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스리랑카 성지순례기 26, 부왕을 살해한 업보는, 시기리야 바위산 정상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22. 14:59

스리랑카 성지순례기 26, 부왕을 살해한 업보는, 시기리야 바위산 정상에서

 

 

시기리야 가는 날이다. 시기리야 오두막집에서 753분에 출발했다. 날씨는 밝고 쾌청했다. 남국에서 12월은 상하의 나라이다. 녹음이 우거져 있어서 나목이 된 한국의 계절과는 다르다.

 

시기리야는 성지가 아니다. 왕이 살았던 유적이 있는 곳이다. 한때 왕국의 수도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성지에 가면 흰 옷을 입어야 하나 그럴 필요가 없다. 색깔이 있는 옷과 햇볕을 가리기 위한 모자를 썼다.

 

현지에서 시점은 20221214일 수요일 이른 오전이다. 순례자들은 시기리야록을 향했다. 숲속의 오두막집이 있는 에코리조트에서 시기리야 입구까지는 5키로 거리로 자동차로 십분가량 걸렸다.

 

 

스리랑카 대표 관광명소

 

시기리야는 스리랑카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관광명소이다. 스리랑카 어디에서나 시기리야를 배경으로 하는 포스터를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관광지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입장료가 가장 비싸다. 외국인에게는 30불이다. 폴론나루와가 25불로 그 다음이었다.

 

 

남쪽나라는 뭐든지 호기심천국이었다. 보는 것마다 처음이어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가 우리나라와 달랐다. 가지가 아래로 뻗은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아열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시기리야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남긴 사진을 보고 알았다. 한마디로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높은 바위산 위에 궁전을 지었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마치 우리나라 산사가 절벽에 있는 것과 같은 불가사의한 느낌이다.

 

시기리야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구글에서 ‘sigiriya’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위키백과가 뜬다. 요즘에는 구글번역기를 이용하면 쉽게 영문을 한역할 수 있다.

 

시기리야는 사자바위라는 뜻이다. 왜 사자바위일까? 그것은 바위가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곳에 궁전을 지어 놓았을까? 이는 거대한 바위산이 요새와도 같기 때문이다.

 

 

시기리야 바위산은 높이기 180미터에 달한다. 남산은 높이가 270미터인데 100미터 낮다. 남산은 흙으로 되어 있으나 시기리야는 바위산은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시기리야 바위산이 궁전으로 선택된 것은 카샤파 왕(477-495) 때이다. 카샤파 왕이 새로운 수도로 시기리야를 건설한 것이다. 왕은 이 바위 산에 궁전을 짓고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측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궁전은 왕이 죽고 난 후에 버려졌다. 지금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현지인가이드 아쇼카

 

시기리야는 스리랑카를 찾는 이라면 꼭 보아야 하는 필수관광코스이다. 스리랑카 성지순례를 목적으로 왔지만 반드시 성지만 찾아 가는 것은 아니다. 때로 역사기행도 하고 문화기행도 한다.

 

시기리야는 역사기행 장소이다. 그래서일까 가이드를 하나 붙여 주었다. 시기리야 현지가이드를 말한다. 두 명을 위에서 현지가이드를 붙여 준 것이다. 가이드 이름은 아쇼카이다.

 

 

현지인 가이드는 사오십대 중년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 두 명을 안내하면서 시기리야 바위산 꼭대기까지 함께 올라갔다. 매일 하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This is my job, It is hard work.”라고 말했다. 가이드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매우 힘들다고 했다. 보험도 들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안전에 주의한다고 했다.

 

현지가이드는 영어로 말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기 때문에 잘 귀담아 들으면 어느 정도 이해 했다. 가이드는 이곳을 가리키며 이곳은 이곳은 건기에 왕이 머물렀던 아래 궁전입니다.”라고 말하고, 또한 저곳을 가리키며저곳은 왕의 수영장입니다.”라고 말했다.

 

 

격자모양의 계획도시

 

시기리야는 바위산에 있는 궁전만 보는 것이 아니다. 바위산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나라의 수도가 있던 곳이기 때문에 평지에도 궁전이 있었다. 그래서 우기에는 바위산에 있는 궁전에 머물렀고 건기에는 바위산 아래에 있는 평지 궁전에 머물렀던 것이다.

 

시기리야는 마치 요새와도 같다. 해자가 성곽 주변을 둘러 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중으로 감싸고 있이다. 계획적으로 건설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대도시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사례중의 하나라고 한다.

 

관람은 서쪽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동쪽 끝에는 아스리히 시기리야 바위산이 보인다. 계획도시로 건설되어서일까 격자모양의 정원이 있다. 이를 워터가든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물의 정원인 것이다. 격자모양의 저수지에는 물이 풍부했다. 또한 왕의 수영장도 있었다고 하니 왕의 영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직진할수록 바위산은 점점 다가 왔다. 서쪽게이트에서 바위산까지는 거의 1키로가량 된다. 이른 오전이서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다. 독일에서 온 어느 젊은 여인과 함께 걸었다. 독일 여인은 혼자 왔다고 한다. 한국에도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가는 곳마다 유적이 있다. 가는 곳마다 이야기가 있고 전설이 있다. 천연 지형을 이용해서 건설되었기 때문에 자연과 인공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워터가든 3에서 본 커다란 바위는 보는 이로 하여금 힘을 느끼게 한다.

 

 

난공불락의 천연요새

 

곳곳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 사이에는 공간이 있는데 굴이 된다. 굴은 좋은 수행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곳 시기리야는 왕궁이 들어서기 전에 이미 출가 수행승들의 수행처였던 것이다.

 

 

시기리야는 천연 요새와도 같다. 인공으로 격자모양의 해자를 이중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천연 출입문도 있다. 커다란 바위와 바위 사이에 틈이 있는데, 이 비좁은 틈이 마치 성문처럼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터널을 지나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바위사이 출입문을 지나자 갑자기 거대한 시기리야 바위산이 나타났다. 이곳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오로지 계단만 있는 곳이다.

 

 

바위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전망은 좋아진다. 바위산 중턱에는 붉은 벽돌만 있는 유적이 있다. 사람들은 중간에서 쉬었다가 간다. 그리고 아래 세상을 내려다 본다.

 

 

가파른 계단을 계속 올랐다. 철제로 되어 있어서 앞만 보고 올라가면 된다. 때로 바위를 깍아 만든 계단도 나타났다. 이렇게 오르다 보니 마침내 바위산 궁전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커다란 사자발톱이 나타났다.

 

 

사자발톱이 있는 광장에 섰다. 이곳에서 숨을 고르고 한번 쉰 다음에 또다시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거대한 사자발톱을 보면 마치 어드벤처 영화의 한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사자발톱 모양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건축가들은 매우 상상력이 풍부했던 것 같다. 주변 자연환경을 잘 이용하여 정교하게 가공한 것이다. 사자의 발톱도 상상한 것보다 휠씬 크게 만들었다. 이 정도 발톱크기이면 몸체는 더 클 것이다. 실제로 바위산은 사자의 몸통모습을 하고 있다.

 

 

사자의 발톱이 있고 몸통이 있다면 당연히 사자의 머리도 있을 것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 머리가 보일 것이다. 발톱 가까이에서는 머리 모양을 알 수 없다. 다만 발톱과 발톱 사이에 입구가 있어서 마치 어드벤처 영화의 한장면처럼, 마치 놀이공원의 한입구처럼 들어가는 것이다. 이쯤 되면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라고 볼 수 있다.

 

왜 바위산 꼭대기에 궁전을 지어야 했을까?

 

사자발톱 입구에서 꼭대기까지는 철제 계단이 설치 되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꼭대기까지 올라갔을까? 계단 유적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 다만 바위에 구멍을 뚫은 자국이 있어서 나무로 계단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바위산에 오르는 도중에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높은 곳에서 보는 경치는 상쾌했다. 산 아래는 온통 밀림이다. 밀림의 바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위산 주변에 인공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모두 몇 계단이나 될까? 계단을 오르면서 세어 보았다. 정상에 이르렀을 때 모두 333계단이었다. 한계단 높이가 20센티라면 발톱에서부터 바위산 정상까지는 66미터가 된다.

 

마침내 바위산 정상에 올랐다. 지금은 폐허가 된 격자모양의 터만 남아 있다. 수많은 벽돌을 이곳 정상까지 운반에서 궁전을 건설했을 것이다. 5세기에 건설되었으니 1600년된 것이다.

 

 

 

 

왕은 왜 이런 바위산 꼭대기에 궁전을 지어야 했을까? 이는 왕권에 대한 욕망과 관련이 있다.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455년부터 스리랑카를 지배했던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다투세나 왕에게는 장남 카샤파와 차남 목갈라나라는 아들이 두 명 있었다. 그런데 장남인 카샤파의 어머니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차남 목갈라나의 어머니는 왕가의 출신이었다. 이는 카샤파가 장남이긴 하지만 왕위를 상속받기에 불리한 조건에 있었다는 뜻이었다.

결국 473년에 카샤파는 다투세나의 조카이자, 군대의 지휘관인 미가라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인 다투세나를 투옥시킨 후 스스로 왕위에 올라 카샤파 1세가 되었다. 왕이 된 카샤파 1세에게 미가라는 다투세나가 숨겨둔 보물에 관한 얘기를 하였고 카샤파 1세는 투옥한 다투세나에게 그 보물이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줄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다투세나가 보여준 보물이라는 것은 카샤파 1세의 기대와 달리 그가 재임 중일 때 만들었던 관개 시설용 저수지였다. 이에 화가 난 카샤파 1세는 아버지를 죽이고 말았다.

아버지를 죽인 일 때문에 카샤파 1세의 평판은 스리랑카 전역에서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쿠데타 때 동생 목갈라나가 인도로 도망쳤는데 왕권의 정통성을 가진 동생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 한 카샤파 1세는 477,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를 떠나 시기리야로 옮겨 거주하게 된다.”(나무위키)

 

(인터넷)

 

 

카샤파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탈취했다.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고 왕이 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를 죽였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특히 이복동생으로부터 보복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난공불락의 시기리야를 수도로 삼게 되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고 하는데

 

흔히 부자지간에도 권력을 나눌 수 없다고 말한다. 부자지간에는 늘 긴장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형제지간에도 긴장관계가 있었다. 아니 왕족이 되면 늘 불안에 떨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권력의 속성때문이다.

 

쥐꼬리만한 권력도 맛들이면 헤어나오지 못한다. 군대에서 병장이 되면 사성장군 못지 않은 권력을 누린다. 하물며 왕이 곧 나라인 왕조시대에 왕권은 어떠했을까?

 

왕권은 부자지간에도 형제지간에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아들이 부왕을 감금하거나 살해하여 왕권을 탈취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유사이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있어 온 것이다. 스리랑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초기경전에서도 아들에 의한 권력찬탈을 종종 볼 수 있다. 꼬살라 빠세나디왕도 아들 비두다바에 의해서 왕권이 탈취당했다. 대표적으로 아자따삿뚜를 들 수 있다.

 

아자따삿뚜는 악인의 대명사 데바닷따의 사주를 받아 아버지 빔비사라왕을 살해하고자 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율장 소품 참모임 분열의 다발에 실려 있다. 이는 데바닷따의 음모이야기를 말한다.

 

데바밧따의 음모는 어떤 것인가? 이는 왕자여, 예전에 사람들은 목숨이 길었습니다. 오늘날은 목숨이 짧습니다. 그대는 왕자일지라도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자여, 그대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십시오. 나는 세존을 죽이고 부처님이 되겠습니다.”(Vin.II.190)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아들이 왕권을 탈취하는 것을 보면 공통적인 현상이 있다. 주변 사람이 부추긴다는 것이다. 꼬살라의 비두다바 왕자는 총사령관 디가까라야나가 부추겼다. 아자따삿뚜 왕자를 부추긴 것은 악한 수행승 데바닷따였다. 스리랑카 카샤파 왕자를 부추긴 것은 군대의 지휘관인 미가라였다.

 

총명하지 못한 왕자 주변에는 권력에 눈 먼 자들이 있다. 이들의 부추김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살해를 하여 패륜을 저지른다. 그런데 패륜은 또 다시 패륜을 부른다는 것이다. 아자따삿뚜가 아버지를 죽였듯이, 아자따삿뚜 역시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왕권은 부자지간에도 형제지간에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해법이 있을까? 놀랍게도 자타카에 그 해결방법이 있다.

 

왕겨에 얽힌 본생이야기(Thusajataka)

 

자타카를 다 읽었다. 작년에 교정작업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보았다. 자타카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올해 20231월에 출간된 바 있다. 그런데 자타카에 아자따삿뚜에 의한 왕권탈취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비극을 방지하기 위한 해법도 제시되어 있다. 이는 338번 자타카 왕겨에 얽힌 본생이야기(Thusajataka)’가 바로 그것이다.

 

왕겨에 얽힌 본생이야기에서 보살은 선생으로 나온다. 당시에 딱까실라에 시에서 명성을 떨치던 선생이 바로 부처님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왕비의 임신에서부터 시작된다.

 

빔비싸라왕은 왕비가 임신하자 점성가에게 아이의 운명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점성가는 놀아운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패륜행위에 대한 것이다. 점성가는 왕비의 모태에서 태어나는 자가 폐하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할 것입니다.”(Jat.338)라고 말했다.

 

왕은 점성가의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이런 사실을 왕비도 알게 되었다. 왕비는 낙태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왕은 말렸다. 왕은 여보, 나의 아들이 나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늙지 않고 죽지 않습니다. 아들의 얼굴을 내가 보게 해 주시오. 지금부터 그와 같은 일을 하지 마시오.”(Jat.338)라고 말했다.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적이었던 관계로 사람들은 그에게 아자따삿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자따삿뚜(ajātasattu)라는 말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적이라는 뜻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자타카에서는 아자따삿뚜와 같은 케이스 이야기가 있다. 보살이 선생이었을 때 바라나시에 브라흐마닷따 왕이 다스렸는데 아들이 있었다. 왕자는 딱까실라로 유학가서 선생에게 배웠다.

 

선생은 왕자에게 예언 했다. 왕자가 왕이 되었을 때 아들 때문에 위험이 생겨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세 개의 시를 외게 했다. 아들인 왕자가 자신을 살해하려고 할 때마다 하나씩 외우라고 한 것이다.

 

왕자가 16세가 되었을 때이다. 왕자는 왕의 영광스런 권세를 보았다. 그 결과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왕자는 독약으로 왕을 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왕은 딱까실라 선생에게서 받은 첫번째 게송을 외웠다.

 

첫번째 게송은 어떤 것일까? 이는 쥐들은 왕겨에 대해 알지만, 쌀에 대해서도 안다. 왕겨는 왕겨마다 버리지만, 쌀만은 골라서 먹는다.”(Jat.338)라는 내용이다. 아들은 이 게송을 듣자 자신의 계획이 탄로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독약을 넣는 것을 그만 두었다.

 

아들은 세 번에 걸쳐서 부왕을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그때 마다 선생이 준 게송을 외워서 위기에서 벗어났다. 아들은 왕에게 용서를 빌었다. 왕은 아들을 꾸짖고 쇠사슬로 묶어서 감옥에 넣고 파수꾼을 붙였다.

 

빔비사라왕은 아자따삿뚜의 음모에 관대했다. 아들이 왕권을 원하면 물려 주기로 한 것이다. 이는 율장 소품에서 왕자여, 만약 그대가 왕위를 얻고자 한다면, 이 왕국은 그대의 것이다.”(Vin.II.19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빔비사라왕의 유폐로 나타났다. 결국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는 아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다.

 

자타카를 보면 왕권을 노리는 왕자에게 매우 엄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왕권찬탈의 음모가 발각되자 감옥에 보낸 것이다. 그것도 왕이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어야 했다. 왕이 죽었을 때 비로소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빔비사라 왕은 왕자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왕위를 스스로 물려 주었다. 그 결과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나타났다.

 

시기리야 바위산 정상에서

 

시기리야 바위산 정상에 섰다. 사방을 둘러 보았다. 저 멀리 지평선까지 밀림의 바다가 펼쳐졌다. 방향은 동인지 서인지 가늠할 수 없다.

 

현지인 가이드는 저 멀리에 있는 높은 산 너머는 아누라다푸라라고 했다. 시계방향으로 또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저 멀리에 있는 높은 산 너머에 폴론나루와가 있다고 했다. 또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저 멀리에 있는 높은 산 너머에 캔디가 있다고 했다. 시기리야가 교통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흔히 자업자득, 자작자수라고 한다. 아버지 왕을 죽이고 왕이 된 아들은 불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 높은 곳에 살고자 했을 것이다. 왕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왕은 시기리야에 머문 기간은 오래 되지 않았다. 왕은 18년 집권 했는데 시기리야 건설에 대부분 시간을 바쳤을 것이다. 이복동생인 목갈라나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영화는 끝났다.

 

 

율장 소품에 하나의 게송이 있다. 부처님은 자신을 살해고자 했던 데바닷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했다.

 

 

파초와 대나무와 갈대는

자신의 열매가 자신을 죽이네.

수태가 노새를 죽이듯,

명성이 악인을 죽이네.”(Vin.II.187)

 

파초와 대나무와 갈대는 열매를 맺으면 시들어 죽는다. 악인도 열매가 익으면 죽는다. 부처님을 살해하여 스스로 부처님이 되고자 했던 데바닷따는 명성이 죽인 것이다.

 

아버지를 살해한 왕자들이 있다. 그들은 왕권이 탐이 나서 부왕을 죽였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것도 부모살생업이라는 중죄를 지은 것이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살해하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살해하면 무간업이 된다. 무간업을 지으면 일겁동안사이지옥에서 보내게 된다. 어떤 곳인가?

 

우주와 우주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한다그런데 그 간극에 지옥이 있다고 한다이 지옥을 로깐따리까라고 한다간극지옥 또는 사이지옥이라고 한다아버지를 살해하거나 어머니를 살해하는 등 무간업을 지은 자들이 가는 지옥을 말한다한우주기 동안(一刧구제받지 못하는 암흑지옥이다잊혀진 존재들이 사는 잊혀진 세계이기도 하다.

 

무간업을 짓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권력에서 떼어 놓아야 한다. 감옥에 가두거나 멀리 보내는 것이다. 자타카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속성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아들의 왕권찬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서 전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다. 비단 왕권만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의 재산이 탐나서 아버지를 죽이는 경우도 있다. 이 모두가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권력욕이나 재물욕이 있는 한 부모를 죽일 수 있다. 지금도 계속 되고 있고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행위를 하면 과보가 뒤따른다는 부처님 가르침만이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누구도 악한 욕망을 품고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악한 욕망을 품은 자의

그와 같은 운명을 알게 되리라.”(Vin.II.203)

 

 

2023-03-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