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 심오해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19. 12:49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 심오해서


앙굿따라니까야 엔솔로지 ‘생활속의 명상수행’을 회향했다. 2022년 11월 11일 회향 기념식을 가졌다. 다과회를 갖고 평소대로 합송을 하고 설명을 듣고 토론시간을 가졌다. 마지막 경을 마쳤을 때 마침내 다 끝났다.

모두 다 끝났을 때 기념 촬영을 했다. 6년 활동을을 마무리 한 것이다. 이를 감히 ‘6년결사’라고 말하고 싶다. 왜 6년결사인가? 도현스님은 앞으로도 모임이 유지 되어서 십년결사가 되자고 말했는데, 도현스님이 말한 것에서 근거한다.


단체사진을 유리액자로 만들어

단체로 기념촬영했다. 모두 17명 참석했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16명이 찍혔다. 이 사진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단체카톡방에 올려 놓았다. 누구든지 다운 받아 가라는 의미이다.

요즘 디지털 시대이다. 어떤 자료이든지 컴퓨터나 온라인에 보관할 수 있다. 단체사진도 어딘가에 보관할 것이다. 그러나 오프라인에 대한 추억도 있다. 사진을 인화해서 보고자 하는 것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단체사진을 인화에서 사진상자에 보관하면 어떨까?”라고.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바빠졌다.

지역 사진관을 찾았다. 단체 사진 중에서 가장 잘 나온 것을 선정했다. 손가락 튕기는 장면이 가장 좋았다. 모두 환하게 웃는 모습이다.

이 세상에 웃는 모습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미인이 따로 없다. 웃음 띤 얼굴 자체가 미인이다. 손가락을 튕기며 웃는 모습의 단체 사진을 인화했다. 큰 사이즈(8X10)와 작은 사이즈(5X7) 사이즈 두 종류로 했다.


사진에 문구도 집어 넣었다. 문구를 “금요니까야모임 회향  생활속의 명상수행 6년 결사  2011.11.11 한국빠알리성전협회”라고 했다. 사진관 주인이 컴퓨터 작업한 것이다.

큰 사진을 유리로 된 액자에 넣었다. 유리로 되어 있어서 품격 있고 럭셔리하게 보인다. 한국빠알리성협회(KPTS)에 기증하고자 한다. 나머지 사진은 액자를 구입해서 참석자 모두에게 선물로 주고자 한다.

흔히 말하기를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고 한다. 인화에서 액자에 넣어 진열해놓는다면 근사할 것 같다. 먼 훗날 이런 모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체험해 보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합송한 경의 제목은 ‘길들여진 준마처럼 사유하라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라고 되어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쌋다의 경’(A11.9)을 말한다.

경의 내용은 매우 심오하다. 왜 심오할까? 그것은 체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정이나 열반 같은 것이다. 체험해 보지 않은 자가 이야기한다면 자신의 견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경에서는 전달하고자 하는 것 같다.

선정을 체험해 본 자는 경을 이해할 것이다. 마치 깨달은 자가 경전을 보면 모두 한눈에 들어 오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선정 경험이 없는 사람은 경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경에서는 “잘 길들여진 준마처럼 사유하라.”(A11.9)라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경의 소제목과도 같은 말이다. 이럴 때는 각주를 봐야 한다.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여기서 사유란 바로 추론적인 사유나 생각이란 의미와 선정과 관계된 사유수(思惟修)란 의미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중에 사유가 바로 지각현상과 연결된다.”(KPTS 통합본, 4348번 각주)


각주는 전통적인 주석을 근거로 한 것은 아니다. 아마도 전재성 선생이 여러 판본을 보고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초기불전연원 번역에서는 위 문장과 관련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과 길들여진 사람

각주나 주석을 읽어 보면 경의 전반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각주에서 사유에 대하여 추론적 사유와 수행적 사유 두 가지가 복합되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본문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땅에 의지하여 사유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추론적인 사유에 해당된다. 체험해 보지 않은 사유를 말한다. 머리 속에만 있는 사유이다. 이런 사유에 대하여 부처님은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은 길들여지지 않은 말과 같다. 길들여지지 않은 말에 대하여 경에서는 “먹이, 먹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먹는 것만 찾는 말을 말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은 감각적 욕망으로 사는 사람과도 같다. 그래서 “그는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안으로 숨기고 사유하고 숙고하고 심사하고 심려한다.”(A11.9)라고 했다. 이는 깊게 사유하지 않음을 말한다. 체험이 없기 때문에 추론적 사유가 될 수밖에 없다. 번뇌와 망상이 되기 쉬움을 말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길들여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길들여진 말과 같다. 길들여진 말은 “먹이, 먹이”하며 사유하지 않는다고 했다. 길들여진 말은 “오늘 조련사가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킬 것인가? 나는 거기에 잘 대처할 수 있을까?”(A11.9)라며 사유한다고 했다.

부처님을 ‘사람을 잘 길들이는 님’이라고 하는데

흔히 부처님을 ‘사람을 잘 길들이는 님’이라고 한다. 이는 여래십호에서 ‘뿌리사담마사리티(purisādhamasārathi)’를 번역한 말이다. 한역으로는 조어장부(調御丈夫)를 말한다.

부처님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사람이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인간만 길들이는 것은 아니다. 축생과 같은 사람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람, 비인의 사람까지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을 길들인다.

부처님은 이미 길들여진 사람도 길들인다.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흐름에 든 님 등에는 보다 높은 길에 대한 행도를 설하면서 이미 길들여진 자도 길들인다.”(Vism.7.48)라고 했다.

부처님은 성자의 흐름에 든 자도 길들였다. 보다 높은 행도에 대한 것이다. 예류자는 일래자가 되도록 길들이고, 일래자는 불환자로, 불환자는 아라한이 되도록 길들이는 것이다.

여덟 가지 방향에 대하여

부처님은 선정에 대해서도 길들였다. 이는 “길들여야할 사람을 한 가부좌를 통해서 여덟 방향으로 집착 없이 달릴 수 있도록, 길들이기 때문이다.”(Vism.7.48)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선정에서 여덟 방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각주에서는 맛지마니까야 ‘여섯 감역에 대한 분석의 경’(M137)을 인용하여 설명되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형상을 지닌 자로서 형상을 본다. 이것이 첫 번째 방향이다.

2) 안으로 형상을 지각하지 않고 밖으로 형상을 본다. 이것이 두 번째 방향이다.

3) 오로지 아름다운 것에만 전념한다. 이것이 세 번째 방향이다.

4) 형상에 대한 지각을 완전히 뛰어넘어 장애의 지각이 사라진 뒤에 다양한 상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공간은 무한하다고 하는 무한한 공간의 세계를 성취한다. 이것이 네 번째 방향이다.

5) 무한한 공간의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의식이 무한하다는 무한한 의식의 세계를 성취한다. 이것이 다섯 번째 방향이다.

6) 무한한 의식의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아무것도 없다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를 성취한다. 이것이 여섯 번째 방향이다.

7) 아무것도 없는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성취한다. 이것이 일곱 번째 방향이다.

8)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다. 이것이 여덟 번째 방향이다.”(M137)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방향은 쌋다의 경에 언급된 것과 일치한다. 쌋다의 경에서는 땅, 물, 불, 바람, 무한 허공의 세계(공무변처), 무한 의식의 세계(식무변처), 아무 것도 없는 세계(공무변처),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비상비비상처)라고 표현되어 있다. 특히 공무변처부터 일치한다.

쌋다의 경에 따르면, “잘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땅에 대한 땅의 지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A11.9)라고 했다. 이 말은 어떤 뜻일까? 주석에서는 “땅의 대상에서 생겨난 네 번째, 다섯 번째 선정의 지각이 분명해진다.”(KPTS, 4352번 각주)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4종선과 5종선으로 설명했다.

무색계 선정은 네 번째 색계 선정을 기반으로 한다. 부처님이 무색계 선정 네 가지를 언급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주석에 따르면 이를 지각의 초월성이라고 했다. 이는 분명하게 지각함을 말한다. 예를 들어 땅을 대상으로 한 색계 선정에서는 형상은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뼈에 대한 지각은 불분명하다는 주석의 말로 알 수 있다.

니까야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니까야에서는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저 니까야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여덟 가지 방향과 관련해서도 앙굿따라니까야 ‘쌋다의 경’(A11.9)과 맛지마니까야 ‘여섯 감역에 대한 분석의 경’(M137)은 서로 보완적이다.

지각의 정점(saññāgga)이 있는데

디가니까야 ‘뽓따빠다의 경’(D9)에 ‘지각의 정점(saññāgga)’이라는 말이 있다. 주석에 따르면, 지각의 정점은 무소유처를 말하는데 세간의 작용을 성취하는데 최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비상비비상처뿐만 아니라 소멸에도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각의 정점에 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쌋다의 경’ 주석에 따르면 이를 ‘지각의 초월성’이라고 했다. 이는 분명하게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분명하게 지각하는가? 이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KPTS, 4352번 각주)이라고 했다.

어떻게 사유하느냐에 따라 범부와 성자로 나뉜다. 범부는 길들여지지 않는 말과 같다. 말이 “먹이, 먹이”하며 먹을 것만 찾듯이, 범부는 오욕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하루 종일 오욕락만 생각하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갈망이 있는 사유에 해당된다.

길들여진 사람은 길들여진 말과 같다. 길들여진 말은 더 많이 사유한다. 먹이만 찾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길들여진 사람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파악하여 열반의 길로 향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땅, 불, 물 , 바람, 공무변처 등에 대하여 “사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유한다.”(A11.9)라고 했다.

사유하지만 사유하지 않는다고 했다. 참으로 난해한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초기불전연구원 각주에 따르면 “[사마타 수행을 통한] 증득의 행복에 대한 갈망이 없기 때문에 땅을 대상으로 4종선과 5종선의 인식을 갖고서 생각하지 않는다.”(초불연 6권, 300번 각주)라고 설명했다.

흔히 위빠사나 수행자들에게 선정에 머물지 말라고 한다. 선정의 경지를 증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말한다. 최종적으로는 열반을 지향해야 한다. 그래서 “골똘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골똘히 생각한다.”(A11.10)초불연 번역)라는 역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유하지만 사유하지 않는다. 골똘히 생각하지만 골똘히 생각하지 않는다. 골똘히 생각하면 범부의 선정이 되고 골똘히 생각하지 않으면 잘 길여진 자의 선정이 된다. 선정에 대한 갈망이 있으면 골똘히 사유하는 것이 되고, 선정에 대한 갈망없이 골똘히 사유하면 마음은 열반으로 향한다고 했다.

수행담을 읽어 보면 지혜가 이끈다는 말을 한다. 가만 있어도 지혜가 알아서 처리함을 말한다. 그럼에도 생각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갈망이 없는 사유에 따른 지각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 ‘그러나 그는 골똘히 생각한다.(jhāyati)’는 것은 열반을 대상으로 과의 증득을 골똘히 생각한다는 말이다.(Ibid)”(초불연 6권, 301번 각주)라고 했다.

사유하지만 사유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부처님은 잘 길들여진 준마처럼 사유하라고 했다. 여기서 사유를 뜻하는 자야띠는 ‘meditates or contemplates’의 뜻이다. 이는 ‘명상하다’는 뜻도 있지만 ‘집중하다’는 뜻도 있음을 말한다. 집중이 되면 타버릴 것이다. 그래서 자야띠는 ‘burns; to be on fire’의 뜻도 있다.

부처님은 잘 길들여진 준마처럼 사유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말처럼 사유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쌋다여, 이와 같이 사유하는 자로서 잘 길들여진 현명한 사람이 사유하면, 땅에 의지하여 사유하지 않고, 물에 의지하여 사유하지 않고, 불에 의지하여 사유하지 않고, 바람에 의지하여 사유하지 않고, 무한허공의 세계에 의지하여 사유하지 않고, 무한의식의 세계에 의지하여 사유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의지하여 사유하지 않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에 의지하여 사유하지 않고, 이 세상에 의지하여 사유하지 않고, 저 세상에 의지하여 사유하지 않고, 보고-듣고-인지하고-인식하고-파악하고-탐구하고-정신적으로 숙고한 것에 의지하여 사유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유한다.”(A11.9)


부처님은 사유하지만 사유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유를 통해서 선정에 들었지만 선정에 들었을 때는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각주에서 “그래서 나중에 사유가 바로 지각현상과 연결된다.”(통합본, 4348번 각주)라고 했다.

사유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범부의 사유가 되기 쉽다. 길들여진 자의 사유가 되려면 사유수(思惟修)가 되어야 한다. 수행을 겸비한 사유를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사유하지 않지만 지각은 있음을 말한다. 이는 분명하게 지각되는 것을 말한다. 땅 등 사대뿐만 아니라 네 가지 무색계 선정도 사유를 통해서 지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유가 지각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사유수가 지각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사유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사유한다고 했다. 이는 갈망이 없는 사유이다.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사유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 세계의 지각이 분명히 드러나고, 저 세계의 지각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보고-듣고-인지하고-인식하고-파악하고-탐구하고-정신적으로 숙고한 것의 지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A11.9)라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 심오해서

선정의 세계를 체험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열반의 세계에 대해서도 체험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경전에 있는 가르침을 통하여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사유를 닦아서 지각하게 되는데 이는 ‘지혜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는 말과 같은 것으로 본다. 이는 경에서 “사유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유한다.”라는 표현이 잘 말해 주는 것 같다.


금요니까야모임이 끝났다. 5년 10개월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다. 마지막 경을 합송하고 설명을 듣고 토론했는데 너무 심오해서일까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체험한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 심오해서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인간 가운데 준마시여,
인간의 최승자시여, 님께 귀의하오니
님께서 사유하신 것에 관해
저희가 곧바로 알기 심히 어렵습니다.”(A11.9)라고.


2022-11-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