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르침에 비밀은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는 비밀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 라고 했다.
스승의 빈주먹
사권(師拳: ācariyamuṭṭhi)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문자 그대로 ‘스승의 주먹’을 말한다. 그런데 스승은 좀처럼 주먹을 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그 주먹 속에 큰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승은 죽는 순간까지 주먹을 펴지 않는다. 스승의 주먹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스승의 주먹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스승의 주먹은 빈주먹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스승이 주먹을 펴지 않은 것은 마치 그 주먹 속에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 라고 했다. 이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없음을 말한다. 비밀리에 스승과 제자사이에 마음과 뜻으로 전승된 가르침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띠붓따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It.121)
부처님은 정각을 이룬 그날 밤부터 열반에 든 그날 밤까지 45년 동안 남김 없이 설했다고 했다. 이를 구분교의 가르침(九分敎: navaṅga-buddha sāsana)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의 형태로서 설한 것이다. 언어로 설한 것이다. 여기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또는 뜻에서 뜻으로 스승과 제자사이에 비밀리에 전승되는 가르침이 없음을 말한다.
네 가지 감추지 않은 것이 있는데
3월 금요니까야 모임에서 부처님 가르침에는 비밀이 없음에 대한 경을 경을 합송했다. 교재에서는 ‘여래에게 있는 감추지 않는 것과 잘못이 없는 것이란 무엇인가?’라고 제목이 붙어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감추지 않음의 경(Arakkheyyasutta)’(A7.58)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여래에게는 네 가지 감추지 않은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신체적 악행(kāyaduccaritaṃ), 언어적 악행(vacīduccaritaṃ), 정신적 악행(manoduccaritaṃ), 생활의 청정(parisuddhājīva)을 말한다. 예를 들어 신체적 악행에 대해서는 “여래에게는 ‘타인이 나의 그것을 알아서는 안된다.’라고 감추는 여래의 신체적 악행은 없다.”(A7.58)고 했다.
부처님은 신체적 악행은 물론, 언어적 악행도 없고 정신적 악행도 없어서 삶이 청정하다. 그럼에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명예가 있는 사람들은 감추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는 까닭에
부처님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청정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악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숨길 것도 없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 아라한의 조건 중의 하나라서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는 까닭에” (Vism.7.5) 아라한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세상에 현자라고 생각되는 어리석은 자는 누구든지 불명예를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만, 그는 이와 같이 그 어떠한 것도 행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거룩한 님(阿羅漢)이라고 한다.”(Vism.7.24)
명예를 자신의 생명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숨기는 것이 있다. 학력을 숨겨서 문제가 되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학력이 자신의 명예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학력사칭을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발각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한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자들 중에는 혼외자를 둔 경우도 있고 은처를 둔 경우도 있다. 독신 출가수행승이 은처가 있고 자식이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자신의 불명예를 두려워하는 숨기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에게는 숨기는 것이 없다. 그래서 “비밀리에 악을 행하지 않는 까닭에” (Vism.7.5)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에게는 세 가지 잘못이 없는데
부처님에게는 세 가지 잘못이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라도 ‘올바로 가르침을 설한 것(Svākkhātadhammo)이고, 제자들에게 ‘열반으로 이끄는 길(nibbānagāminī paṭipadā)을 선언한 것이고, 제자들이 ‘현세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하게 한 것(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ntī)’이다. 이와 같은 것은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올바로 가르침을 설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올바로 가르침을 설했다. 그것에 대하여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누구라도 나를 세상의 이치에 맞게 ‘그대는 잘못 가르침을 설했다.’라고 비난한다면,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안온하여 두려움을 여의고 공포를 여읜다.”(A7.58)
부처님은 올바른 가르침뿐만 아니라 열반으로 이끄는 길을 선언한 것과 제자들이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하게 한 것도 이와 같이 설명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부처님에게서 비난할 만한 타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부처님이 완벽하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대부분 이름 이는 자들은 자신의 안에서 해석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주관이 들어가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러 검증 과정을 거쳐서 자신을 가졌을 때 진리를 선언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삼전십이행상으로 사성제를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성제를 세 번 굴린 것은
부처님은 사성제라는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릴 때 세 번 굴렸다. 사성제이기 때문에 모두 열 두가지 형태로 굴렸다. 그래서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이라고 한다.
삼전은 시전(示轉), 권전(勸轉), 증전(證轉)으로 설명된다. 이는 ‘이다’ ‘되어야 한다’ ‘되었다’ 로 세번 굴려진 것을 말한다. 처음에 굴린 것(示轉)은 견도 차원이고, 두 번째로 굴린 것(勸轉)은 수행도 차원이고, 세 번째로 굴려진 것(證轉)은 무학도 차원에 대한 것이다.
삼전은 고성제를 예로 들 수 있다. 시전은“이당 둑캉 아리야삿짠띠.(Idaṃ dukkhasamudayo ariyasaccanti)”라 하여, “이것이 거룩한 괴로움의 진리이다.” (S56.11)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이다’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것이 “괴로움이다. (ariyasaccanti)”라고 하여 괴로움을 먼저 철견하는 것이 요청된다. 이를 견도로 보아 시전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권전은“땅 코 빠니당 둑캉 아리야삿짱 빠린네이얀띠.(Taṃ kho panidaṃ dukkhasamudayo ariyasaccaṃ pahātabbanti)”라 하여, 이는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제거되어야 한다.”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제거되어야 한다(pahātabbanti)’의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이를 수행도로 보아 권전이리고 한다.
마지막으로 증전은 “땅 코 빠니당 둑카사무다요 아리야삿짱 빠히난띠.( Taṃ kho panidaṃ dukkhasamudayo ariyasaccaṃ pahīnanti)”라 하여, 이는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가 제거되었다.”라는 뜻이 된다. 이는 ‘제거되었다 (pahīnanti)’의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수행의 완성으로 보아 증전이라고 한다. 이렇게 네 가지 진리를 시전, 권전, 증전으로 세 번 굴리면 열 두가지 형태가 되어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사자후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열 두가지 형태로 설명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신의 내적 깨달음을 외적으로까지 확대하여 누구도 비난할 수 없도록 완벽한 이론 체계를 세운 것이다. 물론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검증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 때 부처님은 진리를 선포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담마짝까왓따나경(초전법륜경, S56.11))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S56.11)
이것이 부처님의 사자후이다. 청정한 삶을 완성했을 때 다시 태어남이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세계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천상세계의 존재들에게까지비난받을 수 없는 진리임을 선언했고 심지어 악마들에게까지 천명했다.
부처님에게는 네 가지 감추지 않는 것과 세 가지 잘못이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청정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감추지 않은 것이 된 것이다. 또한 진리를 설하고 진리를 선언하고 진리를 성취한 것에 있어서 아무런 비난받을 것이 없기 때문에 잘못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했을 때 안온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여읜다고 했다.
금요니까야모임에 대하여 여러 차례 소개했지만
부처님 가르침이 좋아서 가르침을 공부하고 있다. 함께 공부하면 더 좋을 것이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니까야공부모임이야말로 추천할 만한 것이 된다. 왜 그런가? 삼장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금요니까야모임에 대하여 여러 차례 소개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부처님 가르침이 좋다면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몇몇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떤 사람은 지방에 있어서 참여가 어렵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직장 때문에 참여가 어렵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모임이 겹쳐서 참여가 어렵다고 한다.
기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나 가면 끝나 버린다. 기회가 왔음에도 이것이 기회인 줄 조차도 모른다.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삼장을 꿰뚫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것은 행운이라는 사실이다. 오늘은 금요모임이 있는 날이다.
2022-03-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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