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니까야 모임은 더 없는 행복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서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일까?”라고. 여기서 공부는 불교공부를 말한다, 더 좁혀서 말하면 부처님의 원음을 배우는 것이다.
불교학자가 있다.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학자이다. 그는 대승불교 불교전공자이다. 그는 과연 사부니까야를 포함하여 소부니까야 경전을 다 읽어 본 것일까? 학자이기 때문에 읽어 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스님이 있다. 수행하는 스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스님은 사부니까야를 포함하여 소부경전을 다 보았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이 경전을 잘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경전이 출간되었을 때 판매현황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한 니까야가 번역되어 출간될 때 천부가량 인쇄된다고 한다. 소진되는데 얼마나 걸릴까? 놀랍게도 일년에 이백권이 고작이라고 한다. 천권 소진하는데 오년이 걸리는 것이다. 한국불자들이 얼마나 경전을 사 보지 않는지 알 수 있다.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는 물론 스님들도 경전을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니까야는 방대하다. 모두 모아 놓으면 한수레 될 것이다. 방대한 니까야를 다 읽어 본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번역자를 빼고 교정작업에 참여한 사람 정도가 읽어 보았을 것이다. 교정작업자도 일부만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니까야를 읽어 보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금요모임에 나오던 법우님이 한분 있었다. 그 분은 맛지마니까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다 읽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서 니까야를 소설읽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은 의미 없다고 글에 쓴 바 있다. 그런데 이 말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사부니까야를 포함하여 소부경전은 매우 방대하다. 모두 다 읽으려면 평생 걸릴지 모른다. 그래서 필요한 부분만 읽기로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앞서 언급된 법우님 말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일터에서는 디가니까야를 읽고, 집에서는 맛지마니까야를 읽는 것으로 했다. 마치 교정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 보자는 것이다.
니까야를 읽어 보면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실려 있다. 마치 우물안 개구리가 바깥 세상을 보는 것 같다. 그야말로 새로운 하늘과 땅이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알게 된다. 특히 각주에 실려 있는 주석을 읽으면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 같다.
흔히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이 있다. 니까야를 십년 이상 보고, 니까야를 근거로 십년이상 글을 쓰고 있는 입장에서 니까야말로 인류의 보고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온갖 지혜가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것이 있는 줄조차 모르고 있다. 그래서일까 어느 노비구니 스님은 “니까야 니까야 그러는데 대체 니까야가 뭐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흔히 이전과 이후라는 말을 한다. 이전과 이후과 확연히 갈릴 때 하는 말이다. 니까야를 읽어 본 사람과 읽어 보지 않는 사람으로 갈릴 수 있다. 부처님 원음을 접한 사람과 접하지 못한 사람으로 갈리는 것과 같다.
원음을 접했을 때 그 충격과 감동은 읽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불교인들은 지독히도 초기경전을 읽지 않는다. 불교학자도 읽지 않은 것 같고 스님들도 읽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모르고,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부처님 원음을 접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것은 니까야를 사 보는 것이다.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에서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서와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를 말한다.
두 번역서는 번역 스타일이 다르다. 각자 취향대로 선택하면 된다. 가장 좋은 것은 두 종류의 번역서를 모두 다 구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교하며 읽는 것이다.
비교하면 드러나기 마련이다.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역서는 서로 보완적이다. 서로 장단점이 있어서 두 종류의 번역서를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오로지 한 번역서만 고집해서는 안된다.
부처님 원음을 접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모임에 참석하여 듣는 것이다. 니까야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에게 들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번역자만큼 많이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부니까야를 완역하고 소부경전까지 번역한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선생만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금요니까야 모임이 생겨난지 만 오년이 넘었다. 2017년 2월부터 시작된 것이다. 매달 둘째와 넷째 금요일은 모임 가는 날이다. 고양시에 있는 삼송역 근처 삼송테크노밸리 B동 348호가 모임 장소이다.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진행한다. 문은 열려 있다. 누구나 와서 들을 수 있다. 교재는 ‘생활속의 명상수행’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정선한 경을 모아 놓았다. 현재 일곱 번째 법수가 끝났다.
금요니까야 모임에 대하여 홍보를 많이 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대게 한 두번 나오고 그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아마 재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모임은 감각적인 것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정시에 시작해서 정시에 끝난다. 모임 후에 식사나 비공식적인 모임 등 소위 뒷풀이 모임은 일체 없다. 오로지 담마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담마에 대하여 토론할 뿐이다.
“오늘 내가 맛본 것은
백 가지 맛의 청정한 음식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이니,
앎과 봄이 한량없으신,
고따마 부처님께서 설한 가르침이다.”(Thag.91)
금요모임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무미건조한 것이다. 그러나 담마의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처럼 최상의 맛이 없다. 모임을 마치고 귀가 길에 느끼는 잔잔한 행복이 이를 말해준다. 모임 중에도 잔잔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담마의 향연이라고 말한다. 후기를 모아 놓은 책 제목도 ‘원음향기 가득한 서고의 저녁’이라고 했다.
“존경하는 것과 겸손한 것,
만족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5)
망갈라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축복경 또는 길상경이라고 한다. 행운을 불러 오는 여러 가지 조건에 대하여 설한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가르침을 듣는 것 (dhammasavaṇaṃ)’이다. 그것도 때에 맞추어 들으라고 했다. 금요모임에서 니까야를 합송하고 설명을 듣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6)
담마를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들은 것에 대하여 토론할 줄 알아야 한다. 잘 모르는 것은 물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dhammasākacchā)’하라고 했다. 다행이도 금요모임에서는 사부니까야를 완역하고 빠알리 삼장에 정통한 전재성 선생이 있다. 전재성 선생으로부터 담마를 듣고 담마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은 더 없는 축복이다.
망갈라경은 삼대 테라와다 예불문 중의 하나이다. 참고로 테라와다 삼대 예불문은 라따나경(보배경, Sn.2.1), 멧따경(자애경, Sn.1.8), 망갈라경(축복경, Sn.2.4)이다. 모두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다. 그리고 초심자를 위한 소송경에도 실려 있다. 부처님 당시부터 출재가를 막론하고 암송되어 온 경이다. 이런 테라와다 삼경을 모두 빠일리어로 외운 바 있다. 그런데 테라와다 삼경은 예불문이자 동시에 수호경이라는 사실이다.
테라와다 삼경이 왜 수호경일까? 그것은 아마도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한다.(Dhammo have rakikhati dhammacāriṃ)”(Thag.303)라는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법이 법을 지키는 자를 보호하듯이,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가르침이 보호해 주는 것이다. 테라와다 삼경의 가르침대로만 산다면 어떤 재난과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좋아서 늘 담마와 함께 하고 있다. 초기경전을 인용하여 글을 쓰는 것이 대표적이다. 재작년 부터는 경을 암송하고 있다. 경을 하나 정해서 외우는 것이다. 이삼일에 한 게송씩 외우다 보면 시일이 지났을 때 다 외워진다.
현재 숫따니빠따 빠다나경(정진의 경, Sn.3.2)를 외우고 있는 중이다. 모두 25게송인데 현재 20번 게송까지 외웠다. 최근엔은 니까야 읽기에 돌입했다. 그래서 먼저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를 동시에 읽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듣는 것만 못하다.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부터 듣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공부방법이다.
매일 글을 쓰고, 매일 게송을 외우고, 매일 니까야를 읽고, 더구나 2주에 한번씩 모임에 참석한다. 혼자 하는 것도 좋지만 함께 하면 더 좋다. 모임에 참석하면 도반이 있어서 좋다. 좋은 도반은 청정한 삶의 전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무엇보다 가슴 설레는 것은 담마를 듣는 것이다. 이런 것도 더 없는 행복일 것이다.
2022-04-0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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