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것이든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6강
불교란 무엇일까?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이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불자들은 답을 잘 못하는 것 같다. 불교에 대하여 지식이 있는 사람들의 말이 각각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도 다르다.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6강을 유튜브로 들었다. 신청자에 한해서 열어주는 비공개 동영상이다. 지난주 금요일 전재성 선생의 금요니까야모임에 참여하는 바람에 듣지 못했다.
어제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후에 오후 4시부터 청년붓다 6강을 들었다. 당연히 노트를 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로 받아 적었다. 그래야 후기를 제대로 쓸 수 있다.
오늘 아침 후기를 쓰기 위하여 메모한 것을 읽어 보았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명백히 드러났다. 그것은 청년붓다 6강 주제와 관련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연기법이다.
고미숙 선생이 던진 질문
고미숙 선생은 강연을 시작할 때 서두에서 한 말이 있다. 그 말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라는 말이다. 결국 이 말을 중심으로 해서 두 시간 동안 강연했다.
고미숙 선생은 강의를 시작할 때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이번 청년붓다 오픈 테마와 다름없는 ‘사자와 바람과 연꽃의 노래’(Stn.71)와 관련이 있다. 숫따니빠따 ‘무소의 뿔의 경’에 후렴구로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이다.
고미숙 선생은 연기법을 설명할 때 홀로 존재는 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다. 이 두 문장은 모순된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했는데 왜 홀로 가라고 했을까?”라며 의문해보라고 했다. 일종의 화두 같은 것이다.
승가공동체에서 청년들의 파토스는
고미숙 선생의 특강은 청년이 키워드이다. 이는 감이당에 청년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줌모임에서도 청년들이 많다. 주변에서 오공육공(50-60)들과 어울리다가 줌모임에서 이공삼공(20-30)들을 보니 나이를 먹은 것 같다.
줌모임에 청년들이 많으니 청년의 열기도 느껴진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파토스라는 말을 쓴다. 감정, 열정 등의 의미가 있다. 고미숙 선생이 청년의 파토스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청년시절에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도 청년시절에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청년들은 어떠할까?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방향도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것 같다고 했다. 또한 청년의 에너지를 어디에 써야 될지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승가공동체에서는 청년들의 파토스로 넘쳐 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뚜렷한 방향과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깨달음과 중생구제라고 했다.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고 했는데
부처님은 정각을 이룬 후에 전법을 했다. 먼저 준비된 수행자부터 교화했다. 그리고 깨달음이 보편적인 것을 확인되자 본격적인 전법에 나섰다. 부처님을 포함하여 61명의 아라한이 탄생했을 때 전도에 나선 것이다.
부처님은 일년이 되었을 때 아라한이 61명이 되었다. 진리를 알았으면 가만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사의 진리를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전도선언으로 알 수 있다.
어떻게 전도해야 할까? 부처님의 전도방식은 독특하다. 이는 전도선언문에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 말라.”(S4.5)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왜 둘이서 같은 길을 가지말라고 했을까?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부처님 당시에는 종교간 폭력이 없었기 때문에 홀로 다녀도 안심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사상의 대결에서 싸워 이기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아라한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본다. 마지막으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전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둘이 가면 낭비로 본 것이다.
불교는 말의 종교
고미숙 선생은 불교는 말의 종교라고 했다. 이는 기존 불교에 대한 이미지와 매우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알고 있는 불교는 은둔의 불교로 알고 있으나 사실 알고 보면 불교는 말의 종교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불교는 법의 종교임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의 종교인 것이다.
불교가 말의 종교인은 것은 전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전도선언문에서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S4.5)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과연 한국불교에서는 이렇게 하고 있을까?
부처님은 정각을 이룬 밤부터 열반에 든 밤까지 45년 동안 설법했다. 그런 부처님의 설법은 8만4천법문에 달한다. 부처님은 끊임없이 말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들 때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It.121)라고 말했다.
불교에도 복음(福音)이 있다!
초기경전 인연담을 보면 부처님 말한마디에 깨달았다는 내용이 많다. 사리뿟따 존자도 앗사지 존자의 말한마디에 깨달았다. 그것은 “사실들은 원인으로 생겨나며 그 원인을 여래가 설합니다. 그것들이 소멸하는 것 또한 위대한 수행자께서 그대로 설합니다.”(Vin.I.40)라는 말이다. 이 말을 연기법송이라고 한다.
사리뿟따는 앗사지의 말한마디를 듣고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그런데 사리뿟따의 말을 전해 들은 목갈라나 존자에게도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빛의 파동으로 설명했다. 진리는 빛과 같다는 것이다.
연기법송은 연기법을 가장 짤막하게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원인으로 생겨나서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눈이 열리는 자에 대하여 “무엇이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Vin.I.40, S56.11)라는 정형구가 붙는다. 연기법을 이해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고와 고의 소멸로 설명했다.
모든 것이 원인이 있는 것은 고에 대한 것이고, 고의 원인이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고의 소멸이라고 했다. 이는 사성제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연기법송은 결국 사성제를 짤막하게 표현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로 요약된다. 사성제는 고와 고소멸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전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최초로 깨달은 것이다. 사성제는 연기법에 대한 것이므로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 존자는 “지난 수천억 우주기 중에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Vin.I.40)라고 했다.
수천억 우주기는 한량없는 세월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는 시기는 암흑에 해당된다. 그런데 한량없는 시기에 어느 때 빛이 나타났다. 부처가 출현한 것이다. 부처가 출현하여 법을 폈는데 이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앗사지 존자가 짤막한 문구로 알려준 것도 연기법이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복음(福音)이라고 했다.
기독교에만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도 복음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연기법이다. 특히 “무엇이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정형구이다. 이 정형구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그때 당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사성계급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처님의 교단에서는 계급의 차별이 없었다.
데이비드 봄의 플라즈마이론을 적용하여
고미숙 선생은 연기법을 과학이론과 연계하여 설명했다. 거시적으로는 상대성 이론이고 미시적으로는 양자역학이다. 그런데 데이비드 봄의 플라즈마 이론을 적용하여 연기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감이당에서는 불교강좌뿐만 아니라 양자역학과 같은 강좌가 있는 모양이다. 이는 마이크로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불교의 연기법과 잘 들어 맞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데이비드 봄의 플라즈마 이론을 접하면서 연기법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플라즈마이론이란 무엇일까? 인터넷검색하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백과사전에서 “생성되는 하전 입자의 무리를 일컫는 말. 이는 때때로 물질의 고체·액체·기체에 이어서 4번째 상태로 일컬어진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고체는 액체로 바뀌고, 액체는 기체로 바뀐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기체가 플라즈마로 바뀌는 것이 플라즈마이론이라고 했다. 이때“전자의 자유란 무엇일까?”라며 사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개체로 존재할 수도 있을까? 전자는 집단으로 존재해야 역할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집단에서의 자유를 말했다. 연기법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느 것이든지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한다.
어느 것이든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고미숙 선생은 강연모두에서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것은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모순에 대하여 설명했다.
우주는 연기조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것 하나도 홀로 있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홀로 있는 것에 대하여 자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홀로 있다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자유일까? 홀로 있는 자에게 있어서 자유는 의미가 없다. 최소한 세 명 이상의 공동체에 있어야 자유를 말할 수 있다. 그런 자유는 어떤 자유일까?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자유를 말한다.
조직에서 자유는 얼마나 능동적으로 참여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모임에 10분 전에 도착한다면 능동적인 참여가 된다. 이런 사람에게는 능동적 자유가 있게 된다. 그러나 지각을 한다면 수동적이 될 것이다.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다.
플라즈마이론에서 전자의 참여는 집단에서의 자유가 된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 역시 집단에서 자유가 될 수 있다. 능동적으로 실천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부처님이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고 했을 때 이는 나홀로 고립되어서 살라는 말은 아니다. 인연과 운동의 연기법, 생성과 소멸의 연기법이 작동하는 우주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연기법은 생성과 소멸에 대한 것이다. 조건에 따라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할 때 연기의 유전연기 뿐만 아니라 환멸연기도 반드시 함께 설했다.
사람이 연기법대로 산다면 이는 유전연기가 되어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윤회의 소멸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환멸연기도 설한 것이다. 부처님이 홀로 가라고 한 것은 환멸연기의 길로 가라는 뜻도 된다. 환멸연기로 갔을 때 대자유가 있게 된다.
병아리부화 비유에서
깨달음은 자신이 깨닫는 것이다. 남이 대신 깨닫게 해 줄 수 없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병아리부화 비유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이와 같이 용맹을 수반하는 열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면 그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으며, 위없는 안온을 얻을 수 있다.”(M16)라고 했다.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나올 때 자신의 힘으로 깨고 나와야 한다. 그래서“병아리들이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듯이, 마하나마여, 이 세상에 고귀한 제자는 계행을 지키고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고 식사하는데 분량을 알고, 항상 깨어있으며, 일곱 가지 올바른 성품을 갖추고, 보다 훌륭한 마음을 보여주는,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을 제공하는 네 가지 선정을 뜻대로 곤란 없이 어려움 없이 성취한다면, 그 고귀한 제자는 유학(有學)으로서 길을 가는 자라고 불립니다.”(M53)라고 했다. 이것이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고독한 수행자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이 있다. 소설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가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병아리부화 이야기를 보고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소설 데미안에서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했다.
자아의 껍질로 갇혀 있는 것을 깨고 나와야 한다. 마치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고독한 수행자에게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바다에 온전히 빠졌을 때 대자유를 맛볼 수 있다.
나홀로 산다고 하여 자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괴로움만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진리의 바다에 온전히 던져졌을 때 대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할 수 없지만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라고 말한 것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고독한 수행자
나홀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심산유곡에서 신선처럼 사는 사람들도 해당될 것이다. 그들은 정말 나홀로 사는 것일까? 진정으로 나홀로 산다면 밥도 먹지 말아야 할 것이고 스마트폰도 없어야 할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철저하게 자급자족해야 할 것이다.
나홀로 산다고 해도 나홀로 살 수 없다. 산속에서 자연인처럼 산다고 해도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홀로 사는 것이 자유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나홀로 있는 것에는 자유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홀로 사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다. 홀로 사는 사람은 자유 그 자체이기 때문에 자유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라는 말이 성립되려면 함께 살아야 한다. 공동체 내에서 자유라는 말은 성립된다. 그런데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때 자유는 더 커진다는 사실이다. 진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승가공동체는 모여서 산다. 그러나 진리의 길은 혼자서 간다. 깨달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스승이나 동료가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깨닫는 것은 홀로 깨닫는 ㅅ것이다. 마치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다.
진리의 길을 가는 수행자는 고독하다. 수행자가 외롭다면 그는 더 이상 수행자는 아니다. 외롭다는 것은 타인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고독한 것은 내면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것이다.
오로지 다른 것들과의 관계속에서
이 세계는 어느 것 하나 홀로 되어 있는 것이 없다. 누군가 이것은 땅이라고 했을 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땅은 땅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땅은 땅의 실체가 없으므로 오로지 다른 것들과의 관계속에서 경험된다.”(KPTS본 맛지마니까야 867번 각주)라는 뜻이다.
땅을 땅으로 보는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창조주를 창조주로 보는 것과 같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보는 것과 같다. 그런 창조주나 하느님은 없다. 왜 그런가? 어느 것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든지 다른 것들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한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그래서연기송을 보면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Iti imasmiṃ sati idaṃ hoti,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S12.21)라고 했다. 이와 같은 연기법은 상호의존성과 조건발생성을 동시에 만족한다.
땅이든지 물이든지 불이든지 바람이든지 경험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창조주도 하느님도 경험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관계와 관계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고 했다. 이는 연기의 상호의존을 말한다. 그런데 연기는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고 했다. 이는 연기의 조건발생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어느 것 하나도 나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나라는 생각은 망상
나라는 생각은 망상이다. 나홀로 있다는 것도 망상이다. 나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나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속에서만 존재한다. 내가가 있으면 상대방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연기의 관계속에서만 존재한다. 나는 연기의 그물속에서 존재한다.
수행자라면 연기의 그물을 끊어 버려야 한다. 알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유아의 세계에서 무아의 세계가 되었을 때 대자유를 맛볼 것이다.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나홀로 존재할 수 없지만 고독한 수행자는 내면의 의지하여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것이다.
2022-05-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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