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부처님의 되치기 한판승 베란자의 경

담마다사 이병욱 2022. 5. 3. 10:32

부처님의 되치기 한판승 베란자의 경

 

 

매일 글을 쓴다. 그것도 장문의 글이다. 누구 보건 말건 누가 인정하건 말건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이런 글쓰기에 강연이나 강의에서 들은 것도 예외가 아니다. 당연히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있었던 것도 대상이 된다.

 

나중에 남는 것은 기록 밖에 없는 것 같다. 이런 기록의 중요성은 신입사원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회사 사업부에 일본인 기술고문이 있었는데 실험데이터를 기준으로 매일매일 기록을 남기는 것을 보았다.

 

업무용 노트에 기록할 만한 것은 모두 다 기록해 놓았다. 회사생활 20년동안 남긴 업무용 노트와 이후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남겨 놓은 업무노트는 백권가량 된다. 이밖에도 모임이나 강연, 강의를 듣고 남긴 메모 노트도 수십권 된다. 이런 습관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듣고 보고 들은 것 중에 인상적인 것이 있다. 이런 것이 글쓰기의 대상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메모를 해야 한다. 그래서 모임이나 강연, 강의가 있을 때 반드시 메모용 노트를 준비한다. 기록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기록한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이 말한 것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록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글로 남겨야 한다. 이 과정에서 복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가 된다. 마치 여행기를 작성하는 것과 같다.

 

여행기를 작성하면 두 번 여행 다녀오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마치 복습하는 것과 같다. 학교 다닐 때 레포트를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메모나 기록을 바탕으로 후기를 바탕으로 글을 남기는 것은 일종의 공부이다. 그러나 한 존재의 역사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시대의 역사가 될 수 있다. 먼 훗날 남는 것은 기록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홍광순 선생이 매번 모임 때마다 음성녹취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4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에서

 

4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은 429일 열렸다. 다섯 번째 금요일에 열린 것이다. 본래 네 번째 금요일에 열려야 하나 그날 행사가 있어서 일주일 연기된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 온 사람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니까야모임과 인연맺도록 노력해 왔다. 혼자 듣는 것이 아까워서 주변 사람들에게 권유한 것이다. 그러나 인연은 오래 가지 않는다. 한두번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실망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한번 맺은 인연으로 언젠가 또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4월 두 번째 모임에서는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모두 긴 길이의 경이다. 이는 법수가 여덟 개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길어지는 것 같다. 여덟 개의 경우의 수를 설명하기 때문에 동시에 설명도 길어진다. 법수가 적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첫번째 경을 합송했다. 교재에서 경의 제목은 부처님께서 혹독한 비난을 받았는데, 어떠한 혹독한 비난을 받았는가?’라고 되어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베란자의 경(Verañjasutta)’(A8.11)이다전재성 선생은 이 경에 대하여 부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는 바라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고 했다. 그때 당시 주류라고 볼 수 있는 바라문들이 부처님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여덟 가지로 공격했다.

 

비라문들은 부처님에게 멋도 없고, 즐김도 없고, 무작을 설하고, 단멸을 설하고, 혐오를 설하고, 제거를 설하고, 학대를 설하고 입태를 거부한다고 비난했다. 이는 다름 아닌 중상모략이다. 이와 같은 중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돌파했을까?

 

부처님은 멋이 없다는데

 

바라문들은 부처님에게 멋이 없다고 비난했다. 왜 멋이 없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불교 자체가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슬람교나 힌두교의 경우 감동적인 문구가 많지만 불교에는 그런 멋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현미밥으로 비유했다.

 

현미밥은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 불교경전은 마치 현미밥과 같은 것이어서 꼭꼭 씹어 먹듯이 보지 않으면 소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현미밥이 각종 영양소가 파괴되어 있지 않아 몸에 좋듯이 꼭꼭 씹어 먹듯 가르침을 대한다면 이익이 될 것이다.

 

금요니까야모임도 어떤 면에 있어서는 멋도 없고 재미도 없다. 경을 합송하고 설명을 듣고 토론을 하는 것이 감각적인 시대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금요니까야모임은 현미밥과 같은 것이다. 씹으면 씹을수록 달고 고소한 맛이 난다. 이런 맛 때문에 만 5년 이상 빠짐없이 담마의 향연에 참석한다.

 

부처님은 정말 멋이 없을까?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바라문이여, 형상의 멋, 소리의 멋, 냄새의 멋, 맛의 멋, 감촉의 멋, 사실의 멋이 있는데, 여래에게는 그것들이 끊어지고, 뿌리째 뽑혀,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미래에 다시는 생겨나지 않습니다.”(A8.11)라며 되치기 했다.

 

부처님은 단멸을 말한다는데

 

바라문들은 부처님에게 무작을 설한다고 비난했다. 무작(無作: akiriya)이란 무엇인가? 이는 행위에 대한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이나 강한 비결정론을 말한다. 어떤 것이 있을까?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A3.61)을 보면 알 수 있다.

 

흔히 삼종외도라고 말한다. 이는 숙명론, 존우론, 우연론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사견에 대하여 부처님은 단지 전승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무작설로 드러난다.”(A3.61)라고 했다.

 

바라문들은 이와 같은 무작설을 무기로 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역공했다. 이에 부처님은 어떻게 반격했을까? 이는바라문이여, 나는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의 무작을 설합니다.”(A8.11)라고 말했다. 이 말한마디로 승부는 결정 것이나 다름없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토론의 천재이다. 그 어떤 대론에서도 상대방을 꼼짝못하게 만든다. 아마 맛지마니까야에서 자이나교도 삿짜까와의 대론이 대표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나이 든 바라문들이 나이 어린 부처님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다고 하여 그때 당시 공격용으로 사용했던 갖가지 사견을 무기로 하여 공격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여유 있게 받아 넘겼다. 씨름 용어로 말한다면 되치기 한 것이다. 단멸론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바라문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존자 고따마께서는 단멸을 설합니다.”라며 비난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단멸을 설하고 여러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단멸을 설합니다.”(A8.11)라고 말했다. 되치기로 제압한 것이다.

 

단멸론은 최악의 사견(邪見)

 

단멸론은 최악의 사견으로 본다. 이는 다름 아닌 허무주의이기 때문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허무주의이다. 그런데 바라문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단멸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열반을 잘못 이해하고 오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멸론은 육사외도 스승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싸깜발린이 주장했다. 그는 보시도 없다. 제사도 없다. 공양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단멸론 정형구는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단멸론을 보면 모두 없다로 끝난다. 그래서 절대무가 된다. 그러나 연기법에 따르면 절대무는 있을 수 없다. 조건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단멸론은 거짓이다.

 

단멸론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여전하다. 아무도 죽어서 살아온 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에는 과학에 기반을 둔 과학적 유물론이 그 뒤를 잇고 있는 것 같다.

 

단멸론을 보면 선악업의 과보가 없다고 했다. 이는 무슨 말일까? 주석에 따르면 모두 물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선악의 과보가 없다고 했다.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몸이 무너져 죽으면 몸에서 파생된 정신도 또한 무너져 죽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출가한다면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바라문들이 여덟 가지로 공격한 것 중에 가장 뼈아픈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여덟 번째 수행자 고따마께서는 입태를 거부합니다.”(A8.11)라는 말이다. 왜 이 말이 뼈 아플까? 오늘날까지 비판하는 말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모두 출가하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출가수행자들을 볼 수 있다.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은 출가수행자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각은 어떠할까? 세상 사람들 중에는 출가자가 많으면 인류의 씨가 마를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페터 선생이 말한 것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독일에서 거지성자로 알려져 있는 페터 노이야르가 어느 날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고행하면 인류가 멸망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고 한다. 페터 선생이 누더기 옷을 입고 쾰른 대학 숲에서 잠자는 것을 보고서 말한 것이다. 이에 페터 선생은 인간의 애욕은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에 독신으로 산다고 해서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수행자의 삶이 좋아서 출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매우 적다. 대부분 욕망으로 살아 간다. 욕계에서 욕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욕계중생이다. 욕계 중생이 식욕과 성욕을 포기하고 모두 출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쓸데없는 우려인 것이다.

 

바라문들은 부처님에게 입태를 거부한다고 비난했다. 모두 부처님 제자와 같은 출가의 삶을 살면 세상의 인류가 멸망할 것으로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되치기 했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누군가에게 미래에 모태에 들어 다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끊어지고, 뿌리째 뽑혀,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미래에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를 두고 입태를 거부한 자라고 말합니다.”(A8.11)

 

 

부처님이 말씀하신 입태를 거부한 자는 아라한을 말한다. 아라한이 되면 불사의 존재가 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세상 사람 모두가 아라한이 될 수 없다. 욕망으로 사는 존재가 욕망을 내려 놓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입태를 거부한다고 비난하는 바라문들에게 미래에 모태에 들어 다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끊어 진자라고 하여 되치기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단멸이 아니고 탐, , 치의 소멸에 대한 것이다. 모든 오염원을 소멸했을 때 무아의 존재가 되어 다시는 태어날 일이 없기 때문에 입태를 거부하는 존재라고 되치기 한 것이다.

 

병아리 부화의 비유에서

 

바라문들은 여덟 가지로 부처님을 공격했다. 여덟 가지는 부처님이 외도들의 견해를 지적할 때 말한 것들이다. 그런데 바라문들이 여덟 가지를 들어 거꾸로 공부처님을 공격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멋지게 되치기 했다. 씨름에서 되치기 한판승을 보는 것 같다.

 

바라문들은 부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의 하나는수행자 고따마는 늙고 연로하고 나이가 들고 만년에 이르러 노령에 달한 바라문에게 일어서서 맞이하고 자리에 초대하지 않는다.”(A8.1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바라문들이 부처님을 언짢게 생각한 것은 나이 든 바라문들을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부처님이 120세 되는 바라문에게 일어서서 맞이하지도 않는 등 예를 갖추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예를 들어 한 마리의 암탉이 있는데 여덟 개나 열 개나 열 두 개나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 시킬 때, 어떤 병아리가 병아리들 가운데 첫 번째로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알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알껍질을 깨고 나온다면, 그 병아리를 손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손아래라고 할 수 있습니까?”(A8.11)

 

 

어미 닭이 알을 낳는 데는 순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1번 알이 1번으로 알껍질을 깨고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가 손위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똑 같은 욕계 중생이지만 정각을 이룬 자가 최상자가 될 것이다.

 

부처님이 최상자라고 한 것은?

 

부처님의 탄생게가 있다. 대승 탄생게와 빠알리 탄생게는 다르다. 빠알리 탄생게를 보면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자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M123)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은 탄생게에서 자신이 최상자임을 선언했다. 탄생게에서 가장 뛰어난 자(aggo), 가장 훌륭한 자(jeṭṭho), 가장 선구적인 자(seṭṭho)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가르침의 퇴전할 수 없는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Pps.IV.185)이라고 했다. 그래서 탄생게는 정각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어 부처가 되었다. 최초로 알껍질을 깨고 나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상자이다. 그런데 베란자의 경에서 부처님은 나이든 바라문들에게도 똑 같은 말을 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내가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자리에 초대할 만한 자를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바라문이여, 여래가 누구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초대한다면, 그의 머리가 부수어질 것입니다.(A8.11)

 

 

최상자로서의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최상자로서의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부처님이 막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오비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유행자 우빠까를 만났다. 부처님은 우빠까에게에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M26)라고 말했다. 또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고 천상과 인간의 세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 없네. 나는 참으로 세상에서 거룩한 님, 위없는 스승이고 유일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로서 청량한 적멸을 얻었네.(M26)라고 말했다.

 

흔히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고 했다. 병아리 부화의 경우 알 낳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데는 순서가 없다.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상자인 것이다.

 

깨달음에 세계에서는 무상정득각을 이룬 부처님이 최상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가장 높은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기 때문에 120세가 되는 아라한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고 했다.

 

소설 데미안에서

 

부처님의 병아리 부화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 데미안에서도 인용된다. 독일의 세계적인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청년시절 친척 집에 있던 맛지마니까야의 병아리비유에 대한 이야기’(M16)를 보고서 감명을 받아 데미안을 썼다고 한다.

 

소설 데미안에서는 병아리 비유와 유사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말이다. 자아의 껍질로 갇혀 있는 것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자아의 세계를 파괴했다는 것은 무아의 세계에 있다는 것과 의미가 같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즐김은 없지만

 

오늘도 긴 길이의 후기를 작성했다. 후기를 작성하는 것은 자신의 공부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기록을 남기기 위한 목적도 있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어떤 경을 합송했고 어떤 말이 오갔는지 경전에 근거해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나중에 모으면 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금요니까야모임의 역사가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임을 소개했다. 그러나 나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설령 호기심으로 한두번 나왔다고 하더라도 계속 나오는 사람은 역시 극히 드물다. 이렇게 본다면 바라문들이 말한 것처럼 불교는 멋이 없는 것이고 즐김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현미로 비유했다. 보드라운 쌀밥이 아니라 꼭꼭 씹어 먹어야 소화가 되는 현미를 말한다. 더구나 바라문 말대로 부처님 가르침은 즐김이 없다.

 

감각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 가르침은 재미가 없다. 그럼에도 현미밥을 먹는 것처럼 가르침을 즐기는 자들이 있다. 부처님은 부처님 가르침이 없다고 비난하는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라문이여, 어떠한 이유로 나에 대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즐김이 없다.’고 밀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형상의 즐김, 소리의 즐김, 냄새의 즐김, 맛의 즐김, 감촉의 즐김, 사실의 즐김 이 있는데, 여래에게는 그것들이 끊어지고, 뿌리째 뽑혀,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미래에 다시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어떠한 이유로 나에 대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즐김이 없다.’고 밀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A8.11)

 

 

2022-05-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