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1. 4. 09:11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

 

 

오늘도 해가 찬란하게 떠올랐다. 떠오른 햇살에 수리산이 빛난다. 수리산에 울긋불긋 단풍이 도드라진다. 어제도 보았고 일년전에도 보았고, 십년전에도 보았던 산이다. 해는 어제도 떴고 일년전에도 떴고 십년전에도 떴다. 어제도 이 자리에 자판을 두드렸고, 일년전에도 그랬고 십년전에도 그렇다.

 

오늘 날씨는 쌀쌀하다. 갑자기 추워졌다. 이제 늦가을에 지나지 않지만 이미 겨울이 온 것 같다. 누구에겐가는 길고 쓸쓸하고 외로운 겨울일 것이다. 병에 걸렸다거나 가족을 잃은 자에게는 쌀쌀한 날씨만큼이나 쓸쓸할 것이다.

 

전기히터를 켰다. 아직 난방이 되지 않는 사무실에서 히터는 난로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기히터도 십년이 넘은 것 같다. 아래쪽 기능이 마비 되었다. 갑자기 작동되지 않는 것이다. 히터도 수명이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스러져 가는 계절이다. 파랗던 잎파리는 변색되어 간신히 달려 있는 모습이다. 바람 한번 불면 추풍낙엽이 될 것이다. 계절의 변화를 보면 세월의 변화를 실감한다. 이렇게 또 한해가 갈 것이다.

 

삶에는 결실이 있어야 한다. 감나무가 가을이 되면 열매를 남기듯이 사람도 결과가 있어야 한다. 현실을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삶의 결실은 어떤 것일까?

 

 

세존이시여, 그러한 제가 세존께 여쭙습니다. 예를 들어 코끼리를 타는 자, 말을 타는 자, 수레를 타는 자, 궁수, 가수, 사령관, 보급전사, 왕족출신의 고위관리자, 돌격병, 큰 코끼리와 같은 영웅, 용사, 흉갑을 입은 병사, 노예병사, 요리사, 이발사, 목욕사, 제과사, 화만사, 염색공, 직공, 갈대세공인, 도공, 산술가, 경리와 같은 다양한 기능의 분야를 가진 자들이 있고, 그 밖에도 다른 다양한 그러한 종류의 기능의 분야를 가진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능의 결실로 생활하고 있습니다.”(D2)

 

 

아자따삿뚜 왕이 부처님에게 말한 것이다.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이 결실에 대한 경’(D2)에 실려 있다. 아자따삿뚜는 다양한 직업에 대해서 말했다. 오늘날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이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결실이 있다고 했다.

 

직업 중에 가수가 있다. 가수는 노래를 불러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노래를 부르면 재물이 생길 것이다. 재물이 삶의 결실인 것이다. 요리사나 이발사, 목욕사, 제과사, 직공 등도 나름의 분야에서 프로페셔널이다. 당연히 삶의 결실이 따른다.

 

인쇄회로기판설계(PCB)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찮은 것이다. 부유층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인사업자는 바닥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직업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부러운 것일 수도 있다.

 

부처님은 오계에 어긋나는 직업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오계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다. 오계와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설계한 것이 무기에 들어간다면 오계에 어긋나는 일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어느 직업이든지 오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 것을 찾아 보기 힘들다.

 

직업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중립적 입장이다. 단지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마음은 늘 수행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직업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 생계가 유지된다. 이는 삶의 결실이 있기 때문이다. 돈벌이를 한다는 것은 프로페셔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프로이기 때문에 돈을 받는 것이다. 누구든지 돈을 번다면 그는 프로페셔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달에 처음으로 흑자전환했다. 거의 십년 된 것 같다. 마이너스 통장이 플러스로 전환된 것이다. 입출금 통장을 말한다. 한때 한도 가까이 육박한 적이 있었다. 한도가 차면 한도를 늘렸다. 더 이상 늘리지 못하는 때까지 늘렸다. 그래서 늘 마이너스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지난 여름 뜨겁게 보냈다. 동시에 서너군데 일을 했다. 일감이 동시에 밀려서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서도 글을 썼다. 아무리 바빠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다.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삶의 결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흑자전환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일감이 뚝 끊긴 채로 몇 달만 지나면 또다시 한도까지 이를 것이다. 지속적으로 일감이 확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광고를 해야 한다.

 

키워드광고를 다시 재개 하고자 한다. 주로 다음(Daum)에 게재 했다. 그러나 다음은 부침이 심하다. 이번에 카카오로 변경되면서 다시 해야 한다. 이런 점은 네이버와 비교된다.

 

 

키워드광고를 하면 누군가 볼 것이다. 관심 있으면 클릭해서 홈페이지에 접속할 것이다. 전화를 걸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큰 집은 아니다. 아주 작은 집이다. 마치 작은 식당과도 같다.

 

작은 식당에는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점심시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키워드 광고도 그렇다. 크고 화려한 홈페이지도 있지만 작고 소박한 홈페이지도 있다. 작은 식당에도 손님이 있듯이 작은 홈페이지도 찾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먹고 사는 것이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일을 그만두면 마땅히 해야 할 것도 없다. 그래서 계속하는 것이다. 마치 장인에게 정년이 없는 것과 같다.

 

일본에는 장인들이 많다. 머리가 허연 장인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름답다. 평생 대장장이 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연장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평생 농사지어 먹고 사는 농부는 늙어 죽을 때까지 농사를 짓는다. 이렇게 본다면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당위성이 생긴다.

 

현재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일감이 있어서 일하는 것은 본업이고, 일 없을 때 글을 쓰는 것은 부업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본업보다 부업에 더 열중할 때가 있다. 왜 그런가?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수행과도 같다.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은 매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글은 어제와 다르기 때문이다. 어제와 똑 같은 삶을 산다면 발전이 없다. 그러나 글을 쓰면 매일 새로운 것을 쓰기 때문에 매일매일 새로운 삶이다. 이는 다름아닌 수행이다.

 

한평생 일만 하다 끝날 수 없다. 일을 하면 삶의 결실이 따라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그것 이상 기대할 수 없다. 수행자로서의 삶도 살아야 한다. 수행자에게도 삶의 결실이 있을 것이다.

 

아자따삿뚜왕은 부처님에게 현실을 삶을 사는 자에게는 삶의 결실이 있다고 말했다. 왕은 이어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삶의 결실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D2)라고 물어 본다.

 

수행승은 겉으로 보기에 표가 난다.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수행승은 존경의 대상이다. 그래서 왕도 경의를 표한다. 바로 이런 것이 수행자에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삶의 결실일 것이다.

 

수행자에게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삶의 결실도 있다. 계행, 감각의 단속, 선정 등 수행에 대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긴 하지만 자신만 알고 있는 것이기 쉽다. 마침내 모든 번뇌를 부수었을 때 아라한선언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수행자의 삶의 결실일 것이다.

 

이 세상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세상사람들은 돈, 명예, 권력을 말할 것이다. 이런 것도 삶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세속적인 삶의 결실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삶의 결실은 허무한 것이다. 끝까지 유지되지 않는다. 죽어서는 놓고 가야 한다. 그것들을 쟁취하기 위한 행위()만을 가져 간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 물위로 솟아 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

 

 

세상속에 살지만 세상 밖에서 살고자 한다. 진흙 속에서 살지만 연꽃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출세간적 삶도 살아야 한다. 세속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지만 또 한편으로 수행자로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세간적 삶의 결실도 추구하고 출세간적 삶의 결실도 추구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니까야를 보면 흰 옷 입은 사람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밧차여, 나의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의 남자신도 이외에, 존자 고따마의 제자로 흰 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수용하지만, 가르침을 따르고, 훈계를 받아 들이고, 의심을 뛰어넘고, 의혹을 끊고, 두려움 없음을 성취하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 가운데 사는 재가의 남자신도가 백 명이 아니라, 이백 명이 아니고, 삼백 명이 아니고, 사백 명이 아니고, 오백 명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M73)

 

 

부처님이 외도 밧차곳따에게 말한 것이다. 외도가 재가자도 불환자, 즉 아나함이 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물어 보았는데 이에 대하여 수도 없이 많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재가의 삶을 살면서도 수행을 하면 아나함의 경지까지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고 한다.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Every Day a Good Day’가 된다. 이 말에 대해서 어떤 이는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 현재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몸에 불편함이 없고 마음이 안정되어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오늘은 좋은 날이기도 하지만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이기도 하다.

 

 

2022-11-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