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후진불가 법의 수레바퀴, 고미숙선생의 청년붓다 5강

담마다사 이병욱 2022. 5. 7. 10:37

후진불가 법의 수레바퀴, 고미숙선생의 청년붓다 5강

 

 

57일 토요일 아침 하얀 여백을 대하고 있다. 현재 시각 아침 77분이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까? 일단 자판을 두드리고 보는 것이다. 대강 글의 제목과 마음속의 시나리오는 정해져 있지만 써 보아야 안다.

 

청년붓다 5

 

어제 56일 저녁 줌으로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5강을 들었다. 유료 신청자에 한해서 허용되는 공부모임이다. 이번에 두 번째로 줌모임에 참가했다. 이전 두 번 모임 때는 다른 행사가 있어서 듣지 못했고 또 오미크론에 확진 되어서 듣지 못했다. 나중에 담당이 이메일로 비공개 유튜브 동영상 주소를 알려 주어서 들었다.

 

 

줌으로 들은 것을 메모했다. 모두 13페이지가 된다. 후기를 쓰기 위해서는 메모해 두어야 한다. 두 시간 동안 말한 것을 거의 받아 적긴 했지만 이를 글로 표현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

 

 

메모한 것을 다시 읽어 보았다. 한번 듣는 것으로 그쳤다면 많은 것을 놓쳤을 것 같다. 원고지에 없는 말을 한 것이 고미숙 선생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인 것 같다. 그런 말은 새겨야 한다. 노랑형광메모리펜으로 칠하고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와 별표시를 해 놓았다.

 

청년의 파토스

 

고미숙 선생은 이번 강연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메모한 것을 보니 청년이라는 말과 파토스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 청년과 관련해서는 초전법륜경보다 청년의 활력이 느껴지는 것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초전법륜경에 청년의 파토스가 있다는 말이다.

 

고미숙 선생은 청년의 파토스가 중요하다고 했다. 대체 파토스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파토스에 대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파토스(pathos)청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을 나타낸다.”라고 했다. 또한 파토스는 수사학, 문학, 영화 그리고 서사적 예술 장르에서 사용했던 의사소통 기교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파토스는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파토스는 인간의 감성과 감정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이성을 뜻하는 로고스와는 반대적 개념이 된다. 그런데 고미숙 선생은 청년과 파토스를 연결하여 청년의 파토스가 중요하다고 했다. 더구나 부처님의 초전법륜에 대하여 청년의 활력이 넘쳐 난다고 했는데, 이는 부처님에게서 청년의 활력이 넘쳐남을 말한다.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강연은 파토스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청년 부처님의 활력에 대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이 든 이미지의 부처님이나 어른 부처님의 이미지가 아니다. 깨달음을 위한 청년의 몸부림과 고뇌, 그리고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전법하는 활력 넘치는 이공삼공(20-30)의 부처님을 말한다.

 

 

사제관계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청년붓다 5강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쏟아 냈다. 기억하고 싶은 내용이 많다. 그 중에 사제관계에 대한 것이다. 스승과 제자관계는 애착의 가족관계와 다르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애착관계가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 스승에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면 떠날 수 있다고 했다.

 

부처님은 출가해서 여려 스승을 찾아 다녔다. 알랄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자 과감히 뿌리치고 떠났다. 아마 이런 것도 청년의 파토스와 관련 있을 것이다.

 

마음의 향상과 성장을 위한 삶에서 스승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스승이 없다. 또한 친구도 없는 사람들도 많다. 이와 같이 스승도 없고 도반도 없는 삶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좀비와 같은 삶이라고 했다.

 

종종 좀비 영화를 접한다. 요즘에는 한국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좀비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 자기자신만 아는 사람, 그리고 연대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누군가 나홀로 고립되어 산다면 좀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미숙 선생은 스승과 도반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스승과 제자사이의관계는 우정과 지성임을 말한다. 또한 가족에 대한 애착에 묶여 있는 사람은 안타깝다고 했다. 가족간의 애착관계는 원초적인 것이지만 공동체에서 유대관계는 그것을 뛰어넘는 것으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렬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고미숙 선생은 깨공 청년들과 감이당 청년들에게 강렬한 유대관계를 느낍니다.”라고 말했다.

 

하느님도 악마의 손아귀에

 

이번 5강은 초전법륜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보드가야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자신의 깨달음이 맞는 것인지 증명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여전히 부처님 행보를 방해하는 자가 있다. 마라(惡魔) 빠삐만을 말한다.

 

악마는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했다. 이번에는 전법을 방해하고자 한다. 그래서 법을 전하지 말고 그대로 열반에 들으라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다. 디가니까야에서는 지금 완전한 열반에 드십시오.”(D16)라고 말한다.

 

악마는 왜 열반에 들라고 했을까? 이는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맛지마니까에 따르면 악마에 대하여 부처님은 악마여, 하느님과 하느님 세계의 신들과 하느님 세계의 신들의 권속 모두는 그대의 손아귀에 있고 그대에게 지배당합니다.”(M49)라고 말했다.

 

하느님은 브라흐마(梵天)을 말한다. 오늘날 유일신교의 창조주와 같은 개념이다. 브라흐마는 색계 천상의 천신이다. 색계천신도 윤회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하느님도 윤회한다. 그래서 하느님도 악마의 손아귀에 있다고 한 것이다.

 

존재가 윤회하는 한 악마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어 악마의 그물에서 벗어났다. 이에 대하여 쌍윳따니까야에서는 부처님은 나는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네. 하늘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나는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아났네.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네.”(S4.4)라며 게송으로 말했다.

 

전법을 방해하는 악마

 

부처님의 깨달음은 우주적 사건이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을 때 초기경전에서는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측량할 수 없는 광휘로운 빛이 나타난다고 했다. 네 가지 사건을 들고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아주 놀라움의 경’(A4.127)이 있다. 부처님과 관련하여 네 기지 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것은 1) 보살이 만족의 하느님 나라의 신들의 하늘나라에서 몸을 버리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면서 모태에 들어갈 때, 2) 보살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면서 모태에서 나올 때, 3) 보살이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완전히 깨달았을 때, 4) 보살이 위없이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릴 때를 말한다.

 

부처님의 입태와 탄생, 정각, 초전은 우주적 사건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가 출현하기를 고대하던 존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천신들을 말한다. 그 중에 하나가 사함빠띠 하느님(Brahma)이다. 이들 천신들은 부처가 입태하고 탄생하고 정각을 이루고 초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럼에도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가르침을 펼치는 것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정법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지 않았을 것이다.

 

악마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전법을 방해했다.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악마는 존자여, 자 무관심하라. 여기 지금 즐거운 삶에 헌신하라. 존자여, 참으로 침묵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지 말라.”(M49)라고 말했다.

 

누군가 깨달음을 이룬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는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 간 자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즐기는 삶을 사는 자 역시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 간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전법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만일 그때 부처님이 악마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우주적 먹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천신들이 보살의 입태에서부터 탄생, 정각에 이르기까지 서포트 해 주었는데 포기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다.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은?

 

고미숙 선생은 초전법륜에 대하여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명했다. 불교인들에게 사성제와 팔정도는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모르는 일반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것이다. 이를 어떻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미숙 선생은 사성제에 대하여 각종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특히 집성제에 대하여 모이는 것으로 설명했고 멸성제에 대해서는 흩어지는 것으로 설명했는데 구름과 비로 설명했다. 구름이 끼는 것은 집()이고, 구름이 흩어지는 것은 멸로 설명한 것이다.

 

고미숙 선생은 고성제를 설명할 때 하나의 경을 예로 들었다.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이 사대양보다 많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 경을 접했을 때 충격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경을 보고 충격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눈물경이다.

 

상윳따니까야에 독특한 모음이 있다. 대승 한역경전에서는 볼 수 없는 모음이다. 오로지 니까야에만 볼 수 있다. 이는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으로 이 모음을 접하고 감동하지 않을 자가 없을 정도이다. 그 중에 눈물의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의 양과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S15.3)

 

 

이 경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 특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에 대한 고통이다. 이를 한자어로 원증회고(怨憎會苦)와 애별리고(愛別離苦)라고 한다.

 

원증회고와 애별리고 모두 괴로운 것이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괴로울까? 보통 사람들은 애별리고를 더 괴롭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서 겪는 괴로움은 원증회고이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일 수도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이나 사고 같은 것이다.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

 

얼마나 울어야 눈물이 마를까? 아마 윤회가 끝나기 전에는 눈물 마를 일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량없는 윤회에서 눈물만 사대양 보다 더 많이 흘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음을 보면 피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와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욱 많겠는가?”(S15.13)라며 묻는다.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과 피만 있을까? 모음에서는 젖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마신 어머니의 젖과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욱 많겠는가?”(S15.13)라며 또 묻는다.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과 피, 그리고 마신 젖은 사대양 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어느 것이든지 천문학적으로 된다. 무덤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일 겁의 세월 동안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그가 남긴 유골을 한 데 모아놓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면, 그 유골의 더미는 베뿔라 산만큼이나 클 것이다.”(S15.10)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힘이 된다. 삶의 과정에서 난관에 부딪쳤을 때, 특히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법이 된다. 그것은 아마도 불행경에서 보는 가르침일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1)

 

 

누구나 불행이 닥칠 수 있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하필이면 나에게라며 억울해 할지 모른다.

 

이 세상은 억울한 사람들 천지인 것 같다. 말을 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한가지 이상 말못할 비밀이 있을 것이다.

 

불행하고 가난한 자를 보았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불쌍하다고 연민해야 할까? 가장 공평한 것은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보는 것이다.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나도 한번쯤 저와 같은 때가 있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 보다 더 공평한 것이다. 언제 나도 저와 같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고미숙 선생은 고성제를 설명하면서 눈물의 경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크게 충격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도 이 모음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자신이 어려움을 겪었을 때 이 모음이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 (amhehipi evarūpa paccanubhūta iminā dīghena addhunā)”(S15.11)라는 구절을 말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증명된 순간

 

고미숙 선생은 이번 5강에서 주로 초전법륜(初轉法輪)에 대하여 설명했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린 것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고미숙 선생은 꼰당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들은 것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증명된 것을 말합니다.”라고 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처음 오비구를 찾아 갔다. 전에 함께 수행했던 도반들을 말한다. 그들이라면 자신이 깨달은 것을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비구는 준비된 수행자임을 말한다. 이미 요가와 고행을 했기 때문에 약간만 알려 주어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에 초전법륜경(S56.11)이 있다. 빠알리어로 담마짝깝빠밧따나숫타(Dhammacakkappavattana sutta)라고 한다. 경을 보면 꼰당냐가 깨달은 순간에 대하여 또한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S56.11)라고 묘사되어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증명된 순간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증명되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경에서는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S56.11)라고 되어 있다. 땅의 신이 가장 먼저 알고 외친 것이다. 환희에 찬 외침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우주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제자의 깨달음도 우주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땅의 신이 처음 전달한 것이 천상으로 전달되었다. 욕계천상을 거쳐서 마침내 범천계에 이르렀을 때 온 우주에 있는 천신들이 알게 되었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우주적 사건이고 꼰당냐가 법을 이해한 것도 우주적 사건이다. 그래서 오비구가 모두 깨달았을 때 율장에 따르면 이로써 이 세상에 여섯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겨났다.”(Vin.I.14)라고 했다.

 

이 세상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탄생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깨달음이 증명된 것이다. 마치 의사가 임상 실험을 하여 똑 같은 결과를 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초전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S56.11)라고 설명되어 있다.

 

후진불가 법의 수레바퀴

 

꼰당냐에게 진리의 눈이 생겨났을 때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증명된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법의 바퀴가 굴러 간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의 바퀴는 특징이 있다.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appaivattiya)” 바퀴라는 것이다.

 

멈추지 않는 바퀴는 오로지 앞으로만 직진하는 바퀴를 말한다. 꼰당냐가 부처님의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한 설법을 듣고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S56.11)라며 진리의 눈이 생겨났을 때 법의 바퀴가 처음으로 굴러 가기 시작했는데 이후 한번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의 바퀴에 대하여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바라문에게 말했다.

 

 

셀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Stn.554)

 

 

이 게송에서도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빠일리어 아빳띠밧띠야(appaivattiya)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영어로 ‘not to be rolled back’의 뜻이다. 그래서 멈추게 할 수 없는또는 거꾸로 돌릴 수 없는이라고 번역된다. 부처님의 가르침(Dhamma)이 그렇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바퀴는 되돌릴 수 없다. 거꾸로 구르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로지 직진만 하는 것임을 말한다. 꼰당냐에게 법안이 생겨난 이래 한번도 멈추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왔다. 이런 진리의 수레바퀴는 왜 후진불가일까? 이는 고대인도에서 말이나 소에 매달린 바퀴를 보면 알 수 있다.

 

법구경 1번 게송을 보면 “수레바퀴가 황소의 발굽을 따릇듯.(Dhp.1)라고 되어 있다. 수레바퀴는 수레의 굴대에 연결된 견인용 황소의 뒤를 따른다. 그래서 황소가 앞으로 벗어나려고 하면 멍에가 황소의 목을 조른다. 뒤로 벗어나려고 하면, 바퀴가 황소의 엉덩이 살을 도려낸다. 이와 같이 바퀴는 두 방향으로 황소의 운동을 제어하며 한발 한발 황소 뒤를 따른다. 마찬가지로 법의 바퀴는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멈춤 없이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갈 뿐 결코 후진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라고 한 것이다.

 

막강한 사군을 거느리고 진격해 들어 갈 때

 

부처님의 가르침의 수레바퀴가 후진불가이고 오로지 직진만 있는 것일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며 사고와 팔고를 설했을 때 이를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자신 있게 부정할 수 있을까?

 

부처님의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며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설했을 때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 볼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처지와 벗어난 것이 없다. 그래서 진리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다름 아닌 ‘확신에 찬 믿음(saddha)’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가지 거룩한 진리는 마치 정복왕이 적군의 성을 향해 진격하는 사군, 즉 코끼리부대, 전차부대, 기마부대, 보병부대로 이루어진 사군과 같은 것이다.

 

정복왕이 막강한 사군을 거느리고 진격해 들어 갈 때 성문을 열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네 가지 진리, 즉 사성제를 설했을 때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꼰당냐가 법의 눈이 생겨나서 진리의 수레바퀴가 처음 구르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끊임없이 굴러 왔다. 그 진리의 수레바퀴는 결코 뒤로 구르지 않는 후진불가의 바퀴이고, 오로지 앞으로만 전진하는 바퀴인 것이다.

 

 

2013년 초전법륜경을 빠알리어로 외우고

 

초전법륜경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초전법륜경을 보면 신심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2013년에 초전법륜경을 빠알리어로 외웠다. 이에 대하여 블로그에 초전법륜경을 외우고’(2013-07-09, https://blog.daum.net/bolee591/16155608 )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지금으로부터 9년전의 일이다.

 

빠알리어 초전법륜경을 40일 걸려서 외웠다. 단어수는 762개이고, 글자수는 2,728자에 달한다. 참고로 금강경은 5,429자이고, 천수경은 1,300여자에 달한다. 대단히 긴 길이의 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초전법륜경을 목숨을 걸고 외우다시피 했다. 거의 밤낮으로 외웠다. 이후에는 외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몇 달 암송했다. 그런데 경을 외우는 과정이나 암송하는 과정에서 환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전법륜경을 암송하면 기쁨으로 충만된다. 특히 부처님이 아꿉빠 메 쩨또위뭇띠, 아야만띠마 자띠 낫티다니 뿌납바워띠라며 아라한선언을 할 때 감동적이다. 이는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S56.11)라고 번역된다.

 

 

부처님 가르침에는 청년의 기상이

 

지금 시각 오전 1028분이다. 3시간 이상 글을 썼다. 늘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하고 있다. 거의 매일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 하고 있다. 이번에 고미숙 선생의 청년붓다 5강을 보고 초전법륜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새기게 되었다.

 

초전법륜경은 언제 접해도 가슴을 울린다. 외워서 암송해 보지 않으면 그 느낌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암송하고 나면 마치 내가 부처님이 된 것 같고, 내가 꼰당냐가 된 것 같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단히 역동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청년의 기상이 있다. 아마 고미숙 선생이 강조한 청년의 파토스에 대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청년 붓다는 열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의 수레바퀴는 결코 되돌릴 수 없고, 거꾸로 갈 수 없고, 후진불가이고,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가는 바퀴이다.

 

어느 누구도 부처님의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막을 수 없다. 이렇게 줌모임으로도 담마의 바퀴는 굴러간다. 미래에도 가르침의 수레바퀴는 오로지 앞으로만 직진할 것이다.

 

 

2022-05-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