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모임

지나치게 주의나 주장에 빠졌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2. 3. 22. 11:15

지나치게 주의나 주장에 빠졌을 때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는 말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또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하여 입만 벙긋하면 어긋난다.”라는 말이 있다. 모두 언어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이른바 사구분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3월 금요니까야 모임이 311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열렸다. 늘 그렇듯이 오는 사람만 오는 것 같다. 그럼에도 모처럼 시간 내서 참여한 도반들도 있다. 더구나 지인과 함께 온 사람도 있다. 직장 다니면서 시간에 쫓기면서 참여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으로 본다.

 

3월 첫 번째 모임에서는 두 개의 경을 합송했다. 첫 번째 경은 시설되지 않은 것에 대한 의심과 불안은 왜 생겨나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시설되지 않은 것의 경(Abyākatasutta)’(A7.54)에 해당된다.

 

사구분별에 대한 이야기

 

경에 사구분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여래의 사후 존재 여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이는 여래는 존재한다거나, ‘여래는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여래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여래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네 가지 경우를 말한다.

 

부처님은 사구분별을 부정했다. 어떻게 부정했을까? 이는 사구분별에 대하여 단지 견해일 뿐이다.(diṭṭhigatameta)”라고 일축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니까야에서 말하는 견해(diṭṭhi)는 사견(micchā-diṭṭhi)이기 쉽다.

 

사견이 있으면 정견이 있기 마련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견(sammā-diṭṭhi)은 사성제를 말한다. 이는 팔정도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생성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알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견해라고 한다.”(S45.8)이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성제를 보면 괴로움이 키워드이다. 이렇게 본다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 방법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사견이라고 볼 수 있다.

 

외도 들이 사구로 분별해서 견해를 표출했을 때 이를 모두 사견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사견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이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라는 것은 갈애와 관계된 것이고, 지각과 관계된 것이고, 망상과 관계된 것이고, 희론과 관계된 것이고, 집착과 관계된 것이고, 그것은 불안이다.”(A7.54)

 

 

사구분별 중에 첫 번째 것만 옮겨 놓았다. 나머지 세 개도 문장은 동일하다. 여기서 키워드는 갈애(tahā), 지각(saññā), 망상(mañña), 희론(papañca), 집착(upādāna), 불안 (vippaisāro)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는 견해와 함께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설명해 놓았다.

 

 

첫째는 견해의 사변적 성질(diṭṭhigata)에 대한 특성을 지녔고,

둘째는 이러한 견해를 즐기려는 욕망, 즉 갈애에 관계된 것(tahāgata)이라는 특성을 지녔고,

셋째는 이러한 견해의 감각적 근원을 상기시키는 지각과 관계된 것(saññāgata)이라는 특성을 지녔고,

넷째는 견해의 형성을 초래하는 사유활동인 망상과 관계되는 것(maññita)이라는 특성을 지녔고,

다섯째는 견해를 도그마화 하는 집착과 관계된 것 관계되는 것(upādānagata)이라는 특성을 지녔고,

여섯째는 사변적 견해에 대한 의문에서 생겨나는 확산적 개념화를 의미하는 희론된 것(papañcita)이라는 특성을 지녔고,

일곱번째는 그것이 바로 자책의 근원(vippaisāro)이라는 특성을 지녔다.”(Mrp.IV,38)

 

 

사구분별에 따른 견해는 최종적으로 불안이라고 했다. 여기서 불안은 ‘vippaisāro’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Remorse, regret, repentance’의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후회로 번역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

 

사구분별은 있다없다에서 출발한다. 무엇이든지 있다라고 말한다면 영원주의가 되고 무엇이든지 없다고 말하면 허무주의가 된다. 이는 양극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양극단은 시설되지 않는다. 여기서 시설이라는 말은 설명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설되지 않는 것을 무기(無記)라고 한다. 빠알리어로는 아브야까따(abyākata)이다. 부처님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했다.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과 같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의 선언은 칸트, 헤겔 등의 철학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다고 했다.

 

여래의 존재 여부는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여래 대신에 신을 집어넣으면 신의 유무가 된다. 영원론자는 신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반면 허무주의자는 신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오늘날 과학적 유물론자들 역시 신은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에 기반을 둔 유물론자들은 허무주의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욕망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다. 신을 믿으면 다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신을 믿으면 잘못이 사해질 수 있고 안전하다는 것이다. 신이 없다고 믿는 것도 욕망에 기인한 것이다. 폭력을 저질러 놓고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은 과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부풀려 지면 인간을 잡아먹는다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희론이다. 이는 부풀려진 것임을 말한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부풀려 지면 인간을 잡아먹습니다.”라고 했다.

 

부풀려 진 것을 빠빤짜(papañca)라고 한다. 견해의 최종단계를 말한다. 그렇다면 빠빤짜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이는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M18)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난다.(M18)

 

 

빠빤짜, 즉 희론은 오염된 지각에 따른 것이다.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하여 부풀려 말하는 것은 지각이 오염된 것이다. 이는 느낌 단계에서 발생된다.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연기가 회전되는데, 특히 희론과 관련해서는 느낌 단계에서 지각단계로 넘어간다.

 

느낌에서 지각으로 연기가 회전될 때 오염된 지각이 개입되면 갈애가 된다. 느낌 단계에서 과거 경험했던 것이 지각되었을 때 갈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빠빤짜는 오로지 언어적 형성에 따른 사유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사유의 확장이 일어난다.

 

빠빤짜(희론)은 마치 허공속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마치 거북의 털과 같고 토끼의 뿔과 같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래서 희론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하여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 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시간과 존재에 관한 관념이 만들어진다.”라고 했다.

 

빠빤짜는 부풀려 진 것이다. 부풀려진 것은 터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부풀려진 것은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이런 희론으로 자유와 평등이라는 말을 들 수 있다.

 

전재성 선생은 자유에 대하여 자유를 강조하면 자유가 억압된다고 했다.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하면 할수록 많은 자유가 허용되는데 그 결과 부자는 더욱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경제를 보면 알 수 있다.

 

평등은 어떨까?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체제에서 평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불평등이 된다고 했다. 사회 전체를 완전한 평등세계로 만들기 위해서 평등을 강조하지만 강조할수록 평등은 제약 받음을 말한다. 이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서열이 이를 증명한다. 이에 대하여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서열이 생겨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자유나 평등을 강조하면 부자유가 되고 불평등이 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일까? 이는 있다없다에 대한 것이다. 있음과 없음이 욕망과 결합되었을 때 인간을 잡아먹을 수 있음을 말한다.

 

불안을 야기하는 사구분별

 

사구분별은 언어에 대한 것이다.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으로 실체가 없다. 그래서 사유를 하면 부풀려 질 수 있다. 나중에는 인간의 정신까지 지배하게 된다. 그 결과는 불안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 사람은 내적인 불안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고, 내적인 불안의 발생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고, 내적인 불안의 소멸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고, 내적인 불안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에게 그 내적인 불안이 증가한다. 그는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불만,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A7.54)

 

 

사구분별은 불안을 야기한다. 실체도 없는 것에 대하여 의미 부여했을 때 허상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와 같은 사견이 생겨나는 것은 정견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사성제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이 생겨나서 결국 절망에 이르게 된다.

 

연기법으로 논파된 양극단

 

여래가 사후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창조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두 연기법에 위배된다는 사실이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을 말한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 따르면 절대유나 절대무는 거짓이 된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서 절대로 성립될 수 없는 것들이다. 왜 그런가? 이는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비존재는 사라진다고 했다. 이는 허무주의가 거짓임을 말한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서 업이 남아 있는 한 그 업을 조건으로 해서 발생되기 때문에 죽으면 끝이라는 허무주의는 거짓이 된다.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고 했다. 이는 영원주의 논파에 대한 것이다. 업이 남아 있는 한 조건발생하는데, 한번 생겨나는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지나치게 주의나 주장에 빠졌을 때

 

사구분별은 있다고 없다에서 출발된다. 여기에 욕망이 개입되면 망상이 되고 희론이 된다. 오로지 사유의 확장에 따른 희론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부풀려 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희론에 물들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주의나 주장에 빠졌을 때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

 

부처님은 사구분별에 대해서는 무기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고 했다. 선가에서는 개구즉착이라고 해서 입맛 벙긋하면 어긋난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언어에 대한 것이다.

 

전재성 선생은 연기만이 진실이다고 말했다. 여러 조건의 결과로 발생되는 연기만이 실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연기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것은 사건이라고 했다. 그래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은 언어의 지배를 받지 않고 조건에 따라 일어납니다.”라고 했다.

 

 

2022-03-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