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스리랑카 성지순례기 31, BPS에서 영역 경전을 구입했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3. 5. 6. 09:38

스리랑카 성지순례기 31, BPS에서 영역 경전을 구입했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아침이다. 어제도 비가 내렸다. 내리 이틀째 비가 내리고 있다. 더구나 어제는 어린이날이었다. 야외행사를 준비하는 단체가 있었다면 망쳤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해갈을 고대하던 농민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비가 아닐 수 없다.
 
눈만 뜨면 밥만 먹으면
 
눈만 뜨면 밥만 먹으면 달려 가는 곳이 있다. 나의 일터이자 사무실이자 아지트이다. 홀로 지내는 곳이다. 이곳에만 오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찾는 이는 별로 없다.
 

 
아침 일찍 6시 35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아침이어서일까 공기는 차분하고 착 가라 앉아 있다. 이럴 때 커피를 마셔야 한다.
 
늘 하던 대로 절구질을 했다. 원두를 절구에 으깨어 핸드드립하는 것이다. 첨가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커피원두 그대로의 맛이 전달된다. 커피는 맛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향으로도 먹고, 눈으로도 먹고, 귀로도 먹고, 감촉으로도 먹는다.
 

 
이미우이(Imee Ooi)음악이 흐르는 평온한 아침이다. 늘 그렇듯이 차를 타고 가면 라따나경(보배경, Sn2.1)을 틀어 놓는다. 이처럼 비가 오는 날에 이미우이음악을 들으면 가슴을 파고 드는 것 같다. 마치 위빠사나수행에서 사띠하듯이 한구절한구절 새기며 듣게 된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순례기를 쓰는 것이다. 스리랑카 다녀 온 것에 대한 여행기를 말한다. 순례는 작년 12월에 했지만 순례기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지금도 여행중에 있다.
 
불치사 옆에 불교서점이 있는데
 
이번 순례기는 BPS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BPS는 Buddhist Publication Society의 약자이다. 스리랑카 캔디시 불치사 옆에 있는 불교서점이다. 테라와다불교 경전과 문학서적을 취급하는 곳이다.
 
스리랑카 순례를 하면 주로 유적지나 관광지 위주가 되기 쉽다. 특히 패키지여행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승용차로 네 명이 여행하는 이번 순례에서는 일정이 자유롭다.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런데 BPS는 이미 일정이 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번 스리랑카 순례는 김형근 선생이 일정을 짰다.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했는데 그 중에 BPS도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캔디에 가면 반드시 BPS에 들러야 한다고 말했다.
 
페이스북은 블로그와 달리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다. 스리랑카 순례기간 중에 실시간으로 글과 사진을 올렸다. 캔디에 이르렀을 때 어느 스님이 댓글을 달았다. 스님에 따르면, 캔디에 가거든 반드시 BPS에 들르라고 했다. BPS에 가면 빠알리경전을 싸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영역경전을 말한다.
 
이구동성으로 BPS에서 들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순례가 단지 유적지나 관광지를 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됨을 말한다. 마치 지역에 가면 그 지역 특산품을 사듯이, 캔디에 가면 BPS에 가서 불교서적을 사야 함을 말한다.
 
산비탈 오크우드호텔에서
 
전날 캔디에 늦은 오후에 도착했다. 불치사 참배를 마치고 나니 컴컴해졌다. 캔디에서 하루밤을 자야 했다. 운전기사겸 가이드인 가미니는 캔디 시내로 인도했다.
 
캔디는 고원도시이다. 그러다 보니 기온이 낮다. 또한 캔디는 산악도시이다. 그러다 보니 산비탈에 집이 많다. 가미니가 안내한 호텔도 산비탈에 있었다.
 

 
캔디 산비탈에 위치한 숙소는 호텔이라기 보다는 게스트하우스에 가깝다. 사진 찍어 놓은 것을 보니 ‘호텔 오크 우드(Hotel Oak Wood)’라고 되어 있다.
 
오크우드호텔은 어디쯤 있을까? 구글 지도검색을 해 보았다. 지도를 보니 명확하게 드러난다. 불치사에서 남서쪽으로 3.8키로지점에 있고 11분 걸린다.
 

 
캔디에는 평지가 없는 것 같다. 사방 어느 곳을 봐도 산이 보인다. 집이나 건물은 언덕배기에 있다. 마치 우리나라 성남시를 보는 것 같다. 성남 올드타운을 보면 대부분 언덕에 집이 있기 때문이다.
 

 
오크우드호텔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파손된 곳이 많았다.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온수이다. 하루종일 여행하다 지친 몸을 녹이기에는 뜨거운 물에 샤워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
 

 
온수는 나왔다. 그러나 수도꼭지가 망가져서 원활하지 않았다. 에어컨은 작동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호텔에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다른 숙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텔에는 우리일행밖에 없는 것 같다. 방은 열 개 가량 되는데 다른 투숙객은 보이지 않았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었다. 시설은 낡고 불편했지만 조식은 먹을 만 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먹는 주식인 카레라이스가 메인 메뉴이다. 가미니에 따르면 타밀식 식사라고 했다.
 

 
카레라이스는 강한 향신료와 함께 먹는다. 향신료가 들어간 스프가 있어서 부어먹는 것이다. 또한 생선이 들어간 짠 맛의 찌게도 있었다. 면으로 된 다발도 있어서 밥과 함께 먹었다. 여기에 스리랑카 홍차가 빠질 수 없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식사할 때 손으로 먹는다. 오른손으로 비벼 먹는 것이다. 운전기사 겸 가이드인 가미니 역시 손으로 먹었다. 그러나 외국 여행자들은 포크를 이용해서 먹었다. 향이 너무 강해서 다 먹지 못했다.
 
찬란한 아침 햇살에 빛나는 캔디호수에서
 
스리랑카에서 현지시점은 2022년 12월 15일 목요일 아침이다. 순례자들은 이른 아침 호텔을 떠나 BPS로 향했다. 오전 8시 무렵이어서일까 거리에는 출근하는 사람, 학교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더구나 찬란한 아침 햇살에 거리는 빛나 보였다. 지대가 높고 공해시설이 없어서일까 공기는 맑고 깨끗했다.
 

 
캔디는 호수가 중심이다. 호수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수길로 달리다가 사진을 찍기 위해서 차를 멈추었다.
 
불치사가 보이는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여행에서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고 하는데 기념 사진 하나 정도는 남겨야 할 것 같았다. 혜월스님과 김형근 선생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BPS가는 길에 본 캔디 호수는 아름다웠다. 하늘은 파랗고 물도 파랬다. 또한 녹색의 녹음은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온도와 습도는 적당해서 쾌적의 상태가 되었다. 이 호수의 이름은 무엇일까?
 

 
구글지도검색을 해보니 캔디호(Kandy Lake)이다. 동서로 비스듬히 있는데 가로 1.2키로에 세로는 서쪽에 폭이 넓은 곳은 3백미터가량 되고 폭이 좁은 동쪽은 백미터가량된다.
 

 
캔디호 주변은 도로로 둘러 쌓여 있다. 캔디 시민의 산책코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Sri Dalada Maligawa)라 불리우는 불치사가 호수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이다.
 

 
말도 안되게 저렴한 BPS책값
 
BPS는 호수 동쪽 끝자락에 있다. 불치사와 가까이 있는데 2백미터 가량 떨어져 있다. 그런데 명성에 비해서 크지 않다는 것이다. 종로에 있는 교보문고를 연상했으나 오십평도 안되는 작은 책방 크기이다.
 

 
 
BPS를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자 진열대에 꼽혀 있는 것은 빠일리경전이었다. 앙굿따라니까야, 디가니까야, 상윳따니까야, 수타니파타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 영역이다. 그것도 빅쿠보디가 영역한 것이다.
 

 
진열대 아래칸을 보니 자타카가 눈에 들어왔다. 최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자타카를 완역했는데 영역 자타카도 있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청정도론이다. 냐나몰리가 번역한 영역판이다.
 
서점에 왔으면 책을 사야 할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전과 논서는 꼭 사고 싶었다. 상윳따니까야와 자타카와 청정도론을 구매했다. 책값은 매우 저렴했다. 이와 같은 책값에 대하여 다음날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상윳따니까야가 8,500루피이다. 달러로 환산하면 18불이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25,000원이다. 방대한 상윳따니까야 영역본이 우리나라 돈으로 고작 2만5천원이라니! 믿겨지지 않는 가격이다. 김형근 선생이 선물로 사주었다.

책값에 놀랐다. 한국에서는 수십만원 하는 것이다. 수천페이지 되는 방대한 경전이 고작 2만5천원이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청정도론 영역본도 있었다. 냐나몰리가 번역한 영역본이다. 놀랍게도 2,500루피에 지나지 않는다. 환산하면 5.3불이다. 우리돈으로 7,200원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가격이다. 천페이지 이상되는 논서가 만원도 되지 않은 것이다.

몸이 달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런 기회를 높치고 싶지 않았다. 놀랍게도 자타카 영역본도 있었다. 세 권으로 된 것이다. 가격은 2,500루피이다. 우리 돈으로 7,200원 밖에 되지 않는다.

청정도론과 자타카를 5,000원 루피 주고 샀다. 만5천원밖에 들지 않았다. 횡재한 것이다.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경전을 이곳에서 손쉽게, 그것도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사게 되었다.”(2022-12-15)

 

 
상윳따니까야는 김형근 선생이 사주었다. 책 세 권을 사자 부피가 상당했다. 가뜩이나 짐이 많은데 책까지 추가되니 짐이 더 늘어났다. 좀더 욕심 부린다면 수타니파타도 사고 싶었다. 놀랍게도 수타니파타는 수천페이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석을 모두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
 
귀국하면 수타니파타를 비롯해서 그때 구입하지 못한 앙굿따라니까야, 맛지마니까야, 디가니까야를 인터넷 구매하고자 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난 현재 시점까지 구매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BPS담당자는 친절하게 구매할 수 있는 인터넷 주소를 알려 주었다. 인터넷 주소는 www.bps.lk이다. 이메일 주소 bps@bps.lk로 책을 주문하면 발송해 준다고 했다. 홈페이지를 검색해 보니 모두 383권의 불교경전이 있다.
 
약자는 항상 인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매일 경전과 함께 하고 있다. 머리맡에는 니까야가 있어서 기회만 되면 열어 본다. 진도는 빨리 나가지 않는다. 경전을 소설 읽듯이 읽을 수 없다. 새기며 읽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하루 일이페이지가 고작이다.
 
경전을 읽다 보면 정반대의 번역도 접하게 된다. 현재 한국에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는데 종종 상이한 번역과 접하게 된다. 상윳따니까야 제석천의 모음(S11)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대표적이다.
 
 
“Yo have balavā santo
dubbalassa titikkhati,
Tam
āhu parama khanti
nicca
 khamati dubbalo.”(빠알리원문, S11.5)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 S11.5)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 대하여
감내하고 참는 것
그것이 최상의 인욕이라 말하나니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초기불전연구원 번역, S11.5)

 
 
두 종류의 번역을 보면  “nicca khamati dubbalo”에 대하여 정반대로 번역해 놓았다. KPTS(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강자가 인내하는 것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그런데 초불연(초기불전연구원) 번역을 번역을 보면 정반대로 약자가 인내해야 한다고 번역해 놓았다. 어느 것이 맞을까?
 

 
영역 상윳따니까야를 열어 보았다. BPS에서 구매한 빅쿠보디의 영역를 보면 문제의 게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았다.
 
 
 “When a person endowed with strength
Patiently endures a weakling,
They call that the supreme patience;
The weakling must be patient always.”(
빅쿠보디 번역, S11.5, CDB 322쪽)
 

 
영역을 보면 문제의 문구 “nicca khamati dubbalo”에 대하여 “The weakling must be patient always.”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은 초불연의 번역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라는 문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약자는 항상 인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빅쿠보디의 영역 빠일리니까야 번역은 표준이 된 것 같다. 그러나 번역에 오류가 없다고 볼 수 없다. 빅쿠보디는 문제의 빠알리 문구에 대하여 약자가 인내해야 하는 것으로 번역했다. 정말 약자는 항상 인내하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강자가 인내하면 안되는 것일까? 빅쿠보디는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
 
CDB에서 문제의 번역에 대한 각주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C.Rh.D takes nicca khamati dubbalo to mean that a weak person must always be tolerated (see KS 1:285), but dubbalo, as nominative, is clearly the subject of khamati, not its object. My translation conforms to ñāamoli's (in Minor Readings and Illustrator, p. 162), but was made'independently. ñāamoli' s note speaks for my interpretation as well: "The rendering here ... seeks to bring out that patience is a necessity rather than a virtue in the weak, but appears as a virtue in the forbearance of the strong. The verse is a difficult one." (617번 각주, 빅쿠보디, CDB 492쪽)
 

 
빅쿠보디는 냐나몰리의 견해를 존종하여 약자의 인내로 번역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 ‘C.Rh.D’는 ‘약자는 반드시 인내하는 것(a weak person must always be tolerated)’이라 하며 ‘KS 1:285’를 보라고 했다. 여기서 ‘C.Rh.D’와 KS 는 무슨 뜻일까? 찾아 보니 ‘C.A.F. Rhys Davids’이고, KS는 ‘Kinderd Sayings(상윳따니까야 영역, Rhys Davids, Woodward)’라 되어 있다. 리스 데이비스의 영역에 약자가 인내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음을 말한다.
 
영역을 보면 공통적으로 약자의 인내를 말하고 있다. 냐나몰리도 약자의 인내를 말하고, 빅쿠보디도 약자의 인내를 말한다. 빅쿠보디는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 빅쿠보디는 명백히 오역임에도 왜 약자의 인내로 번역했을까?

 
오늘날 빅쿠보디의 영역 니까야가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그런데 빅쿠보디의 은사는 냐마몰리라는 사실이다. 제자는 스승의 해석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승의 견해를 존중하여 경의 문맥과는 정반대로 번역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역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도 약자가 인내해야 하는 것으로 번역했다. 이는 각묵스님이 각주에서 “냐나몰리 1962의 지적처럼”라고 말한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문맥상으로는 분명히 강자가 인내해야 한다. 그럼에도 문맥과 정반대로 약자가 인내해야 한다고 번역한 것은 빅쿠보디와 냐나몰리의 번역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빠알리 원문“nicca
 khamati dubbalo”을 직역했기 때문으로 본다.
 
힘 없는 자는 인내할 수밖에 없다. 힘이 없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내는 힘 있는 자가 해야 한다. 그래서 제석천은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라고 했다. 그런데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정반대로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라고 번역했다. 이처럼 정반대로 번역한 것은 빠알리 원문 “nicca khamati dubbalo”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빠알리 원문 “nicca
 khamati dubbalo”를 직역하면 초기불전연구원 번역대로 “힘없는 자는 항상 인욕해야 하도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경에서 전반적으로 흐르는 문맥을 보면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에서처럼 “힘 없는 자에게 인내하네”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이는 둡발로(dubbalo)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2016년도의 일이다. 그때 당시 니까야모임은 전재성 선생 홍제동 아파트 거실에서 열렸다. 그때 당시 상윳따니까야 1권 ‘시와 함께 모음’ 번역비교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정반대의 번역을 접하자 당황했다.
 
어떻게 정반대의 번역이 나올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에게 문의해 보았다. 이에 전재성 선생은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내 주었다.
 
 
“모든 학자들이 저와는 반대로 번역했군요. 그런데 nicca
 khamati dubbalo는 싯구인데, 시형론적으로 운율에 맞게 조정된 것입니다. 모든 학자들이 그것을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운율을 맞추기 위해 a가 생략된 것입니다. 시형론에서 부정의 접두사 a가 생략되는 것은 간혹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adubbalo는 ‘힘없는 자가 아닌 자’가 되어 ‘힘있는 자’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항을 알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운율학에 어는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전재성님, 강자의 인내와 약자의 인내,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tistory.com), 2016-05-29)
 
 
이 글은 2016년에 쓴 ‘강자의 인내와 약자의 인내,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tistory.com)’(2016-05-29)에 실려 있다. 글을 보면 모두 반대로 번역했음을 개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시형론과 운율학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게송은 매우 압축되어 있어서 대체로 심오하다. 또한 운율을 맞추기 글자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문제의 구절 “nicca
 khamati dubbalo”도 이에 해당된다.
 
정반대의 번역을 초래하게 한 “nicca
 khamati dubbalo”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dubbalo’이다. 여기서 ‘dubbalo’는 ‘힘 없는 자(Weak)’라는 뜻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힘 없는 자가 항상 인내한다.”가 된다. 냐나몰리도 이렇게 번역했다. 빅쿠보디도 은사를 따라 이렇게 번역했다. 각묵스님도 냐마몰리와 빅쿠보디를 따라 이렇게 번역했다. 그러나 전재성 선생의 시형론과 운율학에 따르면 다르다.
 
시형론에 따르면 dubbalo는 adubbalo에서 a가 탈락되어서 dubbalo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재성 선생은 “adubbalo는 ‘힘없는 자가 아닌 자’가 되어 ‘힘있는 자’라고 번역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런 번역에 대하여 “매우 복잡한 운율학에 어는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인내는 누가 하는 것일까? 인내는 강자가 하는 것일까? 인내는 약자가 하는 것일 까?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언제나 경전을 주문 할 수 있을까?
 
스리랑카 순례에서 BPS에 들른 것은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누군가 이야기 해 주지 않았다면 지나쳤을 것이다. 다행히도 김형근 선생이 일정에 포함 시켜서 가게 되었다. 또한 스리랑카에서 유학한 비구니 스님이 캔디에 가면 BPS에 꼭 들를 것을 언급해서 가게 되었다.
 

 
BP에서 세 권 샀다. 영역으로 필요할 때 열어 볼 것이다. 현재 빠알리경전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비교해서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 하나의 번역서에만 의지하기 보다는 여러 번역서를 참조해서 읽으면 원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BPS에서 세 권밖에 구매하지 못했다. 짐이 많아서 책을 많이 살 수 없었던 것이다. 귀국하면 못 산 경전을 구매하고자 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난 현시점까지 실행되지 않고 있다. 그때 마음과 지금 마음이 다른 것이다. 나는 언제나 못 산 경전, 즉 앙굿따라니까야, 맛지마니까야, 디가니까야, 수타니파타 영역본을 주문할 수 있을까?
 
 
2023-05-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