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행을 하는가?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3강
고미숙 선생은 이 시대의 국민멘토라고 본다. 왜 그런가? 이공(20)부터 팔공(80)까지 선생의 강연을 모두 좋아하기 때문이다. 선생의 강연에 빠져 들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이번 청년붓다 3강도 그랬다.
청년붓다 3강을 인터넷으로 들었다. 유튜브로 본 것이다. 보았다기 보다는 ‘들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마치 정지화면 같은, 마치 아나운서가 말하는 것 같은 화면은 큰 의미가 없다.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진짜이다.
본래 매주 금요일 저녁 7시에 들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주에 듣지 못했다. 오미크론에 확진되어서 들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담당자에게 유튜브동영상을 요청했다. 청년붓다 강연 신청자에게는 서비스가 제공된다. 단 한번 밖에 기회가 없다. 그 다음에 들어 가면 막혀 있다.
청년붓다 온라인커뮤니티가 있다. 단체카톡방 청년붓다를 말한다. 유료강연 신청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현재 68명이 들어와 있다. 이들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 그것은 후기를 쓰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8강을 모두 완주하겠다고 천명했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하다못해 점심약속도 약속이다. 하물며 온라인 대중에게 천명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오늘 아침 일찍 사무실로 나와서 자판을 두드린다.
커피타임 가졌으면
실시간 줌모임에 참석 못해도 이렇게 비공개 동영상으로 제공되는 시스템에 감사드린다. 특히 단체카톡방에서 편의를 제공하는 문빈 님에게 감사드린다. 그러나 당당자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이공(20)인지 삼공(30)인지 사공(40)인지 어느 공인지 모른다.
카톡방에서 실명 쓰는 사람은 많지 않고 얼굴을 공개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렇게 육공(60)이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며 글을 쓴다. 그것도 속내를 다 보이면서 쓴다. 청년붓다 8강까지 끝나면 카톡방 선생들과 함께 커피타임 가졌으면 좋겠다. 물론 고미숙 선생도 참석했으면 좋겠다.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한다.
고미숙 선생이 말한 그물은?
고미숙 선생의 이번 청년붓다 3강은 어떤 것일까? 강연을 들어 보니 너무나 분명하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의 행적에 대한 것이다. 출가에서 정각을 이루기까지 6년의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에 대하여 흔히 고행의 시기라고 말한다.
청년붓다 3강은 주로 고행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 한편 3강의 제목을 연상케 하는 말을 했다. 그것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Stn.71)이라는 말이다. 숫따니빠따 ‘무소의 뿔의 경’(Sn.1.3)에 실려 있는 37번 게송을 말한다.
고미숙 선생은 강연을 시작할 때 그물에 대하여 꽤 길게 이야기했다. 그런 그물은 어떤 것을 상징할까?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나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1강을 들었을 때 그물에 대하여 디가나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을 예를 들어서 62견에 대한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20가지 유신견(有身見)에 대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고미숙 선생이 말한 보살의 그물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그물, 아내의 그물, 자식의 그물, 스승의 그물을 말한다. 보살의 출가는 가족의 그물로부터 탈출이었고, 또한 스승의 그물로부터 탈출이었다.
애정의 족쇄에 묶여서 윤회의 감옥에
보살에게는 여러가지 그물이 있었다. 어느 그물이 가장 찢기가 어려웠을까?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단연 ‘자식’에 대한 애착이다. 라훌라가 태어났을 때 장애를 뜻하는 말을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라훌라가 장애 또는 족쇄를 뜻하는 말도 되지만 ‘그물’도 된다는 말에 놀랐다. 고미숙 선생의 사고의 폭이 넓은 것이다.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고리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 (Dhp.345)
법구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죄수를 묶어 놓는 칼이 있다. 쇠붙이로 된 것이다. 사극을 보면 목에 족쇄처럼 차고 있는 쇠붙이를 연상하면 된다. 그러나 칼은 제거될 수 있다. 칼은 칼로서 끊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떤 강한 족쇄라도 끊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끊어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자식은 부모를 버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반대로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 없다고 했다.
부모는 왜 자식을 버릴 수 없을까? 자식은 쇠붙이 보다 더 강한 족쇄이기 때문이다. 이를 주석에서는 “처자식에 대한 갈애는 번뇌로 이루어진 족쇄로서 강한 족쇄라고 불린다.”(DhpA.IV.56)라고 했다. 일반사람들은 애정의 족쇄에 묶여서 윤회의 감옥에 갇혀 산다.
유산을 달라는 라훌라에게
부처님은 비정한 사람이었을까? 처자식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듯이 달아난 것은 아닐까? 누구나 이런 의문을 품을 것이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질문도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이 출가한 것은 처자식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출가하지 않고 윤회하는 삶속에서 살았다면 나름대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출가함으로 더 큰 선물을 주고자 했다. 이는 출가한지 6년 후에 귀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고향으로 갔다. 야반도주하듯이 떠났지만 금의환향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를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는 일곱살 먹은 라훌라가 부처님에게 유산을 요구한 사건에서도 알 수 있다.
야소다라 왕비는 부처님이 까삘라밧투를 방문했을 때 라훌라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왕비는 “라훌라야, 이 분이 아버지이다. 유산을 달라고 해라.”(Vin.I.82)라고 말했다. 어떤 유산일까? 아마 그것은 왕권에 대한 유산일 것이다. 이에 라훌라는 부처님을 찾아가서 “수행자여, 저에게 유산을 주십시오. 수행자여, 저에게 유산을 주십시오.”(Vin.I.82)라며 말했다.
라훌라는 부처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유산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사리뿟따를 시켜서라훌라를 출가시켜 버렸다. 부처님은 왜 그렇게 했을까? 법구경 주석에 따르면 “이 젊은이가 찾는 부계의 유산은 윤회에 얽혀들어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보라, 나는 내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일곱가지 고귀한 유산을 베풀것이다. 나는 그를 세상을 뛰어넘는 상속의 주인으로 만들리라.”(DhpA.I.115-125)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을 출가시켰다. 그것은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윤회하는 삶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라훌라와 야소다라 왕비, 그리고 아버지 숫도다나 왕에 대한 진정한 유산일 것이다.
발 씻을 물에 대한 이야기
고미숙 선생은 부처님이 라훌라를 가르치는 것도 소개했다. 발 씻을 물에 대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라훌라에게 발 씻은 물을 먹으라는 것이다. 발씻은 물은 더러워진 마음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갈등이 생긴다. 라훌라 교계에서 발씻은 물에 대한 이야기를 니까야에서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니까야에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잘못된 설명이라고 한다면 비난이 된다. 아마 니까야가 아닌 경전이나 가르침에서 가져온 것인지 모른다.
발 씻은 물을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출처가 있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어느 스님의 법문에서 유사한 내용을 발견했다. 그러나 출처가 보이지 않는다. 다시 ‘어떻게 더러운 발을 씻은 더러운 물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키워드로 검색해 보았다. 현대불교에서 ‘라훌라교계경’이라는 출처를 발견했다. 그러나 맛지마니까야 ‘암발랏티까에서 라훌라를 가르친 경’(M61)에서는 발 씻은 물을 먹으라고 한 말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느 경전에 실려 있는 말일까? 검색해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 한역아함경일 것으로 추측된다.
니까야에 라훌라를 가르치는 여러 개의 경이 있다. 아쉽게도 세수대야의 발씻은 물을 먹으라고 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발 씻을 세수대야를 엎어 버렸다는 이야기는 있다. 이는 부처님이 거짓말을 하는 라훌라에게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에게 수행자의 덕성은 이와 같이 뒤집혀 없어진다.”(M61)라고 말한 것이다.
라훌라 교계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 전재성 선생에게서 들었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들은 것이다. 그때 전재성 선생은 “부처님은 요즘으로 말하면 꼰대가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만일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라며 명령조로 말했다면 꼰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라훌라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의 이벤트를 생각해 냈다. 이는 세수대야를 엎어 버리는 퍼포먼스를 말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데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는 어떠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라도 못할 바가 없다.”(M61)라며 따끔하게 충고했다.
본의 아니게 구업짓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비난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견해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니까야가 아닌 다른 경전에서 근거한 것일지라도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미숙 선생이 강연하는 원고는 니까야를 포함하기도 하고 니까야가 아닌 경전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분명한 사실이 있다. 니까야에서는 ‘발 씻은 물을 마셔라’는 표현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 몽뚱아리도 중생입니다.”
고미숙 선생이 말한 것을 모두 다 글로 쓸 수 없다. 선생의 강연을 빼 놓지 않고 노트했는데 무려 20페이지가 되었다. 심지어 질의응답 다섯 차례에 대한 것도 기록해 두었다. 이를 어떻게 다 글로 쓸 수 있을까? 가장 인상적인 것 위주로 몇 개 써야 한다.
고미숙 선생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전혀 생각치 못했던 말을 종종 듣는다. 고미숙 선생이 아니면 표현하기 힘든 말도 많다. 이런 맛에 강연을 듣는지 모른다. 그래서 열심히 메모해 둔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이 몽뚱아리도 중생입니다.”말이다.
자신의 몸도 중생이라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중생이라는 말은 타인만 지칭하는 것일 줄 알았는데 자신도 중생이라니! 어떻게 이런 발상을 했을까? 그리고 왜 나는 이제까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고미숙 선생의 3강에서 최대 수확이라고 본다.
고미숙 선생이 몸뚱아리도 중생이라고 한 것은 세 번째 질의응답에서 말한 것이다. 중생에는 자신도 포함되는 것이라고 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을 왜 이제까지 몰랐을까? 자애에 대한 무수한 글쓰기를 하면서 자애는 나자신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자신을 중생이라고 한번도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생은 다른 사람, 일반사람을 지칭하는 말인 줄 알았다.
몸뚱아리가 중생이라고 말한 것은 자비심에 대한 것이다. 이는 본강에서 고미숙 선생이 고행에 대한 설명한 것에서 확인된다. 이는 무의미한 고행, 고행을 위한 고행에 대한 경계의 말이다.
고행하는 것에서 쾌감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익스트림 스포츠가 대표적이다. 마라톤의 경우 일정 한계를 넘어서면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학대해서 쾌감을 얻는 다면 이는 폭력이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보살행을 말한다. 온 중생에게 자비심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몸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타인에게 이익 되는 삶을 산다면, 이는 자신만을 이익 되게 하는 삶 만도 못한 것이다. 그래서 고미숙 선생은 “온 중생에 대한 자비심은 자신도 포함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찬탄하는 것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의 말에서 또 하나 감명받은 말이 있다. 그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찬탄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라는 말이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고미숙 선생은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고 선정 체험도 없다고 강연때마다 누차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어 보니 아비담마 논장을 마스터한 느낌이 든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것이 왜 탐욕일까? 그것은 갈애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탐욕은 불선심(不善心)이다.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어느 수행승이 무심코 가던 길을 멈추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모두 의도가 개입된 것이다. 특히 하늘의 구름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면 탐욕이 마음이 된 것이다. 쳐다보고자 하는 갈애가 생겼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을 때 어떤 수행승이 무심코 쳐다보았다면 이는 탐욕이 된다. 왜 그런가? 그 순간에 사띠를 놓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탐욕은 불선법이고 사띠는 선법이다.
에스엔에스(SNS)에서 어느 스님은 아름다운 꽃을 자주 올린다. 또 어떤 스님은 개나 고양이와 같은 축생을 자주 올린다. 무엇이든지 반복하면 집착이 되고 업이 된다. 이는 다름 아닌 갈애에 기반하는 것이 된다.
십이연기에 따라면 갈애가 집착이 되고, 집착이 업이 된다. 예쁜 꽃도 자주 보면 집착이 된다. 더구나 향기를 맡기 위하여 코까지 가까이 댔다면 ‘향기도둑’이 될 것이다.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불투도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고미숙 선생은 자연풍광에 감탄하는 것에 대하여 탐욕이라고 했고 더 나아가 ‘자아에 대한 집착’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 선생은 이어지는 말에서 “자연을 인격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연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 그 느낌과 감정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를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 (attavādūpādānaṃ)’이라고 말한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수행자는 하늘을 함부로 쳐다볼 수도 없다. 수행자는 함부로 자연풍광을 경탄할 수도 없다. 수행자는 함부로 먹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알아차림 하면 문제가 없다. 하늘을 쳐다볼 때 무심코 쳐다보면 허물이 되지만 의도를 알고 쳐다 보면 업이 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경탄할 수 있지만 그 순간 사띠한다면 탐욕이 되지 않는다. 고미숙 선생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찬탄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라며 엄청난 말을 했다.
고행을 통해서 환락의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청년붓다 3강은 고행에 대한 것이다. 출가해서 정각을 이루기까지 6년동안 고행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청년붓다에 대하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게송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다름 아닌 고독한 수행자를 말한다.
외로움과 고독은 다른 것이다. 누군가 외롭다고 말하면 타인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고독은 자신의 내면에 의지하는 것이다. 고행자로서 청년붓다는 마치 외뿔을 가진 무소처럼 오로지 앞만 보고서 갔다. 홀로 가는 고독한 수행자를 연상케 한다.
고독한 수행자로서 보살은 극심한 고행을 했다. 이에 대한 리얼한 설명을 고행자상과 함께 설명했다. 그렇다면 보살은 왜 그토록 극심한 고행을 했을까?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놀라운 말을 한다. 그것은 “고행을 통해서 환락의 흔적을 지우는데 고행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죄를 지은 자는 고행을 통해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 영화에서도 어떤 이 살인을 했는데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걷고 또 걷는 장면이 있다. 자신의 몸을 학대에서 죄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고행한 것은 깨달음의 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무익한 것임을 알았지만 적어도 출가하기 전의 환락에 대한 업은 씻어 낼 수 있었다고 본다. 이런 것으로 본다면 보살의 고행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끝은 어디일까?
고행 중에서 가장 힘든 고행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먹는 것을 예로 들었다. 의식주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먹는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늘 먹는 것에서 적당량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루 한끼만 먹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런 말은 모두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세 가지만 지키면 해탈의 조건을 갖춘다고 했다. 그 세 가지란 무엇일까?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되는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S35.239)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원리만 지키면 해탈이 가까이 있음을 말한다.
살면서 먹는 문제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 있을까? 부처님은 음식절제를 말했지만 자본주의는 정반대로 가는 것 같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폭식하는 듯한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누구나 한번쯤 겪었고 겪고 있는 삶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고행과도 관련이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것 같다. 모두 먹는 선수가 되는 것 같다.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것 같다. 먹는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렸을 때부터 고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대학에게 가기 위해서 고행과 같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학에 가면 취업 준비를 한다. 여기서도 끝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아파트를 장만해야 한다. 노후대책도 세워 놓아야 한다.
대체 자본주의의 끝은 어디일까?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려면 고행의 연속이다. 죽어서나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은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나이든 노인들은 이제 요양원에 가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라고 말했다.
왜 고행을 하는가?
고미숙 선생은 워커홀릭이 되는 것에 대하여 고생을 사서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고행을 즐기는 것과 같다는 말도 된다. 이렇게 고행해서 남는 것이 무엇일까? 그래서 고미숙 선생은 질문한다. “왜 고행을 하는가?”라고.
고미숙 선생은 질문을 던졌다. 고행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니까야 각주 주석에서 본 구절이 떠 올랐다. 그것은 네 가지 고행에 대한 것이다. 그 네 가지는 어떤 것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고행에는 1)감관의 수호, 2)두타행, 3)정진, 4)극단적 고행이 있다. 이 가운데 극단적 고행은 번뇌를 제거시키지 못한다.”(Srp.I.94)
네 가지 고행에서 ‘극단적 고행(dukkarakārikā)’은 번뇌를 제거시키지 못한다고 했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정각을 이루기까지 목숨을 건 6년 간의 고행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 가지 고행은 번뇌를 제거시킬 수 있는 고행이 됨을 말한다.
불교에서 감각기관의 수호가 고행이고, 정진하는 것이 고행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놀랍다. 이런 가르침은 니까야 주석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래서 해탈에 도움이 되는 세 가지 원리, 즉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S35.239)이 있다고 했는데 이 세 가지를 지키는 것도 고행이 될 것이다.
하루 한끼 먹는 것은
고미숙 선생은 고행과 관련하여 하루 한끼 먹는 것에 대해서도 말했다. 극단적 고행에서는 하루 한끼가 아니라 보름에 한끼 먹는 것이다. 피골이 상접된 고행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고행은 번뇌의 소멸과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하루 한끼 먹는 것은 부처님도 장려했다. 오후불식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오후에 먹지 않는 것의 장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하루 한 끼의 식사로 산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하루 한 끼의 식사로 살면서 병이 없고 건강하고 상쾌하고 힘이 있고 안온한 것을 즐긴다. 수행승들이여, 오라. 여기 그대들도 하루 한 끼 식사를 하길 바란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도 하루 한 끼의 식사로 살면서 병이 없고 건강하고 상쾌하고 힘이 있고 안온한 것을 즐기기 바란다.”(M65)
오후불식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율장 빠띠목카에서는 수행승은 오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식사를 금지했다. 실제로 미얀마 수행센터에서는 오후에 먹지 않는다. 주스 등 타서 마시면 허물이 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뜰 때 비로소 식사를 할 수 있다. 이렇게 오후불식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 있어서 고행이다. 번뇌의 소멸과 해탈에 도움이 되는 고행인 것이다.
고미숙 선생의 내공은
고미숙 선생에 대한 강연을 듣고 글을 쓰다 보면 한없이 길어진다. 원고에는 없는 즉흥적인 말에 핵심이 있다. 이런 말은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둔다. 그 말을 근거로 해서 글이 하나 나올 수 있다.
이번 청년붓다 3강은 부처님이 출가하여 정각을 이루기전까 6년동안 고행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독한 수행자의 고행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고행도 고행 나름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번뇌의 소멸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극단적인 고행은 피하라고 했다. 그러나 고미숙 선생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극단적 고행도 나름대로 성과가 있다. 과거 환락의 업을 씻어 내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열정적으로 썼다. 고미숙 선생의 이야기에 대하여 반박하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악의가 없는 개인적 견해로 보면 될 것 같다. 기본적으로 고미숙 선생의 이야기를 존중한다. 여기에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수많은 말이 있다. 흔히 ‘나쁜놈’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에 대하여 ‘나뿐만 아는 자’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이 말에 빵 터졌다.
다음 4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부처님의 깨달음과 관련된 것이라고 본다. 고미숙 선생이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고 수행은 해 보지 않았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내공은 불교학자에 못지 않고 수행만 전문으로 하는 스님 못지 않다. 다음 강연을 기대해 본다.
2022-04-2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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