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무소유의 의미는 계율을 지키는 것
니까야 공부모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두 번만 하면 끝난다. 2017년 2월부터 2022년 10월 현재까지 5년 8개월 되었다. 마침내 11월 11일 회향일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주소록에 등재된 것을 보니 지난 5년동안 한번이라도 와서 들은 사람은 90명에 달한다. 줌으로 한 것까지 합하면 더 많다. 대부분 한두번으로 그쳤다. 처음부터 완주하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모두 다 소중한 인연이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 못 오는 사람들이 많다. 모임이 금요일 평일 저녁에 있다 보니 직장인들은 시간 내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오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영업 하는 사람들도 오기 힘든 것 같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한다. 일요일 하루 정도 쉰다고 한다. 멀리 있어서 못 오는 사람들도 있다. 먼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오고 싶어도 못 오는 것이다. 그러나 원주에서 차를 몰고 오는 사람도 보았다. 대전에서 KTX타고 참석하는 사람도 보았고 심지어 부산에서 KTX타고 온 사람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임을 알렸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모임이 재미 없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오로지 경을 합송하고, 가르침에 대해서 듣고, 담마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 그 이상은 없다. 저녁 아홉 시에 끝나면 집에 가기 바쁘다. 뒷풀이 모임은 없다. 어쩌면 지극히 무미건조한 모임일지 모른다.
지난 5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기록을 남겼다. 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이 말한 것을 빠짐 없이 노트했기 때문에 후기를 쓰면 복습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다 쓴 것은 아니다. 말한 것 중에서 일부를 썼을 뿐이다.
2022년 10월 14일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인상에 남은 말이 있다. 그것은 무소유에 대한 것이다. 무소유라고 하면 흔히 물질적 무소유를 말하는데 전재성 선생은 정신적 무소유가 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전재성 선생은 “진정한 무소유의 의미는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무소유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무소유는 물질을 적게 소유하는 것이라거나 무소유는 번뇌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 와 닿는다. 대체 무소유와 계율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합송한 경에서 ‘쌓아 모으는 것과 버리고 없에는 것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제목의 경이 있다. 매우 짤막한 경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쌓아 모으는 것의 경’(A10.186)을 말한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쌓아 모으는 것과 버리고 없애는 삶에 대해서 법문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대조적이다. 버리고 없애는 삶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버리고 없애는 것이란 무엇인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고, 거짓말을하는 것을 삼가고, 이간질하는 것을 삼가고, 욕지거리하는 것을 삼가고, 꾸며대는 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탐착을 여의고, 악의 마음을 여의고, 올바른 견해를 갖추는 것이다. 이것을 버리고 없애는 것이라고 한다.”(A10.186)
십선행에 대한 것이다. 천수경 십악참회에서도 볼 수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열 번째 항에서 사견에 대한 것이다. 천수경에서는 “치암중죄금일참회”라고 하여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니까야에서는 사견을 갖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시견은 정견과 반대되는 말이다. 경에서는 이를 잘못된 견해라고 번역했다. 이는 빠알리어 밋차딧티(micchādiṭṭhi) 말한다. 화살이 과녁을 빗나가듯이 빗나간 견해라고도 말한다.
정견과 사견은 서로 다른 길이다. 두 갈래 갈림길이 있다면 정견은 바른길이고, 사견은 왼길에 해당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왼길을 버리고 오른 길로 가라고 했다. 이는 오늘날 우파와 좌파 개념이 아니다. 고대 인도에서 통용 되었던 개념이다.
바른 길로 가면 팔정도의 길이 되고 왼길로 가면 팔사도의 길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자에게 있어서 정견은 수행의 결과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오무간업에 사견 하나를 더 추가하여 육무간업이라고 했다.
무소유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다. 어느 작가는 진정한 무소유는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관에 의해서 말한 것이다. 법정스님도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소유라 하여 반드시 물질적 무소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무소유가 더 큰 것이라고 했다. 번뇌를 소유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무소유임을 말한다.
무소유 개념이 번뇌없음이라고 말한 것은 획기적이다. 누구나 동의하고 누구나 긍정하는 말이다. 재산이나 재물이 없는 수행승이 감각적 욕망 등으로 인하여 번뇌가 많다면 그는 크게 소유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사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면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계율을 뜻하는 빠띠목카(paṭimokkha)라는 말과도 관계가 있다. 빠띠목카는 한역으로 음사하여 바라제목차라고 하는데 또 다른 의역으로 별해탈(別解脫)이라고 한다. 또는 계본이라고 한다.
빠띠목카는 비구계본을 뜻한다. 매달 보름날이나 신월 때가 되면 수행승들이 모여서 계본을 합송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빠띠목카가 왜 별해탈인가? 이는 빠띠목카라는 빠알리어에서 알 수 있다.
빠알리어 빠띠(paṭi)는 ‘against; opposite’의 뜻이다. 목카(mokkha)는 ‘release; freedom’을 뜻한다. 그래서 빠띠목카는 ‘해탈에 대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한역에서는 별해탈이라고 했다.
포살의 날에 빠띠목카를 합송하는 것은 계율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해탈의 길로 가는 것이 된다. 이렇게 계율을 지키게 되었을 때 번뇌가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율장 대품에서는 “빠띠목카라는 것, 그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의 시초이자, 얼굴이자, 선두이다. 그래서 빠띠목카라고 한다.”(Vin.I.103)라고 했다.
빠띠목카에 대하여 착하고 건전한 것들의 시초라고 했다. 이는 십선행을 말한다. 또 다른 말로 버리고 없애는 삶이다. 고통을 초래하는 것들을 버리고 없애는 삶을 말한다. 십선행을 실천하고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살면 안락이 올 것이다. 번뇌가 없는 삶이다.
물질적으로 적게 소유하는 것도 무소유에 해당된다. 그러나 물질을 소유하긴 하되 나누며 산다면 무소유적 삶이 된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살지만 나누고 보시고 베풀며 산다면 그는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정신적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진정한 무소유의 의미는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2022-10-2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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