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견(增上見)과 증상만(增上慢)에 대하여
이미우이 음악이 흐르는 일요일 아침이다. 지금 시각은 오전 6시, 일요일임에도 아침 일찍 일터로 나왔다. 일인사업자에게는 밤낮이 없고 주말도 없다. 주오일제 개념도 없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일감이 있어서 일을 해야 하지만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들도 있다. 아침 일찍 나온 것은 아침 시간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글을 쓰는 것이다. 금요니까야 모임에서 듣고 토론한 것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모임은 편한 시간에
9월 두 번째 니까야모임이 9월 30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서고에서 열렸다. 평소보다 사람이 많지 않다. 열명 안팍에서 반으로 줄었다. 아마도 개천절이 낀 연휴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모임에는 참석자가 어느 정도 되어야 한다. 한두명이 앉아 있다면 모임이 성립되기 어렵다. 그런데 한두명 앉아 있어도 모임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직장이 있는 사람들은 직장에 가기 바쁘다. 직장을 빠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월급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임에서는 빠져도 된다. 편한 시간에 나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봉사모임의 경우 모임이 있을 때마다 봉사자의 얼굴은 매번 바뀐다.
모임이 의무가 되었을 때 경직된다. 모임은 직장과 달리 시간이 되었을 때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모임에 나갈 때마다 얼굴이 바뀌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이 있다. 이름은 들어 보았지만 한번도 본적이 없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칠십년대에 함석헌 선생의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전재성 선생도 그 모임에 일년 참석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유명한 함석헌 선생의 모임에도 참석자는 고작 열명 안팍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두세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모임의 숫자에 연연해서는 안된다. 시간이 되면 참여할 수 있는 것이고 사정이 있으면 불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연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어느 모임이든지 시간이 되면 참석하는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이다.
종종 모임과 관련된 문의를 받는다. 블로그 댓글이나 메일에 글을 남기는 것이다. 이에 정보를 알려 준다. 그러나 그때 뿐이다.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무엇이든지 시기가 있다.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금요니까야모임도 그렇다. 시간은 내기 마련이다. 일단 와서 앉아 있으면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간다. 왜 그럴까? 배움이 있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토론이 있다. 담마에 대하여 배우고 토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일 아닐까?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법수가 열이 되다 보니 경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법수가 하나나 둘일 때는 경의 길이가 짧지만 법수가 늘어날수록 경의 길이도 길어진다. 이번에 합송한 경도 그렇다. 형이상학적 견해와 관련된 ‘꼬까나다의 경’(A10.96)은 무려 여덟 페이지나 된다.
형이상학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철학을 의미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세상의 궁극적인 본질을 묻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세속철학이라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왜 이렇게 존재하는가? 누구든지 이런 물음을 할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물음이 있었다. 이에 수많은 스승들이 나타났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외도의 스승들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는 말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 망상이 된다. 속된 말로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세상은 유한한가?’등의 의문을 가지고 사유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대한 사변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에 사유한다면 미쳐버릴 수 있다고 했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세상에 대한 사변은 ‘누가 달과 해를 만들었는가? 누가 대지를 만들었고, 누가 대양을 만들었는가? 누가 중생을 창조하고 누가 대지를 만들었는가? 누가 망고나 참깨나 야자를 만들었는가?’라는 사유를 말한다.”(Mrp.III.109)라고 했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했을 때
부처님의 제자라면 ‘누가’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불교인이라면 ‘어떻게’라는 말을 해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법적 사유를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법적 사유를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의 제자 팍구나가“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S12.12)라고 물어 보았다.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라면 연기법적인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존이시여, 무엇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S12.12)라고 물어 보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했다.
연기법을 떠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성립될 수 없다. 누군가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가?’라든가, ‘우주는 유한한가?’라는 등의 질문을 했을 때 답을 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답이 없기 때문이다.
답이 없다면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세상은 유한한가?’등의 형이상학적 질문을 한다면 이는 질문 같지 않는 질문이 된다. 답이 없는 질문, 질문 같지 않은 질문,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 된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아야 한다. 답이 없는데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까?
유행자 꼬까나다는 아난다에게 질문했다. 유행자는 “벗이여, 존자는 참으로 ‘세상은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A10.96)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아난다는 그런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유행자가 물어 본 것은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사변적 질문에 해당된다. 이런 질문에 아난다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견해라고 했다.
증상견(增上見)과 증상만(增上慢)
불교에서 말하는 견해는 일반적으로 사견에 해당된다. 사견이 있다면 정견이 있다. 부처님의 견해는 정견이고 부처님의 견해가 아닌 것은 사견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육사외도의 견해는 삿된 견해가 된다.
세상의 영원성 등을 묻는 열 가지 견해는 사견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독단적 도그마라는 것이다. 외도 스승들은 한결같이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 영원론자가 있다. 영원론자는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을 특징으로 하는 유일신교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세상은 영원할까? 나의 머리로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영원론자를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과연 그런 자아와 그런 세상을 경험했다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에 따르면 영원한 자아나 영원한 세상은 있을 수 없다.
영원주의자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아며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런 견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증상견 (增上見)’이라고 했다.
전재성 선생은 증상견에 대하여 견해 위에 견해를 쌓는 것이라고 했다. 견해가 층층이 쌓아져 있을 때 이는 망상이 된다. 그런데 망상은 자아에 기반한 자만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만에 토대를 둔 증상견에 대하여 ‘증상만(增上慢)’이라고 했다.
영원주의를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증상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증상만은 영원주의 뿐만 아니라 허무주의 등 육사외도의 모든 견해가 이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경에서 언급된 세상의 영원성 등 열 가지 형이상학적 견해도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증상만이 될 것이다.
하나의 견해에 불과한 영원주의
유행자 꼬까나다는 아난다에게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을 했다. 유행자는 부처님의 교단에서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물어 본 것이다. 이에 아난다는 “벗이여, ‘세상은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것은 하나의 견해에 불과합니다.”(A10.96)라고 말해 주었다.
영원주의는 하나의 견해이다. 이는 영원주의가 진리가 아님을 말한다. 그럼에도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독선이다. 이와 같은 독선에 대하여 아난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벗이여, 견해가 이루어지고 견해에 고착되고 견해에 사로잡히고 견해에서 생겨나고 견해가 끊어지는 것과 관해서 나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봅니다. 나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보지 못한다.’라고 말하겠습니까? 벗이여 나는 알고 또한 봅니다.”(A10.96)
아난다는 알고 본다고 했다. 알고 보기 때문에 열 가지 형이상학적 주장이 견해에 지나지 않다고 했다. 여기서 ‘알고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니까야를 보면 도처에 ‘알고 본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냐나와 닷사나를 말한다. 지혜로 알고 체험으로 본다는 뜻이 된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경험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 보았을 때 열 가지 형이상학적 주제는 견해 위에 견해를 쌓아 놓은 증상견과 같은 것이 된다.
증상견은 망상과도 같은 것이다. 오로지 생각속에서만 있는 것이다. 자아와 세상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영원론자의 견해도 망상이다. 또한 영원론은 극단이다. 허무주의 또한 극단이다.
중도는 연기법이다
이 세상에 절대라는 말은 없다. 누군가 절대를 이야기하면 망상이기 쉽다. 누군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하여 절대로 있다고 주장한다면 극단이다. 이는 거짓이기 쉽다.
영원주의가 왜 거짓인가?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에 따르면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는 사라진다.”(S12.15)라고 했다. 이 짤막한 문구 하나로 영원주의가 논파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양극단이다. 그런데 양극단은 연기법에 따르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현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영원주의는 무너지고, 현상의 생성을 관찰하면 허무주의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S12.15)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중도로 요약된다. 중도는 양극단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간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양극단을 초월하는 길이다.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중도는 연기법입니다.”라고 말했다.
연기법은 조건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조건발생하기 때문에 ‘죽으면 끝이다’라는 허무주의가 논파되고, 조건소멸하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영원주의가 논파된다. 연기법에 따르면 육사외도 스승들의 견해는 모두 논파된다.
도덕적 위기를 부르는 양극단
이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도 있지만 몰라도 되는 것도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알아야 될 것이다. 그러나 열 가지 형이상학적 주제와 같은 견해는 몰라도 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몰라도 되는 것들에 열중하는 것 같다.
몰라도 되는 것 중에 영원주의가 있다.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견해를 말한다. 이와 같은 영원론에 대하여 ‘이것만이 진리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 되어 버린다. 이는 독선이고 극단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영원주의적 견해를 취했을 때 도덕적 위기가 올 수 있다고 했다. 영원히 사는 자아가 있다면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꿈의 비유로도 설명될 수 있다.
종종 법문을 듣다 보면 꿈의 비유를 하는 경우가 있다. 꿈을 깨는 것에 대하여 깨달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살인을 하는 등 오계를 어기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꿈을 깨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꿈속에서 나와 꿈꾸는 나와 다르지 않다고 했을 때 꿈속에서 오계를 어긴 것은 용서가 될 수 있을까?
영원주의적 삶을 살면 도덕적 위기가 닥친다고 했다. 이는 허무주의도 마찬가지이다.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졌을 때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도 서슴없이 자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양극단은 서로 통한다. 도덕적 타락을 불러 오는 것에 있어서 서로 통하는 것이다.
양극단은 도덕적 위기를 불러 올 수 있다. 양극단의 영원주의나 허무주의는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양극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연기법적 사유이다.
이 세상은 접촉에 의해서
부처님은 연기법적 사유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누가’라고 말하지 말고 그 대신 ‘어떻게’라고 사유하라고 했다.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이는 부처님이 “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접촉없이 그것을 인식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D1.127)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주는 유한할까? 무한할까?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답은 없다. 질문같지 않은 질문이고 질문으로서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기 때문에 답이 없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답을 하면 휘말려 드는 것이다.
답이 없는 질문에 답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침묵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가 아니라 ‘어떻게’라고 하여 연기법적으로 묻는다면 얼마든지 답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접촉을 연유로 생겨난다.”(S12.24)라며 연기법적으로 답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접촉에 의해서 생겨난다. 접촉에 의해서 생겨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누군가 세상의 발생에 대하여 묻는다면 “벗이여, 접촉은 여섯 가지 감역을 바탕으로 하고 여섯 가지 감역을 동기로 하며 여섯 가지 감역을 발생으로 하고 여섯 가지 감역을 원인으로 한다.”(S12.24)라고 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과 다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눈이나 귀 등 여섯 가지 감역의 접촉에 따른 육처의 세상이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과의 접촉이 있어서 세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세상은 접촉에 의해서 발생한다. 접촉 없이 세상은 발생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이와 같이 말한다면, 내가 말한 대로 설하는 것이고, 진실이 아닌 것으로 잘못 대변한 것이 아니며, 가르침에 일치하도록 설명하는 것이고, 그대들의 주장의 결론이 비판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S12.24)라고.
2022-10-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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