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성지순례기 27, 동굴은 열반과 동의어, 담불라 석굴사원에서
방에 있으면 편안하다. 왜 그럴까? 사방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벽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아늑할 것이다. 적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도 들 것이다. 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것이다. 동굴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비유의 천재이다. 부처님은 열반을 동굴로 비유했다. 어떤 내용일까? 상윳따니까야 ‘무위상윳따’(S43)를 보면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동굴이라고 한다.”(S43.41)라고 했다.
동굴은 열반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동굴의 안온함이 열반과도 같다고 했다. 이런 이유때문일까 수행승들은 동굴에서 수행을 했다. 부처님도 동굴에서 수행을 했다. 이는 “그 수행승은 빤다바 산 앞쪽에 있는 굴속에 호랑이나 황소처럼, 그리고 사자처럼 앉아 있습니다.”(Stn.41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출가자들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떠난 자들이다. 그들은 어디에서 머물렀을까? 이는 초기경전에서 “한적한 숲이나 나무아래나 산이나 계곡이나 동굴이나 묘지나 숲속이나 노천이나 짚더미가 있는 곳과 같은 격리된 처소를 벗으로 삼습니다.”(M60)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출가자는 동굴에서도 머물렀던 것이다. 스리랑카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스리랑카 성지순례기를 작성하고 있다. 현지에서 시점은 2022년 12월 14일 수요일 늦은 오전이다. 이번에는 담불라 황금사원(Golden Temple of Dambulla)이다 순례자들은 시기리야 등정을 마치고 담불라석굴사원으로 향했다. 시기리야에서 남서쪽으로 19키로 떨어진 곳에 있다.
석굴사원에 도착했다. 석굴 바로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했다. 계단을 통해서 올라갔다. 꽤 긴 길이의 계단이다. 계단을 오르자 꽃 파는 노파를 발견했다. 전향적인 스리랑카 여자노인의 모습이다.
노파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보라색 연꽃을 들고서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려 하자 사줄 것을 요청했다. 마침 꽃이 필요했다. 동굴사원에 가서 꽃공양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보라색 연꽃 이름은 무엇일까? 스리랑카 운전기사겸 가이드인 가미니가 여러 번 가르쳐 주었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스리랑카 말은 알아 듣기도 어렵고 발음하기도 힘들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닐마넬(nil mānel) 또는 닐 마하넬(nil mahanel)이다.
보라색 연꽃 닐마넬은 스리랑카 국화이다. 연꽃을 국화로 삼은 나라는 몇 나라 있다. 베트남도 연꽃이 국화이다. 스리랑카도 연꽃이 국화이지만 베트남과 차이가 있다. 스리랑카 국화는 수련이고 베트남 국화는 수련이 아닌 연꽃이다.
스리랑카 국화 닐마넬은 보라색이다. 이와 같은 수련을 국화로 삼는 나라가 하나 더 있다. 방글라데시도 국화가 보라색 수련이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에 따르면 보라색 나는 수련에 대하여 블루 로터스(Blue Lotus)라고 한다. 청색 연꽃, 청련(靑蓮)인 것이다.
초기경전에 청련에 대한 것이 있다. 이는 “대왕이여, 예를 들어 청련이 핀 연못이나 홍련이 핀 연못이나, 백련이 핀 연못에서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은 물 가운데서 생겨나고, 물 가운데서 성장하고, 물에서 나오지 않고, 물속에 잠겨 자라는데, 그것들의 꼭지에서 뿌리에 이르기까지 차가운 물이 스며들어 베어들게 되고 가득 채워지므로, 그 어떠한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이라도 차가운 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D2)라는 문구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청련은 빠알리어로 웁빨라(uppalā)라고 한다.
보라색 빛깔의 수련을 샀다. 다섯 송이를 받아 들었다. 꽃 다섯 송이를 가슴에 모으고 계단을 올라 갔다. 성지순례하는 것이므로 상의는 흰색 법복을 입었다. 모자는 쓰지 않았다.
담불라는 성지중의 성지이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 모자를 써서도 안된다. 성지 입구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물론 동굴에서 사진을 찍어서도 안된다. 성지입구에 스페셜 노티스(Special Notice)라고 하여 특별경고 안내판에 쓰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굴에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찍은 것이다. 이런 것도 허물이 될 것이다.
동굴이 있는 바위산에 이르렀다. 이제까지 사진으로만 보던 것을 직접 보게 되었다. 사진에서 익숙하던 장면이 그대로 재현 되었다. 그러나 사진과 다르게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지수화풍 사대로도 느낄 수 있다. 현지 아니면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담불라 석굴에 대한 구글지도를 보았다. 하늘에서 바라본 구글지도는 놀랍게도 거대한 바위덩어리이다. 산전체가 시커먼 바위로 되어 있는 것이다. 높이가 370미터 되는 바위산이다. 동굴은 바위산 중턱에 있는데 해발 180미터에 위치해 있다.
바위산에는 틈이 있기 마련이다. 틈이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을 것이다. 이를 동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동굴이라 하여 석회동굴처럼 긴 길이의 동굴이 아니라 바위의 경사진 아래도 동굴이 되는 것이다.
담불라석굴사원은 거대한 바위산 아래 경사진 곳에 있다. 경사진 곳 입구에 벽을 만들어 동굴처럼 보이게 했다. 이렇게 조성된 동굴이 다섯 곳 있다. 커다란 바위산 저 너머에도 동굴이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 못했다.
석굴사원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스리랑카에 불교가 들어올 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왕의 피신처와 관련이 있다. 기원전 1세기에 왓타가마니 아바야 왕(B.C 89-77)이 인도대륙의 타밀족 침입을 피해 이곳에 피난해 있었던 것이다. 무려 15년 있었다고 한다.
왓타가마니 아바야 왕에 대하여 왈라감바 왕이라고도 한다. 왓타가마니 왕은 이곳 담불라에 머물면서 힘을 키웠다. 마침내 타밀족을 물리치고 아누라다푸라로 돌아 갔다.
왓타가마니 왕은 은혜를 잊지 않았다. 동굴에서 머문 15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성지로 만들었다. 자신을 도와준 수행승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석굴사원을 조성하고 성역화 한 것이다.
담불라 동굴사원은 모두 다섯 곳이다. 모두 다 들어가 보지 못했다. 이 중에서 가장 볼만한 곳이 있다. 그곳은 제2동굴이다. 제1동굴과 함께 왓타가마니 왕 시절에 건립되었다. 그런데 제2동굴은 다섯 동굴가운데 가장 넓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일까? 길이가 무려 52미터이다. 깊이는 22미타이다. 높이는 6미터에 달한다. 이쯤 되면 운동장처럼 넓다고 볼 수 있다.
제2동굴에는 출입문이 두 개이다. 보통 왼쪽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나온다. 왼쪽 문으로 들어가니 어둠 속에 수많은 불상과 불화가 가득했다. 그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사람이 없을 때 들어 왔다면 어땠을까? 아마 현실과는 전혀 다른 천상과 같은 세상에 온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불자들은 절에 가면 대웅전에 들어간다. 대웅전에서 삼배를 하고 잠시 좌선하기 위해서 앉는다. 그때 천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이는 것은 온통 화려한 문양이다. 갖가지 불상과 불화가 있다. 코로는 향 냄새를 맡는다. 들리는 것은 고요속에 울리는 풍경소리이다. 석굴사원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법당 안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동굴 안에 앉아 있으면 어떠할까? 법당보다 몇 배 더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아늑함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동굴이 주는 안은함때문이다. 마치 모태의 뱃속에 있는 것과 같은 안은함과 안전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동굴을 열반으로 비유했을 것이다.
수행승이 동굴에서 살면 수행이 잘 될 것 같다. 이는 동굴이 주는 안은함과 안전감 때문이다. 벽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안전감을 더 느끼는 것과 같다. 하물며 동굴의 벽은 어떠할까? 벽은 무한대로 두터운 것이나 다름 없다.
깊은 동굴에 앉아 있다 보면 달리 할 것이 없을 것이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저절로 명상이 될 것 같다. 저절로 선정에 들 것 같다. 그래서일까 도를 이룬 사람들 상당수는 동굴이나 동굴과 유사한 토굴에서 수행했을 것이다.
“베비라 산과 빤다바 산의 동혈에
번개가 연이어 내리친다.
하지만 그 비할 데 없는 님의 아들은
산의 동혈에 들어가 선정에 든다.”(Thag.41)
테라가타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씨리밧다 장로가 읊은 것이다. 여기서 베비라 산과 빤다바 산은 라자가하 오악에 해당된다. 라자가하를 둘러 싸고 있는 다섯 개의 산이 있는데 그 중에 두 개인 것이다.
산에 가면 동굴이 있기 마련이다. 설령 동굴이 없다고 하더라도 바위 밑에 경사진 곳이 동굴이 될 수 있다. 수행승들은 거처가 없기 때문에 동굴에 머물렀다. 그런데 동굴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사실이다. 비바람이 불어도 번개가 쳐도 안전한 곳이 동굴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동굴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는 안전한 곳으로서 동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섬도 안전한 곳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윤회의 바다에서 안전한 곳은 섬이기 때문이다.
우기가 되어서 폭우가 쏟아지면 강물이 갑자기 불어난다. 폭류가 되어서 흐르는 바다와 같은 강에서 안전한 곳이 있다. 강 가운데 있는 모래톱이 있는 섬이다. 그 섬에 있으면 휩쓸려 가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않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않는다.”(D16.54)라고 했다. 자귀의 법귀의 하는 것이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이다. 이는 열반을 의미한다. 윤회의 괴로움에서 안전한 곳은 다름아닌 열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위상윳따를 보면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33가지 언표를 들었다.
33가지 언표는 무엇일까? 이는 무위, 궁극, 무루, 진리, 피안, 극묘, 지극히 보기 어려운 것, 불로, 견고, 비추어봄, 볼 수 없는 것, 무희론, 적멸, 불사, 승묘, 지복, 안온, 갈애를 부숨, 아주 놀라운 것, 예전에 없었던 것, 무재난, 재난 없는 상태, 열반, 무에, 사라짐, 청정, 해탈, 무착, 섬, 동굴, 피난처, 귀의처, 구경을 말한다. 이와 같은 33가지 언표 중에 동굴이 있다.
부처님이 동굴을 열반으로 비유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는 주석에서 “열반의 상태는 모든 유해한 숲으로부터 안전하게 동굴에 피신한 상태와 같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자신을 안전하게 피신하게 하는 것은 모두 동굴과 같은 것이다. 암자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당연히 석굴사원도 이에 해당된다.
동굴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레나(eṇa)이다. 레나는 단지 동굴(cave)만을 뜻하는 말은 아니다. 레나는 안전(safety)의 뜻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굴은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동굴이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이는 수타니파타에서 “동굴에 집착한다.”(Stn.772)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는 ‘참다운 진아는 동굴이라는 신체에 들어가 머문다’라는 우파니샤드 문구에 따른다. 여기서 동굴은 우리의 몸을 뜻한다. 오온에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동굴에 집착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굴은 피난처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피난처로서의 동굴은 열반을 상징한다. 열반은 폭류나 마군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와 같다. 섬으로서 열반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또한 열반은 해로운 번뇌의 숲에서 안전하게 동굴에 피신한 상태와도 같다. 피신처로서의 동굴을 말한다.
동굴은 수행승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수행승들이 거주하던 곳은 동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무 밑에도 있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이 있는 거처도 있었다. 이런 곳을 꾸띠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방사, 즉 정사(vihāra), 평부옥(aḍḍhayoga), 전루(pāsāda), 누옥(hammiya), 동굴(guhā)을 허용한다.”(Vin.II.146)라고 했다.
수행승이 홀로 머물 수 있는 곳에는 동굴이 있다. 숲속에 있는 꾸띠도 일종의 동굴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종종 오두막집을 뜻하는 꾸띠와 동굴을 뜻하는 구하를 같은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홀로 머물 수 있는 암자도 동굴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토굴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토굴 개념은 많이 바뀌었다. 토굴이라 하여 흙으로 지은 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는 주택도 토굴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아파트나 오피스텔도 토굴이 될 수 있다. 아파트에 있어도 안은하고 안전하기가 토굴과 같다면 깊은 산속에 있는 동굴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동굴에 들어 갔다. 제2동굴에 들어가서 불상에 꽃공양을 올렸다. 스리랑카 국화라 불리우는 청련, 보라색 닐마넬 몇 송이를 올렸다. 그리고 합장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옛날 어느 때 수행승들도 이렇게 부처님에게 공양 올렸을 것이다.
동굴 안에는 수많은 불상이 있다. 동굴 벽에는 수많은 벽화가 있다. 동굴에 있으면 딴 세상에 있는 것 같다. 가만 있어도 저절로 선정에 들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세상에서 가장 안은한 곳,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 동굴이다. 석굴사원도 그런 같다.
“수행승들이여, 동굴로 이끄는 길은 무엇인가? 신체에 대한 새김이나 멈춤과 통찰이나 사유와 숙고가 있는 삼매와 사유는 없지만 숙고가 있는 삼매와 사유도 없고 숙고도 없는 삼매나 있음을 여읜 삼매와 인상을 여읜 삼매와 바램을 여읜 삼매나 네 가지 새김의 토대나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이나 네 가지 신통의 기초나 다섯 가지 능력이나 다섯 가지 힘이나 일곱 가지 깨달음 고리나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동굴로 이끄는 길이라고 한다.”(S43.41)
담불라석굴사원은 스리랑카에 불교에 들어오면서부터 조성되었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시대를 달리하지만 개보수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석굴이 만들어진 것이다.
담불라석굴사원 조성에는 세 명의 왕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 기원전에 이곳에서 살았던 왓타가마니 아바야 왕(B.C 89-77)으로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스리랑카 중세에 해당되는 닛산카말라 왕(1187-1196) 때에는 크게 부흥했다. 석굴의 불상에 금박을 붙이고 벽화를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이를 스와르나 기리구하(Swarna Giriguha) 라고 했는데 이는 ‘황금바위동굴’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담불라 황금사원(Golden Temple of Dambulla)’이라 부르는 근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키르티 쉬 리 왕(1747-1780)은 벽화 전부를 새로 치장했다. 오늘날 보는 벽화는 모두 이때 작품이다. 이렇게 담불라 석굴사원은 이천년에 걸쳐서 조성되었다.
담불라석굴사원을 일부만 보았다.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제1동굴과 제2동굴을 본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이 자리에 있다. 사람들은 바뀌고 없지만 장소는 남아 있다. 무려 이천년이나 지속되었다.
순례자들은 끊임없이 밀려든다. 한무리의 순례자들이 지나가면 다음 순례자들이 찾아 온다. 참배를 마치고 나오니 일단의 흰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단체로 관람하러 왔다. 석굴사원은 스리랑카 불자들에게 성지중의 성지인 것이다.
석굴사원은 커다란 바위산 아래에 있다. 바위가 움푹 패인 곳에 석굴사원을 건립해 놓았다. 이천년동안 공양이 계속되어 왔다. 스리랑카 불교의 산역사와 같다. 검은 바위산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 전망이 탁 트인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까지 밀림의 바다이다. 그 옛날 수행승들도 이곳에 서서 아래를 바라 보았을 것이다.
2023-03-3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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