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스리랑카 성지순례기24, 갈 비하라 입상은 아난다상인가 불상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3. 10. 14:13

스리랑카 성지순례기24, 갈 비하라 입상은 아난다상인가 불상인가?
 
 
스리랑카 불상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스리랑카 사람들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 나라의 불상은 그 나라 사람들 모습을 닮은 것이다. 인도불상, 중국불상, 한국불상, 일본불상, 태국불상, 미얀마불상이 다른 것도 자신이 속한 나라 사람들의 얼굴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스리랑카 성지순례기 24번째 이야기는 갈 비하라 불상에 대한 것이다. 갈 비하라는 폴론나루와 북단에 위치에 해 있는데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상이 있다. 현지에서 시점은 2022년 12월 13일 중간 오후쯤 된다.
 
순례자들은 랑콧사원과 랑카틸라카 사원을 순례하고 난 다음 갈 비하라로 향했다. 갈 비하라는 랑카틸라카에서 불과 오백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 그럼에도 툭툭으로 이동했다.
 

 
고대도시 폴론나루와에는 차와 사람이 거의 없다. 갈 비하라에 도착하니 순례자들은 우리일행과 스리랑카 불자들 네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평일이고 행사가 없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한번 바위에 새겨 놓으면
 
갈 비하라 불상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네 기의 불상을 보면 각각 특색이 있다. 가장 좌측에 선정상이 있는데 언젠가 블로그에 명상하는 사람이 아름답다라는 취지로 글을 썼는데 그때 사진으로 활용한 바 있다.
 
스리랑카 불상을 보면 사마디불상이 많다. 눈을 감고 두 손을 포개어 놓은 자나무드라, 즉 선정인상 불상을 말한다. 이런 사마디 불상은 아누라다푸라에서도 보았고, 폴론나루와 하타다게에서도 보았다.
 

 
 
스리랑카 사마디불상은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상이 되었다. 현재 스리랑카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 불상은 선정인을 한 사마디불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정불상을 보면 ‘거룩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명상하는 모습은 아름답다’라고 글을 쓴 것이다.
 
갈 비하라 불상을 처음 접한 것은 아마 2007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 외국인스님이 스리랑카 순례를 하고 난 다음 인터넷에 사진을 올렸는데 갈 비하라 좌상도 있었다.
 

 
불상 표정은 근엄하고 거룩해 보였다. 언젠가 볼 것을 기대했는데 마침내 시절 인연이 되어서 보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은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불과 30분 보았다. 그럼에도 후기를 쓰기 위하여 사진을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무엇이든지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은 오래간다.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천년만년이 아니라 백만년 갈 수도 있다. 인류가 사라지고 없어져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옛날 사람들은 바위에 흔적을 남기는 것 같다.
 
불교 말세가 되었을 때
 
갈 비하라 불상은 12세기 파라크라마바후 1세 때 조성되었다. 스리랑카 중세시대에 해당되는 폴론나루와 왕국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상을 만들게 되었을까? 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는 승단정화와 관련이 있다.
 
스리랑카는 인도 대륙으로부터 종종 침략을 당했다. 그럴 때마다 왕국이 무너지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동시에 이민족의 종교도 들어 왔다. 또한 대륙의 새로운 사조의 불교도 들어 왔을 것이다.
 
새로운 사조의 불교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변질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스리랑카에서 그랬다. 정법이 변질 되었을 때 어떻게 될까? 이는 수행승들의 타락으로 나타난다.
 
테라가타에 승단의 타락을 나타내는 게송이 있다. 이는 “미래의 시기에 최후의 시대가 오면, 수행승들과 수행녀들의 행실이 이와 같으리라.”(Thag.977)라는 게송을 말한다. 여기서 최후의 시대는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불교에서의 말세는 학습의 시대부터 시작된다. 해탈의 시대도 지나고 삼매의 시대도 지나고 계행의 시대도 지나서 학습의 시대가 되면 “탐욕 등의 욕망 때문에 계행이 완전히 청정하지 못하고 학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Thag.A.III.89)라고 했다.
 
논의의 주제를 끝으로 하는 학습이 일체 사라지면 그로부터 부처님 가르침은 흔적만 남을 것이라고 한다. 승가에 더 이상 부처님 가르침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승려들은 그때부터 재물을 모아 보시로서 베푼다고 보았다. 이를 보시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 보시의 시대가 최후의 시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중세시대 때 승단은 최후의 시대를 보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마치 이교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그러나 그들은 이교도의 제자가 설한 아름다운 단어와 아름다운 말귀로 이루어진 경전이나 시문을 낭독하고, 그것들이 설해질 때, 그들은 잘 듣고 귀를 기울이고 알고자 하는 마음을 내고, 그것들을 배워서 통달하고자 그 가르침에 관해 사유한다.”(A5.79)라고 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이교도의 것이 들어 왔을 때 정법은 오염된다. 정화하지 않으면 정법은 사라질 것이다. 정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수행승들은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이는 경전에서 “우빨리여, 세상에 수행승들이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침이라 설하고, 가르침을 가르침이 아닌 것이라고 설하고, 계율이 아닌 것을 계율이라 설하고, 계율을 계율이 아닌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말하지 않고 설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말하고 설한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행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행한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행한 것을 여래가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규정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규정한 것이라고 설하고, 여래가 규정한 것을 여래가 규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한다.”(A10.37)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파라크라마바후 왕은 스리랑카 폴론나루와 왕국 황금시대를 열었다. 국력은 크게 신장되어서 미얀마에 원정군을 파견할 정도의 국력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인도 대륙의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런 때에 불교 정화의 필요성도 느꼈을 것이다.
 
승려들의 행동강령 카티카바타(katikavata)
 
부처님 가르침은 영원히 지속될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부처가 출현하여 가르침을 펼치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후대로 내려 갈수록 담마는 변질이 되어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과거불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부처가 출현하면 오로지 한부처님만 있게 된다. 두 부처님이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부처가 출현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면 모두 동일한 깨달음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하늘에 하나의 태양이 떠 있는 것과 같다.
 

 
부처가 출현하면 부처님의 법이 오래 유지되고 있다면 정법시대이다. 정법시대는부처님의 원음이 전승되어 오고, 팔정도 수행법이 있고, 팔정도 수행법으로 사향사과를 이룬 성자들이 출현할 때로 본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법시대인가?
 
지금은 정법시대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원음이 잘 전승되어 온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정법은 정법을 지켜 내기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노력중의 하나가 파라크라마바후 왕 때 승단 정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영문판 위키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Parakramabahu I)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 나라의 불교 승려들은 아바야기리 비하라(Abhayagiri vihāra), 제타바나라마야(Jetavanaramaya) 및 마하비하라(Mahavihara)의 세 파로 나뉘었다. 그는 세 파를 화해시키기 위해 승가회의를 소집했고, 부패한 수행승들을 추방함으로써 교단을 정화했다. 각 파의 장로들의 도움으로 그는 나중에 불교 승려들을 위한 카티카바타(katikavata,행동강령)를 작성하고 이를 웃타라라마(Uttararama)의 비문에 기록했다.”(Gal Vihara, 영문판 위키백과)
 

(인터넷)

 
여기서 주목하는 말은 카티카바타(katikavata)이다. 이를 행동강령이라고 한다. 일종의 청규같은 것이다. 정화된 승단에서 어떻게 행위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카티카바타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인터넷에 따르면 스리랑카 콜론나루와 갈비하라 바위 각문이라고 한다. 이 각문은 1165년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선행과 승가 규율을 제정하여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불교 회의를 소집한 기록이 들어 있는데 “승가의 율장 규칙에 어긋나는 아이를 낳거나 주술적 의식을 행한 많은 승려들이 불교 교단에서 추방되었다.”라고 한다.
 

(인터넷)

 
카티카바타는 율장에 충실한 행동강령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스리랑카 중세시대 때 불교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인도 대륙에서 새로운 사조가 들어 옴에 따라 정법이 오염되고 변질된 것이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아바야기리 비하라와 제타바나 비하라를 폐지하고 마하비하라 위주의 단일 종파가 성립되었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에 의한 승단정화는 아소까 대왕의 승단정화와 오버랩된다. 이는 정법을 수호하는 것이다. 어떻게 정법은 수호되는가? 갈마를 통해서 수호된다. 수행승들이 모여 포살과 자자를 하는 것이 결국 정법을 수호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파라크라마바후 1세는 새로운 승가 행동강령을 만들어 바위에 새겼다는 것이다.
 
외부 힘에 의해서 정화된 불교의 미래는
 
카티카바타는 어떤 내용일까?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나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무관심하게 남아 있다면, 순결한 불교에 오점을 몇 번이고 보게 되어서 불교는 멸망하고 많은 중생들이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천 년 동안 지속될 수 있도록 종교를 섬기게 하소서”라고 소개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파라크라마바후 1세는 스리랑카를 부흥하게 한 군주일 뿐만 아니라 불교를 개혁한 군주이기도 하다.
 
본래 왕은 승가의 일에 개입할 수 없다. 이는 율장에서도 확인 된다. 그럼에도 중세스리랑카에서는 승단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왕의 개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승려가 되려면 왕의 인증이 필요했다.
 

(인터넷)

 
 
바위 각문 카티카바타는 율장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살자는 것이다. 다만 부칙이 문제가 된다. 아무나 승려가 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이전에는 승단에서 계를 주면 누구나 승려가 될 수 있었으나 왕의 인증이 있어야만 승려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카티카바타는 전통아닌 전통이 되었다. 태국에서는 스리랑카 전통을 차용했다. 태국에서 승려가 되려면 왕실 또는 정부의 인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본래 부처님 가르침과 어긋난다. 재가의 왕이 승려가 될 수 있는 사람을 결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규칙이 생겨난 것은 승단 내부에서 정화가 되지 않아서 외부 힘에 의해서 정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카티카바타 각문을 보지 못했다. 가이드가 말해 주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설명해 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 후기를 쓰면서 각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동굴 좌상 불상 양 옆에 각문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불법을 수호하는 브라흐마와 비쉬누
 
갈 비하라에는 네 기의 불상이 있다. 큰 좌상, 작은 좌상, 입상, 와상을 말한다. 모두 화강암에 조각한 것이다. 그런데 모두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케이스는 보기 드물다. 그것은 아마도 단단한 화강암 재질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좌상은 동굴 안에 있다. 인조로 만든 동굴이다. 이 작은 좌상을 보면 우리나라 석굴암이 연상된다.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두 기의 수호신이 있다. 이는 브라흐마와 비쉬누신이다.
 

 
브라흐마와 비쉬누신은 힌두교를 대표하는 신이다. 브라흐마는 창조의 신이고, 비쉬누는 유지의 신이다. 그런데 두 신은 불상을 수호하는 이미지로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석굴암에서 금강역사상과 같은 위치에 있다.
 
스리랑카 법당에 가면 힌두교 신이 수호신으로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번에 갈 비하라 작은 좌상에서 브라흐마신과 비쉬누신을 보니 스리랑카에서는 힌두교가 불교에 종속된 것처럼 보인다.
 
인도에서 불교신자는 극소수이다.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다. 그런데 힌두교는 불교에 자극 받아 성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소까 대왕 당시 브라만교가 불교에 크게 밀리자 브라만교 환골탈태하여 성립된 것이 힌두교이다. 브라만교가 인도 토속신앙과 결합된 것이 힌두교인 것이다.
 
힌두교는 창조의신 브라흐마, 유지의 신 비쉬누, 파괴의 신 시바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힌두교에서는 부처님을 비쉬누 신의 열 가지 아바타중의 하나로 본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힌두교가 불교를 흡수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리랑카에서는 힌두교의 창조신과 유지신이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입상은 아난다상인가 불상인가?
 
네 기의 불상 중에 입상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입상에 대하여 아난다 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스리랑카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부처님 상이라고 했다. 그것도 위장이 문제가 있어서 고통을 참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고 했다. 그 증거로서 허리가 약간 뒤틀려 있는 것을 들었다. 오른쪽 다리도 약간 뒤틀린 것도 말했다.
 

 
가이드 말은 진실일까? 그런데 가이드 한 사람만 말한 것이 아니다. 두 명의 가이드가 그렇게 말했을 때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먼저 입상은 아난다상인가 불상인가?
 
어떤 이는 입상에 대하여 아난다 상이라고 한다. 와상 옆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두 번째로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처님의 완전한 열반을 지켜 본 사람은 아난다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까지 입상은 아난다상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후기를 쓰는 과정에서 믿음이 무너졌다. 네 기의 불상은 모두 부처님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영문판 위키백과에서 여러 가지 사실을 들어 설명해 놓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서있는 이미지는 부처의 동상이 아니라는 일반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역사가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의 초점입니다. 이미지의 높이는 6.93m(22피트 9인치)이고 연꽃 모양의 낮은 받침대 위에 서 있습니다.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팔을 가슴 위로 접습니다. 동상의 얼굴은 슬픔에 잠긴 표정을 하고 있고, 부처의 반열반을 묘사한 와상이 그 옆에 놓여 있어 일부 사람들은 임종 시 부처의 죽음을 한탄하는 승려 아난다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벽의 잔해는 두 개의 이미지가 서로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방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영문판 위키백과)
 

 

 
영문판 위키백과 내용은 구글번역기를 이용한 것이다. 입상이 불상이라는 증거에 대하여 별도의 방이 있었던 것을 들었다. 이는 와상과 구분되어 방이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벽돌 잔해가 이를 증명한다.
 
입상과 와상은 벽돌로 된 방으로 분리 되어 있다. 현지에서 촬영한 사진으로도 알 수 있다. 입상이 아난다상이라면 한방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벽돌 잔해를 보면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입상이 불상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부처님의 대연민 마하 까루나
 
입상이 불상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슬픈 표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타인의 슬픔에 대한 슬픔”을 묘사한 것이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깨달음 후에 두 번째 주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에 대하여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지혜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늘 함께 있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을 때 해탈의 기쁨을 누렸지만 중생에 대한 자비심도 있었다. 이는 니까야 도처에서도 볼 수 있다. 이를 마하 까루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마하 까루나에 대한 이야기가 수없이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을 때 사함빠띠 브라흐마는 “수많은 사람의 슬픔을 없애주네.”(S6.2)라고 했다. 전도선언에서는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고 했다.
 
부처님은 연민에 가득 찬 분이다. 이는 부처님이 “바라문이여, 누군가에 대해 ‘어리석음을 뛰어넘은 존재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에 나타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마하 까루나, 대연민의 마음이 석상으로 나타난 것이 아마 스리랑카 고대도시 폴론나루와 갈 비하라에 있는 입상 부처님일 것이다.
 
갈마와 정법수호
 
한국에서 해방 후에 불교정화가 있었다. 소수의 독신비구승이 다수의 처자가 있는 승려를 몰아낸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정화는 외부 힘에 의한 정화였다. 정부가 개입 된 정화였고, 또한 폭력을 동원한 정화였다.
 
한때 한국에서 정화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 흔히 ‘정화하러 가자’라는 말은 ‘절을 빼앗으로 간다’라는 말과 동의어인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부의 힘과 폭력에 의한 정화는 진정한 정화는 아니다.
 
진정한 정화는 율장정신대로 사는 것이다. 율장의 가르침대로 살았을 때 정법은 수호될 것이다. 율장에서 갈마라는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정법수호에 대한 것이다. 승려에게 비법이 발견되었을 때 갈마를 해서 바로 잡는 것은 정법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승단이 타락하여 더 이상 자체적으로 정화가 되지 않았을 때 외부의 힘이 개입된사례를 보았다. 스리랑카 중세시대 파라크라마바후 왕 때 이루어진 불교개혁이 대표적이다. 율장에 부기형식으로 행동강령이 만들어졌는데 이를 세세생생 알리기 위해서 갈 비하라 작은 석불 좌상 앞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왕권에 의한 불교정화는 승단 권위의 약화로 나타난다. 승려가 되는 것도 왕의 허락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승단이 왕권에 귀속됨을 말한다. 자체정화를 하지 못했을 때 필연적으로 왕권에 종속됨을 뜻한다.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불교는 자체적으로 정화되어야 한다. 자체정화가 실패하여 외부 힘에 의지해서 정화 되었을 때 스리랑카 중세시대 때 갈 비하라 바위에 새겨진 행동강령처럼 될 것이다. 왕권에 의해서, 또는 정부에 의해서 통제받는 불교가 되는 것이다. 비법이 득세하는 한국불교를 어떻게 정화해야 할까?
 
 
2023-03-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