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스리랑카 성지순례기 30, 침략자의 종교로 편입되지 않은 것은, 불치(佛齒)의 성지 캔디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3. 4. 24. 11:49

스리랑카 성지순례기 30, 침략자의 종교로 편입되지 않은 것은, 불치(佛齒)의 성지 캔디에서

 

 

캔디, 달콤하고 부드러운 과자를 말한다. 사탕처럼 달콤한 도시 이름이 있다. 스리랑카 캔디(kandy)를 말한다. 순례자들은 알루비하라를 출발하여 캔디로 향했다.

 

스리랑카 현지 시점은 2022121214일 수요일 늦은 오후시간이다. 알루비하라 바위사원에서 캔디 불치사까지는 31키로 거리에 50여분 걸린다. 캔디는 스리랑카 중부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캔디에 도착했다. 산악지형의 고원에 위치해서일까 산비탈에 집이 많다. 이제까지 보던 스리랑카 풍광과 차이가 있다. 더구나 해발 500미터 위에 있어서 약간 차가운 기운도 있다

 

 

캔디에 대하여 인터넷검색해 보았다. 캔디는 싱할라어로 마하누어러(Mahanuwara)이다. 영어라는 칸디(Kandy)라 하는데 대게 캔디라고 부르는 것 같다.

 

캔디는 스리랑카 중부 고원지대에 위치한 도시이다. 캔디는 캔디왕조(1469-1815)의 마지막 수도였다. 캔디는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를 잇는 문화삼각벨트의 한축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 되어 있는 신성도시 중의 하나이다.

 

캔디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불치사이다. 부처님의 어금니를 모셔 놓은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처님의 치아사리는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캔디에 치아사리가 있음으로 인하여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저항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순례자들은 캔디에 도착해서 자연스럽게 불치사로 향했다. 현지에서 시각은 오후 5시였다. 해는 뉘엇뉘엇 넘어가려 한다. 산중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해가 늦게 뜨고 빨리 지는 것 같다. 오후 6시가 되면 불치행사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캔디라는 이름의 유래는?

 

캔디라는 이름은 어떻게 유래 되었을까? 위키백과에 따르면 공식적 이름은 ‘Senkadagala Siriwardhana Maha Nuwara’이다. 이 말은 빛나는 센카다갈라의 위대한 도시라는 뜻이다. 이를 축약하여 마하누와라(Maha Nuwara)로 불리운다.

 

캔디라는 명칭은 본래 스리랑카 말에서 유래 되었다. 산위의 땅을 의미하는  ‘Sinhala Kanda Uda Rata’라는 말과 산 위의 5개 군을 뜻하는 ‘Kanda Uda Pas Rata’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공통적으로 칸다가 들어간다.

 

칸다라는 말은 비크라마바후 3세의 왕후가 센칸다로 이름 지은 것에서 유래한다. 이는 센카다갈라라는 색깔의 돌을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런 칸다는 땅을 의미한다.

 

포루투갈 사람들은 왕국과 수도의 명칭을 ‘Candea’로 줄였다. 그런데 스리랑카에서 캔디라는 말은 위대한 도시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하 누와라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 말도 축약되어서 보통 누와라라고 불리운다.

 

캔디가 위대한 도시가 된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왕조이든지 치아사리가 있으면 정통성이 확보된다. 그리고 국민화합과 통합의 중심으로 작용된다.

 

캔디왕조가 있었는데

 

캔디왕조는 언제 성립되었을까?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감폴라(Gampola) 왕국의 군주인 비크라마바후 3(1357-1374)에 의해 처음 설립되었다. 당시에는 센카다갈라푸라(enkadagalapura)라고 했다.

 

캔디왕조의 첫번째 왕은 세나 삼마타 위크라마바후(Sena Sammatha Wickramabahu, 1473–1511)였다. 그는 콧테(Kotte) 왕국 아래에서 반독립하여 캔디를 수도로 삼아 캔디왕조를 열었다.

 

캔디왕조는 서세동점시절에 마지막 왕조가 되었다. 이는 1592년 포르투갈이 스리랑카 해안을 점령함으로 인하여 몰락이 시작되었다.

 

캔디왕조는 침략자들과 전쟁을 했다. 싱할라-포루투갈 전쟁으로 캔디를 침략하려는 포루투갈을 몰아 내기도 했다. 이후 네덜란드 침략자도 물리쳤다.

 

캔디왕조는 중앙 고원지대에 있어서 침략자들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그러나 해안 지역은 침략자들에게 점령되었다. 그런데 한때 수도가 1765년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리랑카 사람들의 저항으로 인하여 1766년 평화조약 체결로 인하여 물러 갔다.

 

네덜란드는 1796년까지 지배했다. 네덜란드가 나폴레옹의 프랑스 지배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물러가자 이번에는 영국이 들어왔다. 영국의 지배는 1802년부터 시작되었다.

 

캔디왕조는 4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이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성물 치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성물의 수호자는 스리랑카의 통치자와 다름 없었다. 그래서 통치자는 성물인 치아가 있는 불치사를 왕궁과 가까이에 배치 했다.

 

캔디왕조는 19세기 초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캔디왕조가 망한 것은 영국이 1802년 스리랑카에 들어오고 나서부터의 일이다. 영국은 스리랑카를 침략한지 불과 13년만인 1815년에 캔디왕조를 정복했다. 캔디가 침략자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영국침략자들은 캔디를 정복했다. 그렇다고 정신까지 정복한 것은 아니다. 비록 세계 최강의 군대를 가진 영국에게 힘으로는 정복당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독립을 유지했다. 그 증거로 오늘날 스리랑카가 불교국가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손을 이마에 대는 것은

 

불치사에서는 하루에 몇 차례 행사가 있다. 오후 6시에도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저녁 예불 같은 것이다. 이 시간에 맞추어 수많은 참배객들이 왔다. 대게 흰 옷 입은 스리랑카 불자들이다. 외국인들도 다수 보았다.

 

 

스리랑카 불자들의 신심은 세계적으로 인정된다. 아누라다푸라 등 스리랑카 성지에 가면 흰 옷 입은 불자들의 행렬을 볼 수 있다. 단체로도 오고 가족단위로도 온다. 그들은 불탑과 보리수를 돌며 불공을 한다. 그 진지한 모습을 보면 스리랑카 불자들의 신심을 느끼게 해준다. 불치사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행사가 시작되기 30분 전에 불치가 있는 곳에 자리잡았다. 불단에는 갖가지 종류의 꽃이 있다. 스리랑카 불자들은 꽃공양한 것이다. 불단에는 오로지 꽃만 보인다. 꽃 이외 다른 것은 없다.

 

 

불단에는 울굿불긋 갖가지 종류의 꽃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꽃 공양을 올릴 때 합장을 하는데 우리와 달리 이마 위까지 올린다. 이처럼 두 손을 이마에 대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테라와다불교 불자들은 합장할 때 두 손을 이마에 댄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청정도론에서 승수념에 대한 설명을 보면 “모든 세상 사람이 양 손을 머리에 얹고 합장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예경받을 만하고’라고 한 것이다. (Ubho hatthe sirasmi patiṭṭhapetvā sabbalokena kayiramāna añjalikamma arahatīti)(Vism.7.97)라고 했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거룩한 성자에게 예경하는 방식이 설명되어 있다두 손을 합장한 다음 ‘머리에 얹는 것(sirasmi patiṭṭhapetvā)’이라고 했다여기에서 빠알리어 시라(sira)는 머리(the head)를 말한다

 

시라와 관련하여 냐나몰리는 in placing both hands [palms together] above the head,”라고 번역했다두 손을 머리에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양손을 머리에 얹어”라고 번역했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양 손을 머리에 얹고”라고 번역했다공통적으로 시라에 대하여 머리로 번역한 것이다.

 

빠알리어 시라(sira)는 머리를 뜻한다그렇다면 어디부터 머리일까보통 머리라고 말하면 머리털이 나는 곳을 말하기 쉽다그러나 앞이마도 머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이는 앞이마를 뜻하는 영어 forehead’로도 알 수 있다

 

머리라고 해서 반드시 정수리(crownhead)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머리는 정수리를 포함하여 머리털 난 부분 전체를 머리라고 볼 수 있다이렇게 본다면 청정도론에서 언급된 시라라는 말은 정수리라기 보다는 이마(forehead)에 가깝다.

 

 

합장한 두 손을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한국방식티벳방식테라와다 방식으로 갈린다테라와다 방식에서는 합장한 두 손을 머리에 둔다고 했다그러나 티벳과 같은 정수리는 아니다앞이마로 보아야 한다이는 근거가 있다.

 

두 손의 위치에 대하여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는 one's hand in añjali [palms together, fingers flat out and pointed upward] are raised to the forehead (Prostration영문판 위키라고 설명되어 있다여기서 빠알리어 añjali’에 대하여 합장한 두 손을 위로 올리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이는 이마까지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빠알리어 시라가 정수리를 뜻한다기 보다는 앞이마(forehead)로 보는 이유이다.

 

불공(佛供)드리는 모습을 보니

 

스리랑카 불자들은 행사가 열리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어떤 이는 두 손을 이마에 대고 무언가 말을 하고 있다. 이를 기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기도는 없다. 대가를 바라는 기도는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다만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염불은 있을 것이다.

 

 

불단 앞에 앉아 있으니 어느 젊은 여인이 암송하는 것을 들었다. 잘 들어 보니 삼보예찬에 대한 것이다. 삼보예찬이 끝나자 또 하나의 경을 독송했다. 잘 들어 보니 라따나경(Ratanasutta, Sn2.1)이다. 뒤를 돌아 보니 책을 보면서 독송하고 있었다.

 

 

앞에는 어느 여자노인이 앉았다. 가만히 들어 보니 염불을 하고 있다. 마치 신음소리를 내듯이 나지막히 읊조리고 있다. 내용은 알 수 없다. 아마도 여자노인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주문을 외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마치 우리나라 신심 있는 노보살이 천수경을 입에 달고 다니듯이, 스리랑카 여자 노인도 알 수 없는 주문을 외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에서 경을 암송하는 것을 보았을 때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이에 빠다나경(Sn.3.2)을 암송했다. 시간 될 때마다 늘 암송하는 정진의 경을 말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암송한다. 이렇게 성스러운 장소에서 경을 암송하다 보니 성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성소에서 왜 경을 암송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리랑카 불자들이 불공드리는 태도는 매우 진지하다. 그들은 두 손을 이마에 얹고 어떤 소원을 하는 것일까? 아마도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행복일 것이다. 이는 부처님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 길을 떠나라.”(S4.5)라고 말한 전도선언에서도 알 수 있다.

 

치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후 6시가 되자 행사가 시작되었다. 마치 우리나라 저녁예불처럼 의식에 따라 장엄하게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치아를 본 것은 아니다. 치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르침이다.

 

 

스리랑카에서는 가르침을 잘 보전해 왔다. 16세기 서양 외세의 침략이 있었지만 정체성을 잃지 않은 것은 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치아가 있어서 불자들의 신심을 이끌어낸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빠알리 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는 외세의 침략으로 정복당했다. 그것도 400년이 넘게 식민통치를 받았다. 그 중에서도 영국이 가장 가혹했다. 그들은 스리랑카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하고자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을 시키고 공무원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만 뽑았다.

 

영국은 무력으로 스리랑카를 정복했다. 그러나 영국은 스리랑카 사람들 정신은 정복하지 못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힘이 없어서 나라가 정복당했지만 정신만은 정복당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불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는 이천년이 넘는 불교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잘 보전해 왔다. 또한 스리랑카는 청정도론의 나라이다. 이렇게 문화적으로 선진국이었던 스리랑카가 해외 침략자들에게 수백년 점령당했지만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에 편입되지 않았다.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문화가 낮으면 높은 문화를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침략자들의 종교를 받아 들이지 않은 것은 문화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고도로 발달했다. 침략자의 종교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았다. 오늘날 스리랑카가 식민지 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침략자의 종교로 편입되지 않은 것은 문화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우수한 유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23-04-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