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땅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4강

담마다사 이병욱 2022. 5. 1. 09:32

땅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4강

 

 

지금 시각 아침 656분이다. 상쾌한 아침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51일이다. 흔히 노동절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근로자의 날이다. 노동절을 노동절이라고 부르는 때는 언제나 될까?

 

오늘 새벽 일찍 일어났다. 오늘 일요일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일순위로 어제 유튜브 비공개동영상으로 시청한 청년붓다 4강에 대한 후기를 쓰는 것이다. 후기를 쓰고 나서 밀린 일을 하기로 했다. 생업과 관련된 인쇄회로기판 설계를 말한다.

 

아침 길로 나갔다. 고미숙 선생 강연을 들어보면 눈만 뜨면, 밥만 먹으면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나가서 친구를 만나라고 했다. 이 말에 무척 공감했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씻고 밥 먹으면 일터로 달려 간다.

 

일터는 일인사업자에게 있어서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동시에 글을 쓰는 공간이기도 하고 수행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작은 임대사무실 한켠에 좌선 공간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오늘 아침 일터로 갈 때 경을 암송했다. 보름전에 외운 빠다나경을 말한다. 숫따니빠따 큰 법문의 품에 있는 두 번째 경이다. 우리말로는 정진의 경’(Sn.3.2)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빠나다경을 66일에 걸쳐 외웠다. 무려 게송이 25개나 된다. 이틀에 한 게송씩 외운 셈이다. 그것도 빠알리 원문으로 외웠다. 우리말로 음역하여 외운 것이다. 글자수는 천자가 넘는 것 같다. 아마 천수경 정도 되는 글자수가 되는 것 같다.

 

고미숙 선생 강연에 따르면 남산에 있는 청년들은 무언가를 외운다고 한다. 남산 산책길에서 각자 무언가를 주절주절 외운다는 것이다. 이런 말에 공감한다. 나 역시 길을 걸을 때 경 외운 것을 암송한다.

 

암송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속으로 하는 방법이 있고 입으로 하는 방법이 있다. 집과 같은 조용한 곳에서는 마음으로 암송한다. 그러나 걸을 때는 입으로 중얼중얼거리면서 암송한다.

 

자신이 내는 소리를 자신이 들으면서 암송하면 잡념이 치고 들어오지 않는다. 오늘 일터로 가면서 빠다나경 25게송을 암송하는데 걸린 시간은 22분 가량 걸렸다.안양이마트에서 안양천을 건너서 메가트리아 아파트 단지를 끼고 쌍개울쪽으로 해서 주접 지하차도로 해서 오피스텔에 이르는 길이다. 걸어서 25분가량 걸린다.

 

후기를 쓸 것에 대하여

 

마침내 자리에 앉았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먼저 후기를 쓰는 것이다. 하얀 여백을 대한다. 엠에스워드(MS Word) 여백을 대할 때 늘 긴장된다. 하얀 여백을 어떻게 채워갈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자판을 두들기다 보면 손가락 가는 대로 흘러 가는 것 같다.

 

어제 밤 청년붓다 5을 시청했다. 지난 금요일날에는 전재성 선생의 금요니까야모임이 겹쳤다. 이런 이유로 줌모임에 들어가지 못했다. 담당자 문빈 님에게 동영상 주소를 메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유료 신청자들에게만 공개되는 비공개 유튜브 동영상을 말한다.

 

 

늘 그런 것처럼 후기를 염두에 둔 시청이다. 자연스럽게 메모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메모해 두면 건지는 것이 많다. 강연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그렇다. 텍스트에 있는 이야기보다 자신의 경험을 곁들인 이야기가 와 닿는다.

 

비공개 유튜브 동영상 시청이 끝난 후 메모한 것을 복기 하듯이 읽어 보았다. 후기 쓸 때 참조하기 위한 것이다. 특별히 강조해야 할 것은 노랑메모리칠을 하고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오늘 새벽 오늘 후기를 쓸 것에 대하여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하여 나름대로 마음의 시나리오를 구성해 보았다. 고미숙 선생이 말한 것을 모두 다 쓸 수 없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 몇 가지만 써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진에 대한 것이다.

 

욕망으로 세팅 된 존재

 

이번 청년붓다 4강은 부처님의 성도에 대한 것이다. 보살이 정각을 이루기 직전에 마라(악마)와 싸워서 이긴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는 다름아닌 보살의 정진에 대한 것이다. 그것도 피를 말리는 정진을 말한다.

 

마왕(마라)은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갖가지 공작을 펼친다. 그 중에 하나가 자신의 딸들을 활용하여 미인계를 쓰는 것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인 성욕을 자극하여 파멸하게 하는 것이다.

 

누구도 원초적인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의 경지이면 모를까 성적으로 유혹하면 성인군자라도 넘어가기 쉽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성적욕망이 일어나도록 세팅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고미숙 선생의 말에 동의한다. 왜 그런가? 우리 인간은 욕계중생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중생은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다름 아닌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왜 오취온적 존재인가? 이는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도 내것이고, 느낌도 내것이고, 지각도 내 것이고, 의도도 내것이고, 마음도 내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자아에 집착된 존재는 기본적으로 욕망의 덩어리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존재를 유지하게 하는 식욕과 성욕은 기본적으로 세팅 되어 있는 것이다.

 

죽어도 좋아!”

 

욕망의 존재는 욕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생은 탐, , 치의 존재가 된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탐, 무진, 무치를 설했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역류도(逆流道)를 추구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크게 웃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것이다. 반대로 가는 역류도이기 때문에 저항이 많다. 마왕이 성도를 방해하는 것도 역류도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 때 그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것도 거꾸로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역류도를 설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곳,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즐겁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말하네.”(35.136)라고 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그것들은 하늘사람과 인간에서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들이 소멸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 여기네.”라고 게송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이 즐거움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불만적이다. 괴로워서 괴롭기도 하지만 만족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도 괴로운 것이다. 즐거우나 괴로우나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아야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S36.5)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감각적인 즐거움이 목숨을 건다. 어느 정도일까? 노인의 성을 다른 영화 제목처럼 죽어도 좋아!”라는 말이 잘 표현해 준다.

 

주는 자와 소유하는 자

 

고미숙 선생 강연은 재미있다. 어느 것을 들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한다. 특히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그렇다. 듣고 본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서 말할 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이야기 중의 하나가 신에 대한 것이다.

 

신은 빠알리어로 데바(deva)라고 한다. 그런데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데바는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보시를 말한다. 보시를 잘 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천상의 신은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이는 욕계천상과 다른 것이다. 선정수행을 하여 화생한 색계천신을 말한다. 경전에서는 그들은 거기서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 기쁨을 먹고 지내며,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랜 세월을 산다.”(D27.6)라고 묘사되어 있다.

 

주는 자는 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천신은 보시를 많이 했기 때문에 몸에서 빛이 나며 오랜 세월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천신도 천신 나름이다. 선정수행을 한 자가 색계 천신으로 태어나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서 하늘을 날아 다닐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기쁨을 먹고 살기 때문에 음식이 필요 없다. 그래서 내장기관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남자와 여자의 성의 구별도 없다. 무성 또는 중성의 존재인 것이다. 선정상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색계 천신일 것이다.

 

주는 자는 데바만 있을까?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해와 달도 주는 자라고 했다. 왜 그런가? 빛을 주기 때문이다. 해와 달만 주는 자일까? 고미숙 선생은 여행자도 주는 자라고 했다.

 

 

여행자는 어딘가에서 하루 밤 묵어야 한다. 그런데 옛날에는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개념으로 생각하면 남지 않는 장사가 된다. 그러나 여행자는 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보이다. 여행을 하면서 얻은 정보를 주기 때문에 공짜로 재워주고 먹여 준다는 것이다.

 

고미숙 선생은 주는 자와 소유하는 자를 대비해서 설명했다. 부처님이 보살로 살 때 주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반면 마왕은 소유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는 자는 빛이 되어 빛나고 소유하는 자는 덩어리가 되어서 열난다고 했다.

 

하늘나라에 태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끊임없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부처님도 보살로 살 때 끊임없이 주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주었다. 이는 십바라밀을 보면 알 수 있다.

 

십바라밀 중에서 보시바라밀이 있다. 자타카에서는 보시바라밀(dāna-pāramī)에 대하여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을 기부하는 것은 일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손이나 발 등의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우월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목숨을 보시하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다.(Jat.I.73)라고 설명되어 있다. 자신의 목숨을 보시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초월의 길임을 알 수 있다.

 

마왕과 한판 승부했는데

 

청년붓다 4강은 부처님의 성도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마왕과 한판 승부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보살의 성도를 방해하기 위하여 딸로 하여금 유혹하게 하는 등 갖가지 공작을 펼쳤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는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다.

 

마왕은 자신의 군대를 동원했다. 이를 마군이라고 한다. 빠알리어로는 마라세나(mārasenā)이다. 이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가 전승되어 왔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빠다나경이다. 이번에 모두 다 외운 경을 말한다.

 

빠다나경은 보살의 목숨을 건 정진에 대한 것이다. 마라와 한판 싸움에 대한 것으로 읽어 보면 마음을 다 잡을 수 있게 한다. 이런 이유로 이 경을 선정하여 25개 게송을 66일에 걸쳐 외웠다. 애써 외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암송한다. 여러 개의 게송 중에 이런 게송이 있다.

 

 

에사 문장 빠리하레

디랏뚜 이다 지비땅

상가메 메 마땅 세이요

양쩨 지베 빠지라또”(Stn.440)

 

 

빠알리 원문을 우리말로 음역한 것을 외운 것이다. 이는 차라리 나는 문자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Stn.440)라고 번역되어 있다.

 

부처님은 싸워서 죽겠다고 했다. 마치 80년 서울의 봄 때 대학생들이 데모할 때 훌라송을 보는 것 같다. 훌라송에서는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라는 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살은 목숨을 건 정진을 했다. 마라가 성도를 방해했지만 성도를 하기 전에는 자리에 일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를 피를 말리는 정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와 같은 용맹정진에 대하여 빠다나경에서는 이러한 정진에서 나오는 바람은 흐르는 강물조처 마르게 할 것이다. 이처럼 용맹을 기울이는 나에게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Stn.433)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땅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보살은 마라와 목숨을 건 한판승부를 했다. 마침내 보살이 이겼다. 정각을 이루어 마침내 부처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승리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항마촉지인으로 설명했다.

 

석굴암에 있는 불상의 수인은 항마촉지인 모양이다. 오른쪽 손의 손가락이 아래로 향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땅은 알고 있다라는 말로 설명했다.

 

몇달전 TV에서 영화 미드웨이(Midway, 2019)를 보았다. 영화가 끝날 때 바다는 알고 있다.”라는 자막이 떴다. 해전은 오래 전에 있었고 바다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 그 일을 바다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살이 목숨을 건 보살행을 한 것은 땅은 알고 있었다.

 

부처님은 성도하기 전에 무려 사아승지겁하고도 십만겁동안 십바라밀을 닦았다. 목숨을 건 바라밀행이기 때문에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에서는 바라밀을 뜻하는 빠라미에 대하여 초월의 길로 번역했다.

 

사아승지십만겁동안 초월의 길을 갔을 때 피를 대지에 많이 뿌렸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윤회하는 중생들이 흘린 피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윤회하고 윤회하면서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라고 했다.

 

보살은 초월의 길을 가면서 땀과 피를 대지에 많이 뿌렸을 것이다. 모아 놓으면 수미산보다 더 높을지 모른다. 이 모든 사실을 땅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땅을 가리키며 이 대지가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으로 승부는 끝났다. 보살이 이긴 것이다.

 

마라가 졌다. 그래서일까 빠다나경 마지막 게송을 보면 슬픔에 넘친 나머지 옆구리에서 비파를 떨어뜨리고, 그만 그 야차는 낙심하여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Stn.449)라고 표현되어 있다. 칠년 동안 쫓아다닌 마라가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부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미숙 선생 강연에서 공감한 것이 많다. 먼저 강연을 시작할 때 아트만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에 공감했다. 그것은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힌두교입니다.”라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진짜 나, 참나와 같은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힌두교에서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고미숙 선생은 질의응답시간에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공부를 말했다.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 그분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불교가 선불교 전통이다 보니 부처님의 일생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스승이 깨달음을 이루는 과정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부처님 생애를 통한 명상 주제를 잡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따끔한 충고라고 아니할 수 없다.

 

불교에 입문하면 누구나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한다. 부처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이다. 그때 당시 조계종 종립학교에 배치되었다. 그때가 1973년이다. 소위 뺑뺑이로 들어 간 것이다. 그때 당시 종로구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을 말한다.

 

동대부중에서 부처님의 일생을 처음으로 배웠다. 중학교 1학년 불교시간 교재가 부처님 일생이었던 것이다. 처음 접하는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흰 천에 물감이 베어 들어가듯이 쏙쏙 들어왔다. 그때 배운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가 평생 가는 것 같다.

 

한국불교에는 부처님이 없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한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뒷방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법신불이나 아미타불 등 다른 부처님이 앉아 있다. 이러다 보니 스님들도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 같다. 당연히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을 했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부처님 그분을 다시 알게 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18년전인 2004년에 불교교양대학에 들어감으로서 다시 알게 되었다. 중학교때 불교를 접한지 수십년만의 일이다. 그러나 대승불교 전통이 강한 한국불교 현실에서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그분이 어떤 말을 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초기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주로 니까야와 같은 경전을 보았다. 그리고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도 보았다. 현재는 전재성 선생의 금요니까야모임에서 공부하고 있다. 5년된 모임이다.

 

큰스님 보다 법문을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면 접할수록 넓고도 깊다. 마치 큰 바다와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바다이다. 모든 니까야 경전을 갖추어 놓았다. 틈만 나면 읽는다. 새기고 싶은 것은 글로서 남긴다. 새기고 싶은 가르침은 외운다. 그래서 경전을 읽고, 경전을 근거로 하여 쓰고, 중요 경을 외우고 암송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바다에 퐁당 빠져서 노닐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 넓고도 깊어서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다 알 수 없다.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진리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고미숙 선생의 강연을 듣고 후기를 쓰는 것도 배우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고미숙 선생의 강연에 대하여 어떤 이는 질의응답시간에 큰스님 보다 법문을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자금 시각 오전 9시 정각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지 2시간 만에 청년붓다 4강 후기를 작성했다. 모두 7페이지 분량에 달한다. 글을 썼으니 공유해야 한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린다. 그리고 67명이 있는 청년붓다 카톡 커뮤니티에도 올린다. 카톡에서는 나의 글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자영업자의 잡문에 대한 과찬이다.

 

 

2022-05-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