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성지순례기22, 치아사리의 수난, 폴론나루와 불치사 유적에서
여행기 쓰기가 쉽지 않다. 한편의 여행기를 쓰기 위해서 수많은 검색이 이루어진다. 이를 종합하여 하나의 글로 만들어 내야 한다. 여기에다 구도의 열정까지 추가해야 한다. 나는 왜 이런 여행기 작성하는데 집착하는 것일까?
세상을 편하게 살 수 있다. 해외를 동네 마실 다니듯이 다녀 올 수 있다. 단지 보고 듣고 즐기는 여행이 된다면 여행기는 필요 없다. 굳이 여행기를 작성한다면 사진 몇 장 남기면 될 것이다.
여행기를 남기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마치 책을 읽을 때 새기며 읽는 것과 같다. 마치 무협소설 읽듯이 책을 읽을 수 없다. 경전 읽듯이 책을 읽어야 한다. 새기며 읽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글로 남기는 것이다. 여행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행기를 쓰면 공부가 된다. 한번 더 여행을 다녀 오는 것 같다. 현지에서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 수많은 검색을 통하여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게 된다. 다음에 다시 가게 된다면 확실하게 내 것이 될 것이다.
폴론나루와 불치사 유적
스리랑카에서 현지 시점은 2022년 12월 13일 중간 오후 시간이다. 폴론나루와 유적 중에서 사원유적을 보았다. 사원유적은 중세 스리랑카 수도였던 폴론나루와 왕궁 가까이에 있었다. 그것도 부처님 어금니가 모셔져 있는 불치 사원이 있었던 것이다.
불치 사원이 있던 자리를 쿼드랭글(Quadrangle)이라고 한다. 지도를 보면 사원구역은 왕궁구역과 붙어 있다. 왜 이런 구조로 되어 있을까? 그것은 스리랑카에서 불치가 권위를 갖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서 불치는 옥새와 같다. 마치 인감도장이 그 사람과 동격인 것처럼, 스리랑카에서 불치가 있는 왕도는 국가통치의 정통성을 갖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불치가 대륙에서 옮겨 온 이래 수도가 옮길 때마다 불치사원도 함께 옮겨 갔다. 그것도 왕궁 바로 옆에 불치 사원을 만들어 놓았다.
사원유적은 왕궁유적과 달리 볼 것이 많다. 네모난 구역 안에 수 많은 석조 유적 흔적이 남아 있다. 주로 석재로 된 기둥이 많다. 지붕은 목재로 했을 것이다. 대륙의 이민족과 이교도의 침략으로 붙에 타 버렸을 때 석조 흔적만 남은 것이다.
석조 흔적을 보면 불상도 보인다. 대부분 불상은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살아 남은 것도 있다. 어떤 불상은 팔이 잘려 나갔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불상도 있었다는 것이다.
유적지에서 충분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주마간산격으로 보았다. 가이드의 설명도 거의 없었다. 그저 한번 휘리릭 둘러 보고 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에 온다면 이곳에서 한달살이 하면서 보고 싶다.
폴론나루와 지도를 보면 고대 신성도시 구역 안에 숙소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호텔도 있고 게스트하우스도 있다. 아누라다푸라 신성도시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 옛날 수행승들이 살았던 것처럼 한달살이 하면서 보낸다면 최상의 삶이 될 것 같다.
돌로 만든 것은 천년만년 간다
불치 사원구역 쿼드랭글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폐허뿐인 유적이다. 그것도 돌로 된 유적이다. 만일 목재로 된 것이라면 어땠을까?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나라 케이스를 보면 알 수 있다.
경주에 가면 황룡사터가 있다. 광활한 대지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목재로 절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재는 화재에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몽고가 침략 했을 때 황룡사 구층탑은 불타버렸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석탑이다.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다. 미륵사지나 정림사지 석탑도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살아 남았다. 그러나 황룡사 구층탑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주춧돌만 남았다.
한국에서 왕궁터를 보면 주춧돌만 남아 있다.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이렇다 할 문화유산을 볼 수 없는 것은 석조 건축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리랑카에서는 어디를 가나 석조 건축물을 볼 수 있다. 또한 벽돌로 만든 건축물도 볼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돌로 만든 것은 천년만년 간다. 스리랑카에서 사원을 만들었을 때 바위를 가공해서 만들었다. 이는 오늘날 남아 있는 석주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돌로 만든 것은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돌로 만든 것은 천년만년 가기 때문에 오늘날 유적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비자야바후의 아타다게
불치 사원 구역 쿼드랭글에서는 모두 세 개의 불치 사원이 있었다. 이를 바타다게(Vatadage), 하타다게(Hatadage), 아타다게(Atadage)라고 한다. 공통적으로 모두 다게라는 말이 붙는다. 여기서 다게라는 말은 사리탑이 있는 지붕을 뜻한다. 치아사리를 모셔 놓은 사원임을 말한다.
가장 먼저 본 것은 아타다게(Atadage)이다. 약간 언덕배기 평평한 곳에 있는 쿼드랭글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이다. 현지인 가이드가 이곳에 아타다게라고 했지만 그 의미를 잘 몰랐다. 동판으로 된 입간판을 사진 찍었다. 나중에 글 쓸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타다게에 대하여 구글 검색해 보았다. 자동번역기를 돌리니 “11세기 치아 유물 방으로 비자야바후 1세(재위: 1070-1110) 왕이 지은 부처님의 치아 유물이 있는 집”이라고 했다. 또한 이 건물 유적은 54개의 돌기둥 위에 지어졌고, 치아 유물은 2층에 보관되어 있는데 아마도 나무로 만든 것다고 써 놓았다.
아타다게는 이층 구조라고 한다. 윗방으로 이어지는 화강암 계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촬영한 사진을 보니 정말 돌계단이 보인다. 그렇다면 오른쪽 팔이 잘린 채로 남아 있는 입상불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바닥에는 3개의 불상이 있었고 현재는 중앙 1개만 남아 있습니다.”라고 했다.
아타다게 구조를 상상할 수 있다. 이층 구조의 건물로서 일층에는 세 기의 불상이 있었던 것이다. 중앙에 있는 입불상은 남아 있는데, 좌우에 있는 불상은 파괴된 것이다. 그런데 특이 하게도 불상은 입불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때 당시 사람들은 일층에 있는 입불상에 예경 올리고 이층에 올라가서 치아사리를 친견했는지 모른다.
쿼드랭글에는 세 동의 불치전각이 있다. 가장 오래 된 것은 아타다게이다. 이는 비자야바후 1세가 건립한 것이다. 참고로 스리랑카 중세시대에 해당되는 폴론나루와 통치자를 보면 비자야바후(재위: 1055–1110), 파라크라마바후(재위: 1153-1186), 나샨카 말라(재위: 1187-1196)으로 이어진다.
비자야바후는 외세를 물리치고 폴론나루와 왕국을 건설했다. 왕국을 건설하고 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승단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그 동안 인도 대륙의 침략자 촐라왕국은 고대도시 아누라다푸라를 파괴했다. 그 결과 승단도 파괴 되었다. 어느 정도였을까? 비구계를 줄 계사도 없을 정도가 된 것이다. 이에 비자야바후는 미얀마로부터 계사를 초청하여 비구 계맥을 잇도록 했다.
비자야바후가 또 하나 한 일은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시는 일이었다. 이는 왕국의 정통성과도 관련이 있다. 불교국가였던 스리랑카에서 불치사리가 있다는 것은 옥새가 있는 것과 같았다.
비자야바후는 촐라왕국이 지배하던 시절 스리랑카 동남부의 루후나 왕국의 왕이었다. 촐라족의 지배가 동남부까지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비자야바후는 스리랑카에서 촐라족을 몰아내고 나라를 통일했다. 그리고 스리랑카를 불교국가로 다시 만들었다. 수도를 폴론나루와로 정했는데 당연히 부처님 치아사리도 가져 오게 되었다. 바로 그 불치를 모신 전각이 아타다게인 것이다.
파라크라마바후의 바타다게
쿼드랭글에는 세 개의 다게가 있다. 이 중에서 아타다게와 하타다게는 눈으로만 보았다.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다. 참으로 아쉽게 생각한다. 설령 들어가 보았다고 하더라도 석주와 붉은 벽들 잔해만 보았을 것이다. 내용을 모르고 본다는 것은 아무런 감흥이 없다. 충분한 학습이 이루어진 다음에 본다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세 개의 다게 중에서 바타다게(Vatadage)가 가장 아름답다. 둥근 원형으로 된 건축물이다.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더구나 불상도 온전히 남아 있다. 뜨거운 햇살에 맨발로 들어 갔는데 발바닥이 너무 뜨거워 걸어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바타다게는 어떤 것일까? 동판 설명문에 따르면 파라크라마바후 왕(재위: 1153-1186년)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1157년에 지어진 것이다. 아타다게가 선왕인 비자야바후 왕 때 지어진 것이라면 바타다게는 후왕 파라크라마바후 왕 때 지어진 것이다. 파라크라마바후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고 있는데 이전 불치전각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게 지은 것이다.
바타다게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전각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둥그런 형태이다. 이와 같은 바타다게는 스리랑카에 열 군데에 있다.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투파라마(Thuparama) 바다타게도 그 중에 한 곳이다. 투파라마 바타다게에는 부처님 쇄골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폴론나루와에 있는 바타다게에는 부처님 치아가 모셔져 있었다.
스리랑카에서 최대 축제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치아사리 공개하는 날이 최대 축제의 날이 된다. 마치 국경일과 같은 것이다. 보통 7월이나 8월에 있는 치아사리 축제는 스리랑카 불교 축제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장엄한 축제 중의 하나이다.
스리랑카에서 불치는 옥새와 같은 것이다. 불치는 왕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왕궁 가까이에 불치사가 있다. 폴론나루와 시대 때에도 왕궁 바로 옆에 불치사가 있었다. 폴론나루와 바타다게가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불치는 어떻게 스리랑카로 오게 되었을까?
부처님 왼쪽 송곳니가 스리랑카에 오게 된 것은
스리랑카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543년 부처님께서 입멸하셨을 때 시신은 쿠시나가라 백단향 장작더미에서 화장되었다. 그런데 왼쪽 송곳니는 부처님의 제자인 케마에 의해서 장작더미에서 회수되었다는 것이다.
케마는 치아를 인도 동부 해안가에 있는 까링가 왕국의 브라마다트 왕에게 주었다. 이후 치아는 왕실 소유가 되었는데 수도인 단타푸라 시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단타푸라는 치아를 의미한다. 오늘날 오디샤 주의 푸리 시에 해당된다.
부처님 치아사리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 유체를 화장할 때 화장하고 난 재에서 치아 네 개와 세 개의 뼈를 걸러냈다고 한다. 이 유물은 사리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여덟 개의 사리탑으로 보내지지 않았다고 한다.
스리랑카에서는 부처님의 왼쪽 송곳니는 인도 동부에 해안에 있는 고대 칼링가 왕에게 주어졌다고 한다. 치아는 수도인 단타푸라 사원에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4세기 어느 때인가 단타푸라는 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치아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섬나라 스리랑카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치아사리와 관련된 전설을 보면 반신반의하게 된다. 그런데 최근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을 보다가 치아사리에 대한 문구를 접하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치아 하나는 서른 셋 하늘나라에
치아 하나는 간다라뿌라에
또 하나는 까링가 왕국에 모셨다.
또 하나는 용왕이 모셨다.”(D16.144)
이 게송은 송출자가 읊은 것이다. 송출자가 읊은 게송을 보면 모두 네 개의 치아사리가 있다. 이 중에서 하나는 천상에 있고, 또 하나는 용왕에게 있다. 인간에게 있는 것은 두 개이다. 그 중에 하나가 인도 동부 해안에 있는 까링가 왕국에 모셔졌다는 것이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 게송은 스리랑카 장로들이 읊은 것이라고 한다. 송출자가 읊은 것이라고 했는데 스리랑카 장로들이 읊은 것이다. 그런데 게송에서 “또 하나는 까링가 왕국에 모셨다.”라는 구절과 관련하여 한국빠알리성접협회 번역본에 따르면 “이곳에서 스리랑카로 치아사리가 전해졌다.”(1277번 각주)라고 각주 해 놓았다.
오늘날 불사리는 권위를 갖는다. 불사리탑이 있는 곳은 신앙의 대상이 된다. 하물며 부처님 치아사리가 있다면 더욱 더 권위를 가질 것이다. 더 나아가 치아사리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왕권과 동일시 되고 또한 국민통합을 이룩할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스리랑카에서는 수도가 이동함에 따라 치아사리도 이동했다.
치아사리는 4세기에 오늘날 인도 오디사 주 푸리(단타푸라)에서 스리랑카로 이송되었다. 당연히 왕이 있는 아누라다푸라로 이송되었다. 그렇다면 어느 사원에 있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5세기에 스리랑카를 방문 했었던 법현스님의 불국기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법현스님에 따르면 413년에 치아사리 행렬을 목격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코끼리를 타고 거리를 누비는 행렬을 묘사한 것이다. 거리는 꽃으로 장식되고 스님과 신도들이 치아사리를 숭배하는 의식이 무려 90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법현스님은 아바야기리 비하라에 있었다. 이를 한자어로 ‘무외산사(無畏山寺)’라고 한다. 대승불교 교리를 받아 들인 개방적인 사원을 말한다. 그런데 아바야기리 비하라 근처에 왕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바야기리 비하라 근처에 치아사리를 모신 전각이 있었음을 말한다.
치아사리의 수난
치아사리는 스리랑카 불교 정체성과 같다. 나라의 수도가 옮겨갈 때마다 치아사리도 함께 옮겼기 때문이다. 가장 나중에는 캔디로 갔다. 오늘날 캔디에 있는 불치사를 말한다. 그런데 치아사리는 이후 수난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폴론나루와는 1215년 인도의 침략자들로 인하여 버려졌다. 이후 14세기 초에 치아사리는 인도로 가게 되었다. 인도 침략자들이 치아사리를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회수 되어서 스리랑카로 반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치아사리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서세동점시절 포루투갈 사람들이 차지 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외세에 빼앗기면 어떻게 될까? 그 나라의 문화유산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치아사리가 포루투갈 사람들 수중에 넘어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1560년 치아사리는 포루투갈 사람들 차지가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미얀마에서는 사리를 가져가서 보존하고자 했다. 그래서 포르투갈 지배자에게 막대한 양의 금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천주교 대주교는 포르투갈 권력자에게 치아를 우상숭배자에게 주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더구나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리랑카에 있었던 도미니크회와 예수회 선교부의 수장들도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외세에 넘어간 치아사리는 어떻게 됐을까? 대주교에 손에 넘어간 치아사리는 파괴 되었다고 한다. 박격포로 부수어 가루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타다 남은 이빨 조각은 강물에 버렸다고 한다.
오늘날 부처님 치아는 캔디의 불치사에 보관되어 있다. 승려들은 하루 세 번 숭배의식을 행한다. 또한 일년에 한번 대규모로 치아사리 축제의식을 행한다. 이렇게 본다면 치아사리는 있는 것이 된다.
치아사리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치아사리는 왕국의 정체성과 같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서세동점시절 이교도의 만행에 대한 것이다. 치아사리를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박격포로 가루를 만들고 남은 것은 강물에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니산카말라의 하타다게
하타다게(Hatadage)도 있다. 하타다게 역시 치아사리를 모신 전각 유적이다. 이 유적은 3대 왕에 해당되는 니산카 말라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유적지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불상이 있기는 한데 심하게 파괴되었다. 두 팔이 잘려 나가고 얼굴은 이지러졌다.
글을 쓰면서 유적이 파악되었다. 폴론나루와 유적 중에서 가장 신성시 되는 곳이 부처님 치아사리가 있던 쿼드랭글인데 세 개의 다게가 모두 파악된 것이다.
세 개의 다게는 차례로 아타다게, 바타다게, 하타다게 순이다. 이는 건립연대가 빠른 시기부터 차례 대로이기도 하고, 또한 군주의 순서와 관계된 것이기도 하다.
아타다게는 폴론나루와 왕국 1세나 다름 없는 비자야바후(재위: 1055–1110)가 건립했다. 바타다게는 2세나 다름 없는 파라크라마바후(재위: 1153-1186)가 건립했다. 하타다게는 3세나 다름 없는 니산카말라(재위: 1187-1196)가 건립했다. 이렇게 본다면 폴론나루와 왕국은 3대에 걸쳐 141년동안 번영을 누린 것이 된다.
그 밖의 유적을 보면
폴론나루와 왕국에서 가장 신성한 구역에 세 곳의 불치사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유적은 1903년에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 동안 정글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돌로 지었기 때문이다.
돌로 만든 것은 천년만년 간다. 그래서일까 왕들은 자신의 치적을 석판에 남겨 놓는다. 스톤박스라 불리는 니산카 말라 왕의 갈포타(Gal Potha)가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벽돌로 만든 것을 짓기도 했다. 쿼드랭글 구역에 있는 투파라마가 대표적이다.
투파라마는 마치 동굴처럼 생겼다. 벽 두께가 2미터나 된다. 그래서일까 땡볕의 날씨에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덥지가 않다. 놀랍게도 불상이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오후 땡볕에 발바닥이 타는 듯이 뜨거웠지만
여행은 현지에서 보는 것만 여행이 아니다. 돌아와서 여행기를 작성하는 것도 여행에 해당된다. 그런데 여행기를 작성하면 더 심화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몰랐던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것저것 검색하다 보면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알게 된다.
여행을 두 번 하고 있다. 한번은 현지에서의 여행이고 또 한번은 돌아와서 순례기를 작성하며 또 한번 여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행해야 완벽한 여행이 된다. 구법승들이 여행하고 와서 순례기를 작성하는 것과 같다.
이번 폴론나루와 쿼드랭글과 관련한 순례기를 작성하면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원형으로 되어 있는 바타다게에서 본 불상이다. 본래 네 기의 불상이 있었으나 두 기만 살아 남았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는 완전하게 훼손없이 보전 되었다는 것이다.
바타다게에서 본 불상은 사마디불상이다. 부처님이 삼매에 든 모습이다. 그 모습이 대단히 거룩해 보인다. 오후 땡볕에 발바닥이 타는 듯이 뜨거웠지만 불상은 그런 모습을 아랑곳 하지 않고 천년 동안 이 자리에 있었다.
가르침이 살아 있는 한
스리랑카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보리수와 불사리탑과 불상이다. 이 중에서 가장 크게 신앙이 되는 것은 단연 불사리탑일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유체 중에서도 가장 큰 신앙이 되는 것은 부처님 왼쪽 송곳니이다.
스리랑카 불교는 불치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서세동점 시절에 불치는 수난을 당했다. 이교도, 즉 기독교도에 의해서 파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인도 대륙에서 힌두교도들이 침입했을 때도 불치는 안전했으나 서양에서 온 침략자들은 이를 우상숭배라고 해서 파괴해 버린 것이다.
불치가 실재하는지 실재하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불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르침이다. 가르침이 살아 있는 한 담마의 바퀴는 굴러간다. 부처님은 분명히 말했다.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S22.87)라고.
2023-02-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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