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자아는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7강

담마다사 이병욱 2022. 6. 1. 18:17

자아는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

 

 

오늘은 선거날이다. 오전에 지방선거 투표를 마치고 사무실로 향했다. 휴일이라 그런지 거리가 한산하다. 장미꽃이 만발한 장미의 계절에 거리는 햇살은 부드럽고 공기는 싱그럽다. 일년 중에 오늘처럼 복 받은 날은 드물 것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청년붓다 7강을 듣고 후기를 쓰는 것이다. 모두 8회이니 이제 마지막 한 회만 남았다.

 

청년붓다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약속한 것이 있다. 그것은 청년붓다 카톡방 멤버들에게 후기를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8강까지 완주하겠다고 약속했다.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7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7강을 유튜브로 들었다. 지난주 금요일 전재성 선생의 금요니까야모임과 겹쳐서 듣지 못했다. 담당에게 유튜브로 들을 수 있도록 요청해서 오늘 날 잡아서 무려 2시간 40분에 달하는 강연을 들었다.

 

 

후기를 쓰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메모를 해 놓아야 한다. 받아 적다 보니 29페이지를 적게 되었다. 이 모두에 대하여 글로 남기려면 수십페이지에 달할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 몇 가지만 쓰는 수밖에 없다.

 

이번 청년붓다 7강에서 고미숙 선생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무아일 것이다. 강연이 본격적인 괘도에 올랐음을 말한다. 불교 교리 중에서 가장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무아인데 듣고 있다 보면 고미숙 선생 나름대로 뚜렷한 무아관이 있다. 사실 이런 것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반전이 있다. 반전이 없는 영화나 드라마를 상상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경전에도 반전이 있다. 경을 읽어 보면 한번 뒤집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고미숙 선생 강연도 그런 것 같다. 고미숙 선생만의 독특한 캐릭터로 한번 뒤집는다.

 

프로세스와 운동

 

불교인들은 연기법에 대하여 조건법이라고 알고 있다. 이는 연기를 뜻하는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라는 말 때문이다. 이 말은 조건(paicca)하여 함께 발생함(samuppāda)의 뜻이다. 그래서 조건법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고미숙 선생은 이를 과감하게 프로세스로 설명한다. 이렇게 본다면 연기법은 과정법이라는 의미가 크다.

 

고미숙 선생은 왜 연기를 과정으로 설명했을까? 이는 무아를 설명하기 위해서 과정을 도입한 것이다. 무아는 과정에 대한 것임을 말한다. 여기서 과정(프로세스)이라는 말은 조건발생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자아는 과정에 대한 것이 없지만 무아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고미숙 선생은 프로세스라는 말과 함께 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래서 연기법에 대하여 프로세스와 운동으로 설명했다. 이를 보이지 않는 질서라고 했다. 모든 것은 생성하고 소멸하는 프로세스와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말한다.

 

고미숙 선생이 무아에 대하여 프로세스와 운동으로 설명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아의 개념을 부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자아를 말하는가? 어떤 변치 않는 자아, 즉 영혼과 같은 자아를 말한다.

 

영혼과 같은 변치 않는 자아는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프로세스와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연기법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고정된 것이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한다.

 

망상적 유형의 하느님

 

이 세상에 나홀로 존재하는 것이 있을까? 부처님 가르침에 있을 수 없다. 이는 연기법으로 설명된다. 연기법의 기초라고 볼 수 있는 연기송에 따르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상호의존성을 말한다. 그럼에도 나홀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기 쉽다. 하느님이라는 말도 해당될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망상적 유형의 하느님이 있다. 여기서 하느님은 브라흐마(Brahma)를 번역한 말이다. 한역으로는 범천(梵天)이라고 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의 전재성 선생은 하느님으로 번역했다.

 

하느님도 윤회하는 중생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 오래 살아서 자신이 윤회하는 존재임을 망각했다. 이를 부처님이 깨우쳐 주기 위해서 신통으로 하느님 처소에 나타났다. 그러자 망상적 유형의 하느님 바까(Baka)는 이렇게 말했다.

 

 

존자여, 나는 항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말하고, 견고한 것을 견고하다고 말하고, 영원한 것을 영원하다고 말하고, 홀로 완전한 것을 홀로 완전한 것이라고 말하고, 불멸인 것을 불멸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서 참으로 생겨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생겨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M49)

 

 

하느님 바까는 자신은 홀로 완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회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했다. 과연 나홀로 존재하는 것이 있을까?

 

이 세상에 어느 것도 나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내가 있다면 상대방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있다면 이는 연기법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망상이라고 했다.

 

 

제일원인(第一原因)

 

유일신교에는 창조주가 있다. 유일신교 교리를 보면 모든 것이 창조주에서 나왔다고 본다. 누군가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일까?”라며 무한소급해서 올라 갔을 때 누구를 만나게 될까? 유일신교라면 오늘의 내가 있게 되는 최초의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최초의 존재를 있게 한 존재가 또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제일원인(第一原因)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제일원인이 되는 창조주를 다음과 같이 부정했다.

 

 

하느님이여, 창조주를 창조주로 곧바로 알고 창조주가 창조주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님을 곧바로 알고, 나는 창조주라고 생각하지 않고 창조주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창조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창조주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창조주를 긍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여, 이와 같이 곧바로 아는 것에 관한 한, 그대와 동일하지 않은데 어떻게 내가 그대보다 열등합니까? 오히려 내가 그대보다 훌륭합니다.”(M49)

 

 

부처님은 창조주는 경험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것이든지 나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말한다. 어떤 것이든지 연기적 관계속에서만 존재함을 말한다.

 

누군가 창조주나 하느님, 영혼, 자아 등을 말했을 때 이는 단지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것도 연기적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명칭만 주어졌을 뿐이다. 어느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한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창조주나 하느님, 영혼, 자아 등 홀로 존재하는 것은 체험되지 않는다.

 

부처님은 창조주를 부정했다. 이는 명칭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실체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에 대해서는 나는 창조주를 긍정하지 않았습니다.”(M49)라고 하여 홀로 존재하는 창조주를 부정했고, 하느님에 대해서는 나는 하느님을 긍정하지 않았습니다.”(M49)라고 하여 홀로 존재하는 하느님을 부정했다.

 

나홀로 존재했을 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누군가 나홀로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망상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망상적 유형의 하느님은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예전에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바랬는데, 그러한 내 마음의 서원 때문에 이 뭇삶들이 여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D1)라고 말했다.

 

망상적 유형의 하느님이 있다면 망상적 유형의 중생도 있을 것이다. 이는 이 존귀한 자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는 여기 먼저 태어난 자를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D1)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하느님 바까는 자신이 창주주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수명과 복이 다하여 색계 초선천에 떨어진 윤회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중에 태어난 존재들은 그를 창조주로 모셨다.

 

놀랍게도 초기경전을 보면 오늘날 유일신교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한 것이 실려 있다. 이는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 교리에 대하여 비판을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 교리는 오늘날 유일신교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래서일까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 선생은 브라흐마를 창조주 개념으로 보아 하느님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나에 대하여 묻는다면

 

고미숙 선생은 강연 중에 끊임없이 묻는다. 나에 대하여 묻는다. 자아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나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불교인이라면 오온(五蘊)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내가 간다.”라고 말하면 틀린 것이 된다. 불교인이라면 오온이 간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나는 없다. 그래서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은 존재의 다발에 의해서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S5.10)라고 했다. 여기서 존재의 다발은 오온을 말한다. 뭇삶은 중생을 말한다.

 

중생이라는 거짓 이름이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자아도 거짓 이름이 된다. 나라는 말이나 중생, 사람이라는 말은 관례상 붙여진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명칭에도 실체가 없다. 있다면 오온의 연기적 프로세스만 있을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하고 심오하다. 특히 연기의 가르침이 그렇다. 어느 날 아난다가 연기법이 심오한 것에 대하여 찬탄하면서 그러나 저에게는 아주 명백한 것으로 드러납니다.”(D15.1)라고 말했다. 이에 부처님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부처님은 아난다가 심오한 연기법을 다 이해한 것처럼 말하는 것에 대하여 나무랐다. 그래서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D15.2)라며 두 번 말했다.

 

부처님은 연기법에 대하여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깊고, 심오하게 출현한다.”(D15.2)라고 말했다. 누구나 연기법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면, 이와 같은 이 뭇삶들은 실타래에 묶인 것과 같이, 마름병에 덮인 것과 같이, 문자 풀에 엉킨 것같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지옥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D15.2)라고 말했다.

 

연기법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고미숙 선생은 자아와 연기와 관계를 들어서 누구나 알 수 있게 설명한다. 그런 자아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세상에 나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말한다. 누군가 아트만이나 영혼과 같은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순수하게 분리된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조작입니다.”라고 말했다.

 

 

자아는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

 

강연의 내용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심오해진다. 특히 무아의 가르침이 그렇다. 고미숙 선생은 청년붓다 7강에서 무아에 대하여 매우 길게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밝혔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반전을 보는 것 같다.

 

고미숙 선생은 자아와 무아와의 관계를 설명했다. 고미숙 선생은 카렌 암스트롱의 이야기를 곁들였는데 부처님이 말씀 하신 자아와 무아와의 관계에 대하여 자아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자아는 소멸 대상이 아니다. 나홀로 존재하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소멸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신 부정해야 한다. 연기적 프로세스를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부정된다. 어떻게 부정하는가?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내가 있으면 반드시 내가 아닌 것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있으면 내가 아닌 것이 있게 되어서 자아는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빼박이라고 했다.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자아와 무아의 차이에 대하여 차별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아에는 차별이 없음을 말한다. 마치 이데올로기 없다는 말과 같다. 반면에 자아가 있다면 이는 차별이 있다는 말과 같다고 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말과 같다.

 

인도에 브라만교가 있다. 브라만교에서는 네 가지 계급으로 나누어서 차별했다. 이렇게 차별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여러가지 들 수 있지만 그것은 자아 개념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순수한 자아개념이 있다는 것이 계급의 차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자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인정한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작동되면 편을 가르고, 배제하고, 혐오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갈등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아를 말한다면 이데올로기는 사라진다.

 

자아를 설정하면 이데올로기가 된다. 그러나 무아를 설정하면 주체가 없기 때문에 프로세스만 남게 된다. 그래서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장사치가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로 인해 제관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왕이 됩니다.(Stn.651-652)라고 했다.

 

부처님은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한다.”(S7.9)라고 말했다. 이는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또한 사성계급의 해체를 말하는 것이다. 무아사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무아사상은 어떤 이데올로기도 허용하지 않는다. 구호보다는 프로세스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누구나 한번쯤 나를 낳아준 어머니

 

고미숙 선생은 지혜와 자비에 대하여 길게 설명했다. 지혜와 자비는 어떤 관계일까? 불교인들이라면 누구나 동전의 양면 같다고 말할 것이다. 지혜가 있는 곳에 자비가 있고, 자비가 있는 곳에 지혜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깨달음의 완성은 지혜와 자비로 나타난다. 그런데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지혜와 자비는 모두 무아에서 나온다고 했다. 연기적 프로세스를 이해하여 무아를 체득하게 되면 지혜로울 수밖에 없고 자비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는 지혜와 자비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자아에 집착하면 자비, 유머, 기쁨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했다. 무아의 마음이 되었을 때 자비심도 있고, 유머도 있고, 기쁨도 있다고 했다. 무아일 때 무상, , 무아의 지혜가 있고, 동시에 무아일 때 자비심이 있다고 했다.

 

무아이어야 진정한 자비심을 낼 수 있다. 어느 정도일까?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숫따니빠따 자애경의 한구절을 소개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Stn.149)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을 끔찍이 사랑한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는 아들에 대하여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티벳불교에서는 누구나 한번쯤 나의 어머니가 아니었던 존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의 출처는 니까야에 있다는 사실이다.

 

상윳따니까야에 15번 상윳따를 보면 어머니의 경이 있다. 부처님은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 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S15.14)라고 했다. 어머니뿐만 아닐 것이다. 아버지의 경에서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일찍이 한 번도 한 번도 아버지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S15.15)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윤회하는 삶속에서 누구나 한번쯤 나를 낳아준 어머니였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누구나 한번쯤 아버지였을 것이고 형제였을 것이고 자매였을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일체중생에게 자비의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다투는 것은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7강을 들었다. 그리고 장문의 후기를 쓰고 있다. 어떤 강연이라도 고미숙 선생의 강연은 들을 만하다. 이는 듣고 나면 남는 것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고미숙 선생은 고미숙 선생 나름대로의 독특한 견해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예상하지 못한 것이 많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자아이론에 대한 것이다.

 

고미숙 선생은 자아이론에 대하여 이데올로기로 설명했다. 이런 설명은 탁월하다.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무아이면 이데올로기도 없다. 어떤 이데올로기인가? 그것은 자아의식에 기반한 주장이나 주의를 말한다.

 

누군가 정의를 외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평등을 외치는 사람이 있다. 이런 구호는 모두 이데올로기이다. 이 세상의 모든 구호는 이데올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자아에 기반한 집착이 되면 폭력적으로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다투는 것도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서로 원수 보듯 한다. 이런 것도 자아에 기반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페미니스트가 여성차별에 집착했을 때 이것 역시 자아에 기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의, 평등, 자유, 환경, 여성 등 온갖 구호가 있다. 그러나 자아에 기반한 집착이 되었을 때 폭력이 된다. 내편과 네편으로 편가르기 하며 배제하고 혐오했을 때 폭력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애착과 분노로 설명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보았다.

 

 

2022-06-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