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괴로움으로 이끄는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15. 11:59

괴로움으로 이끄는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금요니까야 모임에서 종종 새로운 얼굴을 본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오는데 소개 또는 권유로 오는 경우가 많다. 모임이 20172월 시작된 이래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 갔지만 고정적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4월 첫번째 모임이 4 8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사무실 겸 서고에서 열렸다. 새로운 얼굴이 세 명 있었다. 각자 간단하게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다. 전재성 선생과 오래 전에 인연이 있는 사람도 있고 최근에 인연 있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 온 여성도 있었다. 미국인이 앉아 있다 보니 모임이 글로벌화 된 것 같았다.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aṭṭha lokadhamma)가 있는데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하나는 세상의 원리의경2(Dutiyalokadhammasutta)’(A8.6)이고, 또 하나는 웃따라의 경(Uttaravipattisutta)’(A8.8)이다. 먼저 세상의 원리의 경2’를 합송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개시키고, 세상은여덟 가지 원리안에서 전개된다.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다.”(A8.6)

 

 

부처님은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있다고 했다. 이를 로까담마(lokadhamma)라고 하는데 모두 여덟 가지 원리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이득(Lābho)과 불익(alābho), 명예(yaso)와 불명예(ayaso), 칭찬(nindā)과 비난(pasasā), 그리고 행복(sukha)과 불행(dukkha)라고 했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aṭṭha lokadhamma)’에 의해서 세상이 돌아간다고 했다.

 

여덟 가지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보면 세속적이다. 출세간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로까담마는 세속적 법칙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도 여덟 가지 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팔세간법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에게 이득이 생겨나면, 그는 이러한 이득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A8.6)

 

 

이것이 해법이다. 탈이득 하기 위해서는 무상, , 무아를 통찰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범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집착함을 말한다.

 

여덟 가지 세간법의 결론은?

 

전재성 선생은 이득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득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짐을 말한다. 손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명예와 불명예도, 칭찬과 비난도, 행복과 불행도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덟 가지 원리에 경도되고 배척함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괴로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그는 경도와 배척에 빠져서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A8.6)

 

 

여덟 가지 세간법의 결론은 절망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가 회전하는 것이다. 연기가 회전하면 항상 그 종착지는 절망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십이연기분석경(S45.8)에서 연기의 순관 정형구에서도 볼 수 있고, 초전법륜경(S56.11) 고성제에서도 볼 수 있다.

 

연기가 회전되면 항상 절망에 이른다. 이는 빠알리 복합어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사야(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로 설명된다. 이 빠알리 복합어는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의 뜻이다. 그래서 고성제와 십이연기에서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56.11, S12.2)라고 시설된다. 팔세간법으로 사는 자는 항상 절망이라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열반을 왜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을까?

 

팔세간법에서 행복과 불행이 있다. 행복이 있으면 반드시 불행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행복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했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감각적 행복도 있고 선정의 행복도 있다고 했다. 최상의 행복은 열반의 행복이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고 했기 때문이다.

 

열반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열반은 지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법구경에서는 열반을 왜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을까?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열반의 행복에 대한 경’(A9.34)이 그것이다.

 

가르침의 장군 사리뿟따 존자는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하고 다녔다. 마음도 명색도 사라진 열반상태는 알 수 없는 것임에도 왜 사리뿟따는 열반을 행복이라고 했을까? 이에 우다인은 “벗이여 싸리뿟따여,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느낌이 없는데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A9.34)라며 따지듯이 물었다.

 

우다인의 질문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열반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상수멸정(想受滅定) 상태에서는 느낌과 지각이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에 열반이 행복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가르침의 장군은 열반을 행복이라고 말했다. 대체 열반의 상태를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 존자는 “벗이여, 바로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느낌으로 행복을 알 수 있음에도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열반의 경우 지각과 느낌이 사라진 상태이므로 열반을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음에도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한 것은 역설적으로 행복이라고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최상의 행복이 되는 것이다.

 

감각적 행복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선정의 행복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즐거운 느낌이 사라지면 괴로운 느낌이 된다. 그래서 어떤 느낌이든지 괴롭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S36.5)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어떤 행복도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어떠한 행복도 사라지고 나면 괴로운 느낌이 된다. 그런데 열반은 상수멸이기 때문에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리뿟따 존자는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A9.34)라며 말하고 돌아다녔는데, 이는 “벗이여, 바로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열반은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최상의 행복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고 한 것이다.

 

바보축제와 관련된 이야기

 

전재성 선생은 행복과 불행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불행이 없음을 말한다. 각자 느끼는 행복과 불행이 다른 것임을 말한다. 그런데 가장 위험한 것은 감각적 쾌락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축제를 들었다.

 

축제는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축제가 끝나고 나면 허탈하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욕망의 경도로 설명했다. 과도한 욕망에 따른 자신의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허망한 축제와 관련하여 법구경 26번 게송에 인연담이 있다. 바로 바보-축제와 관련된 이야기(bālānakkhattavatthu)’가 그것이다.

 

 

한때 싸밧티 시에는 바보-축제(bālānakkhatta)라는 기간이 있었다. 이 축제에서는 사람들이 재나 쇠똥을 몸에 바르고 온갖 욕지거리를 해대며 일주일간 지낸다. 이때에는 사람들이 친구나 친지나 수행자를 만나도 인사하지 않고 다짜고짜로 욕지거리를 퍼부어댄다. 이 욕지거리를 참아내지 못하는 자들은 주최 측에 반이나 사분지 일의 까하빠나를 지불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승원안에서만 지냈다. 재가신도들은 이 기간 동안에 승원에 음식을 보냈고 기간이 지나자 부처님 제자들을 찾아 뵈었다. 재가신도들이 이 기간 동안 아주 불쾌하게 지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은 자의 행실을 행하지만, 현명한 자는 핵심적인 재보로서 방일 하지 않음을 수호하여 불사(不死)의 대열반을 성취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지혜가 없는 자, 어리석은 사람은 방일에 사로잡히지만, 지혜로운 님은 최상의 재보처럼, 방일하지 않음을 수호한다. 방일에 사로잡히지 말고, 감각적 욕망의 쾌락을 가까이하지 말라. 방일하지 않고 선정에 드는 님은 광대한 지복을 얻는다.(Dhp.26-27)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 (DhpA.I.256-257, 바보-축제와 관련된 이야기)

 

 

축제는 즐거운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시대에서나 축제는 있다.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서 축제를 즐기는 것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있어서 축제는 바보나 하는 짓으로 보인다. 왜 그런가? 과도하게 경도되기 때문이다. 축제에 올인하고 났을 때 허탈감이 밀려오는 것은 에너지가 과도하게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

 

수행자라면 즐거운 것을 괴로운 것으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은 즐거운 것을 괴롭다고 알지 못한다. 즐거움 다음에 반드시 괴로움이 온다는 사실을 안다면 즐거움에 경도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방식은 이득, 명예, 칭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명예 때문에 목숨을 끊은 사람들을 종종 본다. 정치인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다. 일반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소해 보인 것임에도 크게 보는 것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이는 명예를 자아와 동일시해서 나오는 현상이라고 본다. 명예가 곧 자신인 것이다.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다. 명예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흠집이 생겼을 때 못 견뎌 한다. 생명과 같은 명예이기 때문에 명예가 손상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것도 과도하게 경도된 것이다.

 

무엇이든지 과도하면 탈이 난다. 명예에 과도하게 경도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부처님은 이미 생겨난 명예에 경도되고 비난을 배척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난다고 했다. 그래서 경도와 배척에 빠져서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A8.6)라고 했다. 과도한 경도는 절망에 이르게 됨을 알 수 있다.

 

질문은 일분 이내로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게

 

4월 첫번째 모임에서 세 명이 새로 왔다. 처음 온 사람들은 아마 모임의 분위기를 잘 모를 것이다. 어느 모임이든지 룰이 있다. 그것은 암묵적인 것일 수도 있다. 금요니까야 모임은 어떤 것일까?

 

금요니까야 모임은 전재성 선생을 모시고 니까야를 듣는 형식이다. 경을 합송하고 난 다음에는 전재성 선생의 경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면 된다. 다만 보이지 않는 룰이 있다. 지난 만 5년 동안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것은 질문은 일분이내로 간단히 하고 주제에서 벗어나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전재성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면 받아 적을 것이 많다. 말하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고자 노력한다. 어느 말이든지 삼장과 관련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의 주제와 관련된 질문을 짧게 하고 나머지는 설명 듣는 시간으로 한다. 이렇게 해야 진도가 나간다. 경을 하나만 해서는 진도는 하세월이 될 것이다.

 

 

2022-04-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