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촛불을 드는 이유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가? 점심약속도 약속이다. 그러고보니 점심약속을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분에게 밥 먹자고 말 했는데 3개월 지났다.
부산에 가겠다고 공개적으로 글을 쓴 바 있다. 작년 이맘때 일이다. 아직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차를 마시고 밥을 사고 싶은 사람이 있다. 찾아 가야 한다. 찾아 오라고 하면 실례가 된다. 수도권이라면 부담 없다. 천리길이라면 큰 마음 먹어야 한다. 한번 약속 했으면 지켜야 한다. 늘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있다.
촛불에 가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당연히 약속 지켜야 한다. 어제 저녁 삼각지촛불에 참가했다. 한시간 늦었다. 사무실에서 글을 쓰다보니 마무리 때문에 늦은 것이다. 오후 6시에 도착했다.
현장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로 반을 차지 했다. 놀랍게도 외국인도 있었다. 외국인 사망자는 26명이다. 이란이 4명으로 가장 많다. 그래서일까 이란 사람으로 보이는 남성 두 명을 보았다.
대형전광판은 3대가 동원 되었다. 백미터 간격이니 3백미터 길이가 된다. 주최측에 따르면 3만명이라고 했다.
촛불은 우중에 열렸다. 간간히 비가 내렸기 때문에 우산을 쓴 사람이 많았다. 아스팔트는 젖어 있어서 사람들은 서 있었다. 비바람에 낙엽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비바람이 불어도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엘이디촛불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한사람이라도 참여하여 힘을 실어 주고 싶었다. 비오는 11월 낙엽지는 우중충한 날에 집에 있으면 편할 것이다. 일부러 멀리 찾아와 늦가을 비를 맞아 가며 촛불을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의롭지 않은 세력의 퇴진을 의미한다.
올여름 촛불집회 얘기를 들었다. 매주 토요일 집회에 참가한다는 법우님으로부터 얘기를 들은 것이다.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이슈는 없었다. 처음에는 청계천 소라광장에서 소규모로 시작 했는데 갈수록 참가자가 늘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촛불에 참여 하지 않았다. 촛불에 가게 된 것은 1029이태원참사 때문이다. 도무지 설명이 안되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있게 지적하지 않는 마약기획수사에 대한 것이다. 이것 아니고서는 참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하위직 몇 명 처벌하는 것으로 끝내려고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억울한 죽음이 된다. 죽은 놈만 불쌍하게 되는 것이다.
압사참사가 일어난 데는 이유가 있다. 통제가 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크다. 왜 그들은 손놓고 있었을까? 이것을 밝혀야 한다.
수많은 참사가 있었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 건축물 붕괴에 따른 참사가 있었다. 그때마다 제도와 시스템을 개혁하고 메뉴얼을 만들었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열차가 탈선하고, 지하철에서 불이 났다. 그때도 메뉴얼을 만들었다. 지하철 의자를 불에 타지 않는 난연재를 사용한 것이 좋은 예이다.
세월호참사가 났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단순 사고가 아니라 인재로 본 것이다. 이후 제도와 시스템을 보완하고 메뉴얼이 만들어졌다. 사고가 날 때마다 메뉴얼을 만들었다. 메뉴얼대로만 하면 문제 없는 것이다. 그런데 메뉴얼대로 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1029이태원참사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왜 메뉴얼대로 하지 않았을까? 메뉴얼대로 인원통제가 이루어졌더라면 압사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약기획수사 의혹이 있는 것이다.
마약기획수사가 사실이라면 정권을 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밝히려 하지 않는다. 모두 숨어 버렸다. 참사희생자 명단도 숨기고 있다. 위패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에 추모행사를 가졌다. 그래서일까 촛불에서는 정권퇴진 구호가 주류를 이룬다.
“여법하지 못한 삶과
여법한 죽음이 있다.
여법한 죽음이,
여법하지 못한 삶보다 낫다.” (Thag.670)
고닷따 장로가 읊은 게송이다. 여법하다는 것은 법다운 것을 말한다. 또다른 말로 바꾸면 정의롭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게송은 "불의에 살 것인가, 정의를 위해 죽을 것인가, 불의에 사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로 바꿀 수 있다.
어떤 이는 현실참여하는 것을 비난한다. 더구나 경전 문구를 인용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경전을 이용하여 편가르기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주로 보수적 이념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도인의 경지라면 글을 쓰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글 쓰는 것 자체가 허물이 된다. 그러나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은 학인이다. 또한 생업이 있어서 현실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나에게 성자와 같은 모습을 기대하는 것 같다.
1029이태원참사에 대해서 공업론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특히 불교계에서 확인된다. 영정도 위패도 없는 추모법회가 조계사에서 열렸다. 그들은 대통령 부부를 초대하여 우리모두의 책임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1029이태원참사가 우리모두의 책임이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안전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하위직 공무원 몇 명을 처벌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공업론의 한계이다.
공업론이 잘 들어 맞을 때가 있다. 환경문제에 공업론을 적용하면 우리모두의 책임이 된다.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생태계 파괴가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공업론은 한계가 있다.
잘사는 나라에서 환경파괴가 심하다. 또한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소비를 많이 하기 때문에 환경파괴의 주범이 된다. 그럼에도 공업이라 하여 우리모두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불공평한 것이 된다.
공업론은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심지어 환경에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공업을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업이 중요한 것이라면 초기경전에 수없이 언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는 단 한줄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화엄경에 딱 한줄 발견된다.
"삼천대천세계가 한 가지 인연이나 한 가지 사실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실로써 이루어진다... 이런 것이 모두 중생들의 공업과 보살들의 선근으로 일으키는 것인데,.."(화엄경 여래수량품)
삼천대천세계는 한령없는 인연과 사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는 법계연기에 대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만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법계연기를 사회현상에 적용하면 공업론이 된다.
공업론은 내로남불이 되기 쉽다. 또한 이현령비현령이 되기 쉽다. 어느 경우에는 들어맞고 어느 경우에는 들어맞지 않는다면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공업론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안한것 같다.
공업론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모두에게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공업론의 함정은 죄악을 저지른 자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승경전에 단 한줄 나오는 것을 근거로 우리모두에게 책임 있다고 주장하는 공업론은 무리가 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사회안전망에 대한 메뉴얼은 만들어졌다. 이후 참사가 날 때마다 메뉴얼이 만들어졌다. 메뉴얼대로만 하면 안전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획수사를 한다고 하여 메뉴얼을 무시했을 때 참사가 발생했다. 중고생도 촛불을 들었다. 내가 촛불을 드는 이유에 해당된다.
“정의를 따르다가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면서
이익을 얻는 것보다 낫다.
지혜롭지 못하면서
높은 평판을 얻는 것은
지혜가 있으면서 평판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 못하다.
욕망에서 얻어지는
쾌락보다는
욕망을 벗어나
자기를 단련하는 괴로움이 낫다.
불의에 살 것인가,
정의를 위해 죽을 것인가,
불의에 사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 (고닷따의 경, Thag666-670)
2022-11-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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