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큰 공덕이 되는 내면의 제사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3. 12:48

큰 공덕이 되는 내면의 제사


초기경전을 보면 외도사상에 대한 것이 많다.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흔히 육사외도라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자이나교가 있다. 사람들은 자이나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10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은 자이나교에 대해서 설명했다. 합송한 경은 ‘의도적으로 집적된 업은 그 과보를 받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음을 말한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고의적인 것에 대한 경1’(A10.217)이다.


수행승들이여, 고의적이고 만들어지고 쌓여진 업들이 현세나 다음 생이나 다른 생에 경험되지 않고 종식된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뿐만 아니라 고의적이고 만들어지고 쌓여진 업들이 현세나 다음 생이나 다른 생에 경험되지 않고 그것들과 관련된 괴로움의 종식이 이루어진다고도 나는 말하지 않는다.”(A10.217)


두 가지 업에 대한 관점이 있다. 하나는 숙명론적이고, 또 하나는 숙명론을 극복하는 것이다. 전자는 자이나교와 관련 있고, 후자는 부처님 가르침과 관련 있다.

업보는 받지 않을 수 있다

업에 관한 가르침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업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면 숙명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는 업보에 대한 것이다. 업을 지으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을 말한다.

업을 지으면 업보를 받는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다. 그렇다고 즉각적으로 받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익을 때 받는다. 현세에 받을 수도 있고, 다음 생에서 받을 수도 있고, 다음 생 이후에 받을 수도 있다. 윤회하는 중생으로 사는 한 언젠가는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과거에 업을 지었어도 현세에서 받지 않을 수도 있고 내세에서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떻게 가능한가? 성자의 흐름에 들면 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하면, 노력이 효과가 있고 정진이 효과가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괴로움에 압도되지 않고 스스로를 괴로움으로 압도시키지 않고 가르침과 일치하는 괴로움을 버리지도 않고 그 즐거움에 몰입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와 같이 ‘내가 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노력을 기울일 때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나에게 그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 그리고 내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평정하게 관찰할 때에 평정의 계발을 통해, 내게서 그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라고 안다. 그래서 그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노력을 기울일 때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그에게서 바로 그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 그래서 그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평정하게 관찰할 때에 평정의 계발을 통해, 그에게서 바로 그 괴로움의 원인이 사라진다. 이와 같이 괴로움이 소멸된다.”(M101)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을 설했다. 이는 정진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자이나교에서처럼 고행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진을 해서 열반을 체험하고 성자의 흐름에 들면 일곱 생 이내에 윤회가 끝날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도 종식되는 것이다.

고행의 불로 신체를 태웠을 때

자이나교는 어떻게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고행이라고 했다. 자이나교는 신체적 업을 강조하는데 철저한 고행주의를 통해서 업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신체적으로 저지른 업보에 대해서 지금 여기에서 고행을 통해서 소멸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자이나교의 고행에 대해서 길게 설명했다. 책이나 경전에서도 볼 수 있지만 직접 설명을 들의으 귀에 잘 들어 오는 것 같다. 그래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었다.

자이나교는 완전한 무소유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완전한 고행주의로 가능하다고 했다. 어느 정도일까? 자기정화를 위해서는 굶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고행을 통해서 갚는다’고 말한다. 이는 부처님이 ‘의도가 업이다’라고 말한 것과 대조적이다.

부처님은 정신적인 업을 강조했다. 반면 자이나교는 신체적인 업을 강조한다. 정신적으로 지은 업은 정신적인 행위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고행을 통해서 벗어난다는 자이나교와 대조적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신체적으로 지은 업은 신체적인 고행을 통해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자이나교에서는 현세에 태어난 것에 대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태어난 것으로 본다. 번뇌가 있는 것은 과거 신체적으로 저지른 죄악으로 본다. 그래서 번뇌를 없애기 위해 고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영혼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고행의 불로 태운다’라고 말했다.

자이나교를 한단어로 말하면 고행이다. 짧은 문장으로 말하면 ‘고행의 불로 태운다’가 될 것이다. 고행의 불과 관련하여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을 열어 보았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 된 것이다. 이런 내용을 보았다.


과거의 업을 태워버리고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음으로써 미래로 흘러 들어감이 없다. 미래로 흘러 들어감이 없으므로 업의 소멸이 온다.”(초기불교의 연기사상, 58쪽)


자이나교의 업사상을 잘 나타낸 구절이다. 이 말은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다. 맛지마니까야 데바다하의 경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는 이와 같은 교리와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무릇 어떤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경험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은 전생의 업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생의 업을 고행으로 없애 버리고 새로운 업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고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음으로 업을 파괴하고, 업을 파괴함으로써 괴로움을 부수고 괴로움을 부숨으로써 감수를 부수고 감수를 부숨으로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수행승들이여, 니간타들이 이와 같이 말한다.”(M101)


바로 이것이 자이나교 사상을 잘 요약한 문장이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모두 전생에 기인하기 때문에 고행의 불로 태워 버리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더 이상 업은 남아 있지 않아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뿐만 아니라 청정한 영혼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느낌은 과거의 업과 무관한 것

자이나교는 불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모순이 많다. 그럼에도 추종자가 있었던 것은 자이나교 교리에서 위안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행의 불로 태워 업을 소멸하겠다는 것은 괴로움의 소멸도 되지 않을뿐더러 괴로움 그 자체만 야기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즐겁거나 괴로운 것은 느낌이다. 느낌은 과거 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자이나교도들은 고행의 불로 과거의 업을 소멸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느낌의 존재는 과거의 행위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행위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KPTS본 맛지마니까야, 1898번 각주)라고 했다.

느낌은 과거의 업과 무관한 것이다. 느낌은 접촉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몰리야 씨바까의 경’에 따르면,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M36.21)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이는 숙명론적 관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러므로 그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M36.21)라고 했다. 이는 자이나교도들을 겨냥해서 말한 것이다.

부처님은 자이나교의 고행을 비판했다. 고행의 불로 자신을 태웠을 때 업과 괴로움이 소멸되기는커녕 고행의 괴로움으로 인하여 더 괴로움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몰리야 씨바까의 경에 따르면, 괴로움은 접촉에 의해서 발생되는데 모두 여덟 가지를 들었다. 담즙, 점액, 바람, 체질, 계절의 변화, 불운한 사건, 우연한 피습, 업보의 성숙을 말한다.

괴로움이란은 것이 반드시 업보의 성숙 때문만은 아니다. 우연한 사건이나 불운한 사건에서도 발생될 수 있다. 이 모두가 접촉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접촉이 없이는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자이나교에서는 고행의 불로 태운다고 했다. 그래서 “괴로움을 부수고 괴로움을 부숨으로써 감수를 부수고 감수를 부숨으로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M101)라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지독한 고행은 고통스러운 느낌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고행의 불로 태우는 고행은 타당하지 않은 것이 된다.

해탈의 경지 들면

업을 지으면 과보를 받는다. 그렇다고 반드시 기계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만일 원인과 결과가 즉각적으로 작용된다면 숙명론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지은 업으로 인하여 미래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업은 즉각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시차를 두고 익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지은 업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큰 선업공덕을 지으면 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십선업을 말했다.

십선업은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천수경에도 십악참회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니까야가 천수경과 다른 것은 사견에 대한 것이다. 천수경에서는 ‘치암중죄금일참회’라고 하여 ‘어리석음’이라고 했으나 니까야에서는 구체적으로 ‘사견’이라고 했다.

누구든지 부처님의 열 가지 선업을 실천하면 비록 과거에 악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미래에 과보를 받지 않을 수 있다. 이는 해탈의 경지 들면 가능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여자이건 남자이건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여자나 남자나 죽을 때 이 몸을 가지고 갈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죽어야 하는 자는 마음을 사이존재로 가지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어떠한 것이든 예전의 행위에서 생겨난 몸인 내가 악한 업을 지었다면, 그 모든 것을 나는 여기서 받으리라. 나중에는 따라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안다.”(A10.219)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았을 때 과거 지은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자이나교에서 불로 태우는 신체적 고행과는 대조적이다.

마음을 해탈로 이끌었을 때 과보를 받지 않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자애를 통해서 다음 생에 받아야 하는 것들이 끊어지면, 그것에 따라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흐름에 든 님(예류자)과 한번 돌아오는 님(일래자)의 성찰이다.”라고 했다.

자심해탈을 이룬 자는 미래에 과보를 받지 않는고 했다. 인은 마지막 죽음의 의식에서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때 선업공덕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악처의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해탈의 경지에 들면 다음 생에 받아야 할 상태를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예류자나 일래자의 성찰이 있다. 이는 다름아닌 반조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때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얼마나 되는지는 반조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했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남아 있는 번뇌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미래 악처로 이끌만한 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선업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남아 있는 있는 번뇌가 거의 없다면 과고 악업은 미래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것이든 예전의 행위에서 생겨난 몸인 내가 악한 업을 지었다면, 그 모든 것을 나는 여기서 받으리라. 나중에는 따라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A10.219)라고 말하는 것이다.

큰 공덕이 되는 내면적 제사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외면적 제사가 있고 내면적 제사가 있다고 했다. 외면적 제사는 바라문교에서 행했던 대규모 동물희생제 같은 것이다. 자이나교의 고행도 외면적 제사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내면적 제사를 강조했다. 내면적 무소유를 말한다. 번뇌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을 성취하면 내면적 제사는 끝나는 것이라고 했다. 내면적 제사와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바라문이여, 청정한 마음으로 학습계율 곧,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삼가고, 거짓말 하는 것을 삼가고,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세 가지 확립과 열여섯 가지 요건을 갖춘 제사의 성취보다 덜 번거롭고 덜 성가실 뿐만 아니라 더욱 더 큰 과보와 더욱 더 큰 공덕을 낳는 또 다른 제사입니다.”(D5)


부처님은 내면적 제사에 대하여 오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오계를 확장하면 십선행이 된다. 오계와 십선행을 지키는 것이 내면적 제사임을 말한다.

부처님은 대규모 동물희생제에 의한 외면적 제사는 공덕이 없지만 내면적 제사를 지내면 공덕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고통의 불로 자신의 몸을 태우는 고행도 외면적 제사에 속할 것이다. 불로 태우는 고행을 하면 고통 그 자체가 되기 때문에 공덕이 있을 수 없다. 계행을 지키고 선정과 지혜를 닦아서 성자의 흐름에 들었을 때 윤회와 괴로움의 소멸의 길이 열리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내면의 제사가 될 것이다.


2022-11-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