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는 왜 젊은 나이에 출가했을까?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2강
열두살 태자는 농경제에서 벌레가 새에 먹히는 것을 보았다. 이를 보고서 무한한 연민의 마음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무 아래에 가서 선정에 들었다. 이를 초선정이라고 말한다. 선정에 든 태자는 무한한 마음의 평정을 느꼈다. 잔인한 장면을 보고서 어떻게 선정에 들어 평정의 마음이 될 수 있을까? 마치 화두처럼 다가온다.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2강을 줌으로 보았다. 이번 강연은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일어났던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붓다평전을 쓰고 있는 고미숙 선생의 원고에 있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두 시간 동안 진행된 고미숙 선생의 강연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자 노력했다. 노트하다 보니 17장이 되었다.
노트한 것을 주욱 읽어 보았다. 중요한 것은 형광메모리칠하고 더 중요한 것은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 쳤다. 경전과 관련된 것은 별도로 써넣었다. 그러다 보니 노트가 마치 학교 수업시간에 노트한 것처럼 되었다. 다음은 글로 쓰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강연후기를 말한다.
듣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버리면 남는 것이 없다. 특별히 기억남는 것 몇 개는 건질 것이다. 명사의 강연은 그냥 듣고 보낼 수 없다. 노트해 놓아야 한다. 그리고 후기로 남겨야 한다.
후기를 쓰는 과정에서 노트한 것을 한번 읽어 보아야 한다.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어느 것을 강조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자신의 생각과 경전을 근거로 후기를 작성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십년 이상 그렇게 해왔다.
고미숙 선생이 강연 도중에 질문을 던진 것이 있다. 그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부처님이 12살 때 농경제에 참석하여 어떻게 초선정에 들었는지에 대한 것과 부처님이 왜 청춘시절에 출가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태자가 고통을 공감하면서 어떻게 평정할 수 있었을까?”
고미숙 선생 강연에 따르면 부처님이 12살 되었을 때가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에 겪어 보지 못했던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농경제에 참석하여 노, 병, 사를 본 것이다. 특히 벌레가 새에 먹히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이에 나무 밑에 가서 명상했다.
고미숙 선생은 “태자가 고통을 공감하면서 어떻게 평정할 수 있었을까?”라고 물었다. 이것에 대한 답은 강연의 말미에 비추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비심이다. 모든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심지어 적대적인 원수까지 사라지게 하는 마음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비에 대한 가르침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사무량심으로 나타난다.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면 자심해탈(慈心解脫), 즉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촌장이여, 그 고귀한 제자는, 탐욕을 떠나고 성냄을 떠나고 어리석음을 떠나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서,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 세계를 가득 채웁니다.” (S42.8)
자애관에 대한 것이다. 자애수행하면 마음의 평정을 이룰 수 있다. 자애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니까야에 따르면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무한편만, 한정편만, 방향편만을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무한편만은 “일체의 뭇삶이 원한 없이, 분노 없이, 근심 없이, 안락하게 자신을 수호하기를!”(Vism.9.50)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정편만은 특정해서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을 말한다. 여자라면 “일체의 여자가 원한 없이, 분노 없이, 근심 없이, 안락하게 자신을 수호하기를!”(Vism.9.51)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방향편만은 한쪽 방향을 정해서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동쪽방향이라면 “동방의 일체의 뭇삶이 원한 없이, 분노 없이, 근심 없이, 안락하게 자신을 수호하기를!” (Vism.9.52)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자애는 일체중생에게 내는 것이다. 방법으로는 무한하게 하거나, 한정지어서 하거나, 방향지어서 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서나 자신부터 시작된다. 자신에게 먼저 자애의 마음을 내어야 하는 것이다.
자애의 의한 마음의 해탈(慈心解脫)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한다. 반대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애관 수행을 할 때는 먼저 자신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고, 그 다음에는 부모나 형제나 스승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고, 그 다음에는 나와 멀리 있는 사람이나 나와 무관하게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원한 맺힌 원수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 이렇게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선정에 들 것이라고 한다.
자애의 마음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할 때도 있다. 그것은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자애의 마음을 냈을 때이다. 왜 실패할까? 그것은 자애의 마음이 ‘애정’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어느 대신이 사랑하는 부인에 대하여 자애관 수행을 했는데 밤새도록 벽과 싸웠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자애의 마음을 내어서 해탈에 이를 수 있다. 이를 자심해탈(慈心解脫: mettācetovimutti), 즉 자애의 의한 마음의 해탈이라고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오종선일 경우 초선부터 4선까지 선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자애관으로 평정에 이를 수 없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사무량심 중의 평정(우뻭카)으로 오종선의 경우 다섯 번째 선정, 즉 평정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태자는 12살 때 농경제에 참석하여 벌레가 먹히는 것을 보고서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 나무아래에서 초선정에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한한 평정의 기쁨을 누렸다고 한다. 이는 자애, 연민, 기쁨 수행을 하면 오종선인 경우 초선에서 4선까지 드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평정을 느꼈다는 것은 아마도 초선에서 평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초선정의 정형구가 있다. 이는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든다.”(S45.8)라는 정형구를 말한다. 초선에서는 기쁨, 행복, 평정이라는 선정의 요소가 다 들어가 있다. 태자가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선정에 들었을 때 기쁨과 행복과 평정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보고
다음으로 청년출가에 대한 것이다. 태자는 16살이 되었을 때 환락의 늪에 빠졌다고 한다. 경전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제왕학을 배웠다고 한다. 무예도 연마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고미숙 선생은 종종 드라마를 예로 든다. 평소 드라마를 즐겨 보는지 모른다. 가장 불가사의한 것은 기녀가 무예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이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환락에 빠진 자가 공부도 잘하고 무예도 잘 할 수 있을까?
태자가 16살 때 세 개의 궁전에서 수많은 무희들과 환락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초기경전에도 나온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극적인 반전을 위해서 도입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출가라는 극적 반전을 말한다.
태자는 왜 출가를 한 것일까? 세 개의 쾌락의 궁전에서 환멸을 느껴서 출가한 것일까? 그런 것일수도 있다. 이는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Sn.3.1)에서 빔비사라왕에게“그런 가문에서 감각적 욕망을 구하지 않고, 왕이여, 나는 출가한 것입니다.”(Stn.42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태자가 출가한 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보았기 때문에 출가한 이유도 있다. 그래서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아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러 가는 것입니다.”(Stn.423)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고?
태자가 정말 출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12살 때 농경제 때 충격이 컸을 것이다. 태자로서 못 볼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볼 것도 보았다. 북쪽 성문에서 수행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자에게는 늘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생노병사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29살에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늦은 나이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12살 때부터 29살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태자는 환락에만 빠져 있었을까? 이와 같은 시간 텀(Term)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이 질문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태자가 12살 때부터 29살 때까지 17년간의 기간은 환락만 즐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생사에 대하여 질문했을 것이다. 마치 생, 노, 병,사에 대한 화두를 놓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고미숙 선생은 계속 묻는다. 그것은 “태자가 왜 젊은 나이에 출가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젊음’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젊은 시절은 즐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유행가에서도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라든가, “봄날은 간다”라든가 하는 노래가 있다.
젊음의 시절은 쾌락과 환락을 즐겨야 하는 시절일까? 그런 것 같다. 몇 년전의 일이다. 지하철 종로3가역에서 환승하기 위해서 복도를 걸어 갔는데 담벼락에 공익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포스터에는 놀랍게도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 삶의 교만
TV광고를 보면 젊음은 즐기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부처님 제자들은 젊은 나이에 출가한다. 부처님도 처자식을 놔두고 머리가 칠흑같이 젊었을 때 출가했다. 왜 그런 것일까?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젊음의 교만으로 설명했다.
고미숙 선생은 태자의 출가와 관련하여 하나의 게송을 소개했다. 청춘의 교만, 생의 교만에 대한 게송이다. 출처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태자는 청춘의 교만, 생의 교만을 멀리 하고 출가했다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사실의 경’(A5.57)이 있다. 경에서는 세 가지 교만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 삶의 교만을 말한다.
젊음의 교만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젊은 시절에 젊음의 교만이 있는데, 그 교만에 빠져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전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A5.57)라고 했다.
젊음을 즐기는 것으로 안다면 젊음의 교만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젊음의 교만을 어떻게 잠재워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늙음을 생각하라고 했다.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는 “나는 늙음에 종속되었으며 늙음을 벗어날 수 없다.”(A5.57)라고 숙고해야 함을 말한다.
내 나이가 60이 넘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엊그제 군대 갔다고 온 것 같은데 60이라니!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때 나도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젊음의 교만으로 가득 했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늙음이라는 것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린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본다면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적멸을 원하리”(S1.4)
상윳따니까야 ‘스쳐감의 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서는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린다.”라고 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젊은이는 중년에 도달한 자를 버리고, 젊은이와 중년은 노년에 도달한 자를 버리고, 죽을 때가 되면 젊은이와 중년과 노년이 모두 우리를 버린다.”(Srp.I.23)라고 했다.
청춘은 나를 버렸다. 중년도 나를 버렸다. 이제 노년의 초입에 있다. 언젠가 노년도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면 죽게 될 것이다. 젊음의 교만으로 가득 찬 자는 젊음이 늙음에 종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다.
교만에는 젊음의 교만만 있을까? 건강의 교만도 있다. 건강한 이 몸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건강한 상태로 유지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질병에 종속되었으며 질병을 벗어날 수 없다.”(A5.57)라며 숙고하라고 했다.
삶의 교만도 있다.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주변에서 죽는 사람들을 보고서도 나만큼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자를 말한다. 이와 같이 삶의 교만이 있는 자에게 부처님은 “나는 죽음에 종속되었으며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A5.57)라며 숙고하라고 했다.
태자는 왜 젊은 나이에 출가했을까?
태자가 출가하게 된 먼 요인은 12살 때 농경제에서 노, 병, 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화두가 되어 29살에 출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태자는 왜 젊은 나이에 출가하게 되었을까? 나이 들어서 노년에 출가해도 되지 않았을까?
젊었을 때는 즐기는 삶을 살다가 나이 들어 노년이 되었을 때 출가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는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것이다. 바라문 인생사주기가 이를 말한다. 학습기 때는 공부를 하고, 가주기 때는 가업을 물려 받아서 처자식을 부양하는 등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출가는 노년에 해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태자는 젊은 나이에 출가했다.
태자가 출가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세월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 뭇삶들은 젊을 때나 늙을 때나 죽는다는 것은 매한가지 아닐까요? '이 자는 젊을 때 죽을 것이다. 저 자는 늙을 때 죽을 것이다.'라는 표지가 어떠한 자의 손이나 발에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죽을 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출가하겠습니다.”(Jat. 509)
자타카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최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자타카가 완역되었다. 상반기 안으로 출간될 것이다. 출간에 앞서 교정작업에 참여했다. 그래서 방대한 자타카를 빠짐없이 면밀히 읽어 보았다. 인상 깊은 구절이나 게송은 새겨두고자 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이 구절이다.
구절을 보면 출가이유가 분명히 나와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보험회사에서 말하는 기대수명이 있지만 기대수명을 뿐이다.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는 한시가 급한 것이다.
출가는 인생의 풀리지 않는 의문점, 즉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미룰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자타카를 보면 출가를 눈물로 만류하는 어머니에게 “풀끝의 이슬과 같아, 해가 뜨면 떨어지듯, 사람의 목숨은 이와 같은 것이니, 어머니, 저의 출가를 말리지 마십시오.”(Jat.460)라고 말한다.
노동을 위한 학습기, 화폐를 위한 노동
고미숙 선생은 이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말을 한마디한마디 할 때마다 집중하게 만든다. 출가와 관련하여 청년들에게 묻는다. 젊어서는 즐기다가 나이 들어 출가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가치관에 대하여 우리의 생애주기에 대하여 “노동을 위한 학습기, 화폐를 위한 노동”이라고 비판한다.
한평생 직장생활하다 정년이 되면 나와야 한다. 나이 60이 다 되어서 또는 60이 넘어서 세상에 나왔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쩌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되기 쉽다. 특히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이 그럴 것이다.
나의 경우 40대 중반에 직장에서 퇴출되었다. 이것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 이후에 나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일인사업자로 살면서 글을 쓴 것이다. 이런 세월이 16년 째이다. 지금은 게송을 외우고 경을 암송하고 경전읽기 하는 것을 글쓰기와 병행하고 있다.
태자의 출가 이유 네 가지
가장 훌륭한 삶은 출가하는 것이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출가하는 것이다. 태자는 젊은 나이에 출가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네 가지로 설명했다. 그래서 “1)노병사의 고통 때문에 출가했고, 2)인간세상에 의미가 없어서 출가했고, 3)‘이것은 고뇌이다’라고 해서 출가했고, 4)고뇌를 초월하고자 해서 출가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고미숙 선생이 말한 태자의 출가이유를 보면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M82)에 실려 있는 출가이유가 떠오른다. 어떤 것인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이유가 있다.
1) 첫 번째 진리: 늙고 노쇠하고 고령이 되는 것
“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
2) 두 번째 진리: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
“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
3) 세 번째 진리: 저 세상으로 갈 때 지은 행위대로 가는 것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
4) 네 번째 진리: 이익과 욕망을 찾아 이것 저것을 탐하는 것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
부처님의 제자 랏타빨라의 출가에 대한 게송은 유명하다.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랏타빨라의 출가이유에 대한 게송을 보고서 수많은 사람들이 출가했다고 한다. 그 요지는 1) 늙고 노쇠하고 고령이 되는 것, 2)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 3) 저 세상으로 갈 때 지은 행위대로 가는 것, 4) 이익과 욕망을 찾아 이것 저것을 탐하는 것을 보고서 출가한 것이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고미숙 선생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두 번째 강연을 줌으로 들었다. 모두 52명이 접속했다. 직접 들은 사람들 20명가량 될 것이다. 모두 70여명이 들은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은 많지 않다. 젊은 사람들이 많다. 2030이 꽤 된다. 60으로 머리가 허연 남자는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고미숙 선생의 강연 특징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태자가 12살 때 농경제에서 연민의 마음이 어떻게 평정으로 마음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또한 젊은 나이에 출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마음속의 화두로 생각해야 한다. 다음 강연이 기대된다.
2022-04-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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