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번역에 매진하고 싶어도 후원자가 없으면 쉽지 않다. 전재성 선생은 스리랑카 빠알리불교대학 분교에서 강의도 하면서 번역을 했다. 그러나 강의를 하고 논문을 쓰면서 번역을 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4-5년 걸려 빠알리사전을 출간했다고 한다.

아이엠에프가 닥쳤다. 빠알리대학도 문을 닫게 되었다. 가족이 있는 상태에서 생계가 막막했다고 한다. 하와이에서 처제 가족이 식당을 했는데 가족들을 보내 놓고 왔다고 한다.

혹독한 아이엠에프 기간에 번역된 원고를 출간하고자 했다. 그러나 후원자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길에서 도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가 조계종 분규가 정점에 치닫고 있었을 때라고 하는데 1998년일 것이다. 그때 당시 도법스님은 종단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전재성 선생과 도법스님은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귀국후에 니까야 번역을 하고 있을 때 도법스님 등이 연구소를 찾아 와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인연이 있어서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때 “니까야 번역한다고 했는데 출간 되었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고 한다.

도법스님은 니까야가 출간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거의 10년전에 번역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10년이 지나도 출간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한 것이다. 그래서 후원자가 되어 주기로 했다고 한다.

전재성 선생은 도법스님을 차에 태우고 전국 한바퀴를 돌 계획을 세웠다. 한번 돌아나 보자는 심정으로 하게 된 것이다. 처음 찾아간 곳은 동학사 일연스님이었다고 한다. 일연스님은 출간비용을 낼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은 실상사였다고 한다.

실상사에서 수경스님을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경스님은 전재성 선생에게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재성 선생이 70년대에 월폴라 라훌라의 책을 번역한 것에 감명 받았기 때문이다. 수경스님은 “이것을 보고 제가 운동에 뛰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경스님은 흔쾌히 출간비용을 냈다. 그때 당시 무려 천만원을 보시한 것이다. 수경스님을 감동하게 만든 책은 월폴라 라훌라의 ‘What the Buddha Taught and Noble Eightfolf Path’이다. 이 책은 현재 빠알리성전협회에서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고 있다. 몇 년전 정혜사에서 니까야 모임 가졌을 때 참석자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

니까야는 1999년 최초로 출간되었다. 상윳따니까야 세 권이 한국불교 1,700년 역사에서 최초로 출간된 것이다. 무려 10년만의 일이다. 연구소가 불에 타버리는 등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부처님 원음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번역과 관련하여 에피소드도 하나 소개 했다. 그것은 광주에 있는 광륵사에서 검토작업을 할 때라고 한다. 그때 당시 고익진 선생의 배려로 광주에 1년 머물며 작업을 했는데 진척이 없었다고 한다.

사람이 너무 많아도 번역하기 힘들다고 한다. 함께 번역 하다 보면 용어 하나 가지고 토론하다 세월만 흘러간다는 것이다. 도저히 진척이 되지 않아 이후 홀로 번역하게 되었다고 한다.

니까야는 1999년 처음 세상에 나왔다. 1989년 번역하기 시작한 이후 10년만이다. 물론 상윳따니까야 3권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번역서를 신호탄으로 이후 사부니까야를 완역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삼장을 번역하고 있다. 모두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율장은 완역되었다. 경장은 이제 4-5권 남겨 놓고 있다. 쿳다까니까야의 천궁사, 아귀사 같은 몇 종류의 경전이 남아 있는 것이다. 논장으로는 청정도론이 완역되었다.

전세계적으로 한사람 힘에 의해서 니까야가 여러권 완역된 사례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독일의 노이만의 경우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 수타니파타를 완역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노이만이 55세 죽었기 때문이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많이 번역했을 것이라고 한다.

영역으로는 현재 빅쿠보디가 가장 많이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사부니까야를 거의 다 혼자 힘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전재성 선생만한 번역가가 없다. 혼자 힘으로 사부니까야는 물론 쿳다까니까의 거의 대부분 경전을 번역했고 무엇보다 율장을 완역했다는 사실이다.

전재성 선생과 지난 7년 함께 했다. 2016년 홍제동 아파트 공부모임부터 시작하여 2017년 2월부터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서고에서 모임을 통하여 7년을 함께한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늘 한결 같다. 처음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늘 번역가 그 대로 모습이다. 여기에 수행까지 겸비했다. 번역에 임하기 전에 반드시 좌선을 해서 마음을 청정하게 한 상태에서 번역에 임한다고 했다.

최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자타카가 완역되었다. 3년 3개월 걸린 것이다. 금요니까야 멤버들이 교정작업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은 좀처럼 볼 수 없다. 거의 초인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2016년 홍제동 공부모임 시절 전재성 선생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제7차 결집’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전재성 선생이 아쉬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니까야가 좀더 일찍 출간되었더라면”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때 연구소가 불에 타지 않았더라면 니까야 출간은 10년 앞당겨졌을 것이다. 또 하나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후학이다. 번역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한때 번역가를 양성하기도 했으나 생계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고 한다.


니까야모임이 회향되었다. 다과회가 끝나고 남은 수업을 진행했다. 여느 때 처럼삼귀의와 오계를 했다. 10분간 입정하고 강독에 들어갔다. 남은 세 개의 경을 마치자 모두 다 끝났다.

니까야 교재 ‘생활속의 명상수행’을 모두 다 마쳤다.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단체사진과 개별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참석자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었다. 내년 모임 교재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이다. 상윳따니까야 엔솔로지이다. 경을 선별하여 한권으로 만든 것이다.


6년에 걸친 모임이 회향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내년에 새롭게 시작한다. 새로운 교재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내년 1월 27일(금)에 첫 모임이 열린다.


2022-11-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