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브라흐마(Brahma)를 왜 하느님이라고 번역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2. 11:38

브라흐마(Brahma)를 왜 하느님이라고 번역했을까?

 

 

모임에 새로운 인물이 출현하면 활기가 생겨난다. 더구나 젊은 사람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요즘 어느 모임이나 단체이든지 5060이 대세이다. 이런 가운데 3040이 있다면 모임의 평균연령을 대폭하향 조정하는 것이 된다. 지난 325일 금요니까야모임도 그랬다.

 

요즘 에스에스엔에스에 열중하고 있다. 카톡도 있지만 페이스북에서 거의 산다고 볼 수 있다. 글을 쓰면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리는데 특히 페이스북 친구들이 적극적이다. 잘 보았다는 표시로 좋아요추천은 물론 댓글까지 달아 주었을 때 한껏 고무된다. 이번에 처음 온 40의 법우님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이다.

 

3월 두 번째 모임에서는 여러 개의 경을 합송했다. 그 결과 법수 일곱 번째가 끝났다. 다음 모임 부터는 법수 여덟이 시작된다. 총 열한 법수이니 이제 세 법수가 남은 것이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는 법수가 높아질수록 경의 내용도 길어진다. 아무래도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금요모임에서 첫번째로 합송한 경은 오랜 세월 동안 닦은 자애명상의 공덕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공덕에 두려워하지 않음의 경(mapuññabhayasisutta)’(A7.62)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자애경(mettasutta)’(A7:58-2)라고 했다. 왜 이렇게 경의 제목이 다른 것일까?

 

경의 제목과 관련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PTS본을 근거로 들었다. 바로 앞의 경에 포함된 것으로 편집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PTS본 편집자의 실수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경의 번호도 ‘A7:58-2’로 매겼다고 밝히고 있다.

 

우주적 규모의 자애의 공덕을 지으면

 

경은 자애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우주적 스케일이라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공덕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공덕을 짓는 것은 바로 행복을 짓는 것이다. (Sukhasseta, bhikkhave, adhivacana yadida puññāni)”(A7.62)라고 했다.

 

우주적 규모의 자애의 공덕을 지으면 어떤 과보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일곱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았는데,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고 나서 일곱 파괴의 겁과 생성의 겁 기간 동안 이 세계에 돌아오지 않았다.”(A7.62)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은 공덕은 우주적 스케일이다. 우주가 일곱 번이나 생겨났다가 깨졌다가를 반복했어도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이는 색계 극광천(極光天)에 있었기 때문이다.

 

극광천은 어떤 천상일까? 천상도표를 보면 색계 2선천에 해당된다. 빛이 주제가 되는 세계이다. 그래서 아밧사라(ābhassara)라고 하는데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는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광음천(光音天)이라고 번역했다.

 

왜 하느님(Brahma)이라고 번역했을까?

 

KPTS 번역의 특징은 풀어 쓰는데 있다. 아밧사라에 대하여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라고 한 것은 매우 독특한 표현이다. 여기서 하느님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우리나라에서 하느님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우리 고유의 신앙과 관련 있을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화가 전승되어 왔기 때문이다. 한국어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하느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하느님은 한국어에서 절대적인 존재(Existence)이신 신이 계신 위치, '하늘' '신자들 내적 마음' '하늘'을 선택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성서꾸란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신앙의 대상 또한 하느님으로 번역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도 사용하게 되었다. 개신교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별도로 사용하여, 개신교 성경과 예배에서 사용한다.”(하느님, 위키백과)

 

 

한국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절대적 위치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세계적으로 어느 나라이든지 하느님신앙은 있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도 하느님 신앙이 있었다. 그것은 브라흐마(Brahma)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니까야에서 묘사된 하느님(Brahma)을 보면

 

니까야에서 브라흐마에 대한 묘사가 있다. 디가니까야 1번 경에서도 볼 수 있고, 27번 경에서도 볼 수 있다. 우주가 성겁기가 될 때 묘사되어 있다. 그런 브라흐마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다음과 같은 묘사로 알 수 있다.

 

 

나는 1)하느님, 2)위대한 하느님, 3)정복자, 4)정복되지 않는 자, 5)모든 것을 보는 자, 6)지배자, 7)주재자, 8)작자, 9)창조주, 10)최상자, 11)조물주, 12)전능자, 13)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ahamasmi 1)brahmā 2)mahābrahmā 3)abhibhū 4)anabhibhūto 5)aññadatthudaso 6)vasavattī 7)issaro 8)kattā 9)nimmātā 10)seṭṭho 11)sajitā 12)vasī 13)pitā bhūtabhabyāna)”(D1.38, D24.30)

 

 

니까야에서 묘사된 하느님(Brahma)은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고대 인도에서도 오늘날 유일신교 종교에서 보는 것과 같은 하느님 또는 하나님, 알라와 같은 개념의 유일신이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Brahma)은 윤회하는 중생

 

KPTS에서는 브라흐마를 하느님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한역경전대로 범천(梵天)’이라고 번역했다. 그런 하느님은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하느님의 초대에 대한 경’(M49)에서도 확인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개념은 어떤 것일까? 이는 KPTS본 상윳따니까야 해제에서 불경에서 의미하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은 신앙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다.”(브라흐마상윳따 해제)라고 언급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아마 맛지마니까야 49번 경에서 언급된 바까하느님(Baka Brahma)이 대표적일 것이다.

 

바까하느님은 자신이 오래 산다고 하여 착각했다. 그러나 수명이 고작 1겁을 살 뿐이었다. 그것도 색계 2선천에서 8겁의 수명으로 살다가 색계 초선촌으로 수명이 1겁으로 강등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럼에도 오래 산다고 착각하여 자신의 전생을 잊어버렸다.

 

 

부처님은 바까하느님의 전생을 알려 준다. 그리고 수명이 영원한 것이 아닌 것도 알려 준다. 부처님은 하느님이여,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가 있습니다. 그대는 그곳에서 사라져 이곳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대는 여기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 기억은 잊혀 졌습니다.”(M49.11)라고 말해 준다.

 

부처님은 신통으로 바까하느님의 전생을 알려 주었다. 하느님도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리고서는 이와 같이 곧바로 아는 것에 관한 한, 그대와 동일하지 않은데 어떻게 내가 그대보다 열등합니까? 오히려 내가 그대보다 훌륭합니다.”(M49.11)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망상적 하느님이라고 볼 수 있는 바까하느님을 무상, , 무아의 가르침으로 교화한 것이다.

 

하느님(Brahma)에 대한 두 가지 잣대

 

니까야에서는 하느님(Brahma)에 대한 두 가지 잣대가 발견된다. 하나는 바까하느님 예에서 보듯이 비판적이고 풍자적 하느님에 대한 것이다. 또 하나는 청정한 삶으로서의 하느님이다. 이는 청정한 삶을 뜻하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는 말로 잘 표현된다.

 

브라흐마짜리야는 바라문 인생 사주기에 있어서 학습기에 해당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브라흐마짜리야는 학습기가 연장된 것이다. 평생 학습기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브라흐마짜리야에 대하여 KPTS에서는 청정한 삶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청정범행으로 번역했다.

 

금요니까야 모임에서 합송한 공덕에 두려워하지 않음의 경’(A7.62)은 청정한 삶에 대한 것이다. 청정한 삶을 살면 하느님 세계(梵天)에 태어나 하느님으로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한다. 그것도 우주가 일곱 번 성주괴공할 때도 이와 무관하게 하느님으로 산 것이다. 자애공덕을 쌓으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못되면 어떤 존재로 태어날까? 경에서는 서른 여섯 번이나 나는 신들의 제왕 제석천이었고, 수백번이나 나는 전륜왕, 정법자, 법왕, 사방의 정복자, 왕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자, 일곱 가지 보물을 갖춘 자이다.”(A7.62)라고 했다. 욕계천상에 화생했을 때는 제석천이 되었고,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는 전륜왕이 된 것이다. 이 모두가 자애를 닦은 공덕에 따른 것이다.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 자애의 마음을 닦는 다면

 

모임에서 어느 도반이 질문했다. 고작 칠년동안 자애의 마음을 닦은 결과 우주적 스케일의 공덕의 과보를 받는 것이 지나친 것이 아닌지 물은 것이다. 이에 전재성 선생은 자애의 마음을 칠년이나 계속 유지하기가 힘든 것임을 말했다. 그리고 잠시 자애의 마음만 내도 엄청난 공덕이 된다고 했다.

 

전재성 선생이 잠시 자애의 마음을 내도 공덕이 크다고 한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에서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 자애의 마음을 닦는 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스치는 향기는 매우 짧은 시간을 말한다. 주석에서는 두 손가락으로 값비싼 향료덩어리를 집어서 냄새 맡는 시간을 말한다.”(KPTS 각주)라고 했다. 또한 송아지가 어미소의 젓통을 한번 빠는 시간을 의미한다고 했다.

 

단지 스치는 향기 동안만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낸다면 엄청난 공덕이 될 것이라고 했다. 경에서는 보시공덕과 지계공덕 보다 더 공덕이 크다고 했다.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보시하는 것보다 자애의 마음을 잠시라도 내는 공덕이 더 수승함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아닌 수행공덕이다.

 

제아무리 보시공덕을 쌓고 지계공덕을 쌓아도 욕계천상 이상에서 화생할 수 없다. 그러나 자애공덕을 쌓으면 색계와 무색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행공덕이 보시공덕이나 지계공덕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과보가 크다는 것이다. 그것도 스치는 향기처럼 잠시 자애의 마음을 냈을 때도 그렇다는 것이다.

 

자애의 마음은 어떻게 내야 할까?

 

자애의 마음은 어떻게 내는 것일까? 이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Stn.145)라며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세 가지 편만으로 설명했다. 무한편만, 한정편만, 방향편만을 말한다. 각각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무한편만(anodhisopharaa)의 자비는 대상을 한정하지 않고 모든 중생들, 모든 생명체들 또는 모든 존재들에게 ‘원한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근심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행복할지어다.’라고 자비심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한정편만(odhisopharaa)의 자비는 대상을 한정해서, 모든 여성들, 모든 남성들, 모든 성자들 등에게 위와 동일하게 자비심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방향편만(dhisopharaa)의 자비는 시방의 각방향으로 자비심을 확산시키는 것으로 동방의 모든 유정, 서방-남방-북방의 어떤 특정한 사람 등에 위와 동일하게 자비심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천수다라니와 붓다의 가르침 55,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세 가지 편만 중에서 무한편만이 가장 범위가 넓다. 이는 멧따경에서와 같이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떻게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할까? 니까야에 정형구가 있다. 다음과 같다.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운다.”(M40)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타종교에는 방향편만만 있다고 했다. 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방향편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바라는 종교가 아니다. 잘 되기를 바라 바라는 마음을 보내는 종교이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불교는 서원의 종교이다. 이는 자애수행에서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대표적으로 사홍서원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사홍서원에서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라 하여 모든 중생을 건지오리다.”라며 서원하는 것은 무한편만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소라고동 불듯이 자애의 마음을

 

자애공덕은 잠시만 닦아도 공덕이 매우 수승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애수행은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수행이라는 것이다. 이것처럼 위대한 수행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칠년 동안 자애수행을 한 공덕으로 하느님이 되는데 색계 2선천에 화생하면 우주가 일곱 번 생겨났다가 깨져도 안심이라는 것이다. 욕계 천상에 나면 신들의 제왕 제석천이 되고, 인간으로 태어나면 일곱 가지 보물을 갖춘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자애수행은 사홍서원의 서원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오늘날 환경론자들이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환경론자들이 지구가 잘 되기를!”라고 바라는 마음도 방향편만에 따른 자애의 마음이라고 했다.

 

자애의 마음은 널리 내야 한다. 이에 전재성 선생은 강력하게 집중해서 멀리 퍼져 나가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서 금요니까야 모임 첫날 기억이 떠 올랐다. 20172월 첫모임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라고동 불듯이 자애의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촌장이여, 예를 들어 강력한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리는 것처럼, 촌장이여, 자애의 마음의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성장되면, 유한한 업의 세계는 거기에 남아있지 않고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S42.8)

 

 

2022-04-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