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9, 미힌탈레 산정에서 밀림의 지평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3. 2. 6. 11:39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9, 미힌탈레 산정에서 밀림의 지평을


여행기 쓰기가 쉽지 않다. 자료를 찾아 보고 검색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구성해야 한다. 주로 성지순례다니기 때문에 경전 문구도 넣어 주어야 한다. 이런 여행기를 쓰는데 상당한 부담을 느낀다.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다. 여행기를 쓰는 것은 고통이다. 누가 쓰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기는 당연히 써야 되는 것으로 의무 지우고 있다.

스리랑카 성지순례를 다녀온지 한달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나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행기를 다 써야 여행이 끝난다. 모두 40편 예상한다. 지금까지 18편 썼다. 앞으로 한달 더 써야 할 것 같다.

성지중의 성지 미힌탈레를 향하여

순례자들은 아누라다푸라 시내를 빠져 나왔다. 승용차에는 네 명 있다. 스리랑카 사람 혜월스님, 역시 스리랑카 사람으로 운전기사겸 가이드 역할을 하는 가미니, 그리고 김형근선생과 내가 탔다. 이렇게 네 명이서 승용차로 순례하다 보니 기동력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아무데나 설 수 있다는 것이다. 패키지 여행이라면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승용차는 산중으로 들어 갔다. 이제까지 평원만 보다가 산이 나타나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는 어디를 가든지 산이 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서 산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야자수가 있어서 열대지방임을 알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미힌탈레는 아누라다푸라에서 북동쪽으로 12키로가량 떨어져 있다.


날씨는 화창했다. 오전에 햇살이 비치자 온통 초록이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순례를 떠나는 것도 행복일 것이다.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차로 이동하고, 현지에서 유적을 보고, 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듣는 것뿐이다. 세상에 이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

목적지는 미힌탈레(Mihintale)이다. 스리랑카 불교가 시작된 곳이다. 마힌다 장로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다. 그것도 구름을 타고 왔다는 신화가 있다. 그래서일까 스리랑카에서 성지 중에 성지가 된 것 같다. 스리랑카 불자들이라면 반드시 한번쯤 참배라는 성지순례 코스가 된 것이다.


성지에서는 흰옷을

성지는 가파른 길에 있다. 주차장에서 십여분 올라가야 한다. 도중에 일단의 학생들의 무리를 만났다. 흰옷 입은 학생들이 백명이상 되는 것 같다. 초등학생들로 보인다. 스리랑카에서는 중고등학생은 물론 초등학생들도 흰옷 교복을 입는 것 같다.


흰옷은 재가불자의 상징이다. 특히 성지에서는 흰옷을 입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이곳 미힌탈레에서도 옷차림에 대한 표지판을 만들어 놓았다. 문자가 아닌 사진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것도 첵크와 엑스(X) 표시로 표현한 것이다. 첵크 표시 된 것은 허용되는 것이고 엑스 표시된 것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성지에서는 컬러풀한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 선글라스를 껴서도 안된다. 팔이나 다리가 드러나는 옷을 입어서도 안된다. 상하의 모두 흰색으로 그것도 발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어야 한다.

흰옷차림은 스리랑카 성지뿐만 아니라 인도성지에서도 준수 된다. 대체로 남방 테라와다 불자들은 잘 지키는 것 같다. 대만불자들도 단체복을 만들어 준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유독 한국불자들만큼은 복장이 화려하다. 마치 멋을 부리듯이 상당수는 선글라스를 착용한다.

마힌다 장로의 도래

성지에 가면 전문 가이드가 있다. 우리나라 문화해설사와 같다. 미힌탈레에서도 전문 해설사가 한사람 붙었다. 모두 영어로 한다. 한국사람은 영어가 짧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한다. 일부는 알아 듣고 모르면 흘린다.


혜월스님은 따라가지 않았다. 많이 가 보았을 것이다. 스님은 승용차에서 쉬었다. 운진기사 가미니와 해설사, 그리고 김형근 선생과 네 명이서 올라 갔다. 가장 먼저 본 것은 작은 불탑이다. 스리랑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반구형 불탑이다.


반구형 불탑은 크지 않다. 그럼에도 스리랑카 불자들에게는 성지나 다름 없다. 스리랑카 불교가 시작된 역사적 현장이기 때문이다. 마힌다 장로와 데바남삐야찟따 왕이 처음 만난 곳이다.


스리랑카에서 불교의 시작은 마힌다 장로의 도래로부터 시작된다. 스리랑카 역사서에 따르면 마힌다 장로가 구름을 타고 이곳 미힌탈레 바위 산에 내렸다고 한다. 마치 단군신화처럼 신화적으로 묘사 되어 있다. 그러나 마힌다 장로가 스리링카에 온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도 기원전 3세기에 온 것이다.

아소까의 담마비자야(Dhammavijaya)

마힌다 장로는 아소까 대왕의 아들이다. 아소까는 전인도를 통일하다시피 하고 난 다음에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했다. 이를 담마비자야(Dhammavijaya)라고 한다.

전륜왕은 정복전쟁을 하지 않는다. 다만 담마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니까야에서는 “그는 큰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대륙을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정법을 사용하여 정복했다.”(D26.2)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 담마비자야,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의미한다.

마우리야 3대 황제 아소까는 전륜왕으로 칭송되고 있다. 그는 칼에 의한 정복을 버리고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했다. 어떻게 정복하는가? 니까야에 따르면 네 종류의 군대를 동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대인도에서는 사군이 있었다. 이는 코끼리부대, 기마부대, 전차부대, 보병부대를 말한다. 전륜왕은 사군을 동원하여 성문을 향하여 진격해 간다. 이에 대하여 니까야에서는 “수레바퀴의 보물을 따라 갔다.”(D17.5)라고 말했다. 막강한 무력과 함께 담마의 수레바퀴도 굴린 것이다. 이럴 때 적들의 왕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적들의 왕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성문을 열어 주든가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 성문을 열어 준다. 그러면서 적들의 국왕은 전륜왕에게 “대왕이여, 어서 오십시오. 잘 오셨습니다. 대왕이여,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대왕이여, 가르침을 주십시오.”(D17.5)라고 말한다.

니까야에서 전륜왕을 보면 마치 오늘날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이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만일 전륜왕이 사군을 동원하지 않았다면 담마에 의한 정복을 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소까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담마비자야를 천명한 것이다. 막강한 사군이 있었기 때문에 담마에 의한 정복이 가능했던 것이다.

전륜왕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대군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먼저 공격하지도 않는다. 사군을 이끌고 적국의 성문 앞에 진격해 들어 갈 때 성문을 열면 전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왕이 성문을 잠그고 전쟁을 한다면 무력으로 진압할 것이다.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공격해 올 때 방어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다.


자애로운 법왕으로서 전륜왕

전륜왕의 사군 앞에서서 적들의 국왕은 성문을 스스로 열어 주었다. 그리고 전륜왕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어떤 가르침일까? 전륜왕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말라.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취기가 있는 것을 마시지 말라. 음식에 분량을 알라.”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전륜왕은 적들의 국왕에게 오계 플러스를 주었다. 여기서 플러스는 “음식에 분량을 알라. (yathābhuttañca bhuñjathā)”라는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느 영역에서는 이에 대하여 “현재의 과세를 유지한다. (Maintain the current level of taxation, Bhikkhu Sujato역)”라고 번역해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원문과 크게 어긋난다. 초불연 번역에서는 “적당한 것을 먹어라.”라고 번역했다.

전륜왕이 정복왕에게 오계를 지키라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음식에 분량을 알라.”라고 했다. 음식절제를 하라는 말이다. 욕망을 줄이는 삶을 살아 가라는 말 같기도 하다. 이럴 때는 주석을 봐야 한다.

한국빠일리성전협회(KPTS)본을 보면 전륜왕의 가르침에 대한 주석이 있다. 초기불전연구원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KPTS본에서는 주석을 인용하여“전륜왕은 ‘나를 위해 매년 공물을 바치라.’라고 말하지 않고 또한 다른 재보를 빼앗아 남에게 주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스스로 법왕으로서의 살생 등을 조사하여 훌륭한 지혜로 관찰하여 자애로운 음성으로 ‘보라,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닦고 익히면, 지옥에 태어나는 자가 된다.’라는 방식으로 가르쳐 충고했다.”(Smv.622)라고 각주해 놓았다.

음식절제는 욕망의 절제

모든 것이 명백해 졌다. 전륜왕이 정복지 국왕에게 음식절제를 말한 것은 세금을 감면한 것이 아니다. 영역이 틀린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단지 음식절제를 말했을 뿐이다. 그것은 욕망을 내려 놓는 삶과 관련이 있다.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근본 욕구이다. 생존을 위한 것이고 자손의 번식을 위한 것이기도 한다. 그런데 전륜왕은 오계와 함께 음식절제를 말했다. 이는 욕망의 절제를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담마와 일치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륜왕에 대하여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전륜왕은 막강한 사군을 동원에서 담마에 의한 정복을 추구했다. 그러나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방어만 했을 뿐이다. 먼저 전쟁을 거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계로서 통치한 것이다. 더구나 음식절제로 통치한 것이다. 음식절제는 욕망절제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를 담마에 의한 통치로도 볼 수 있다.

장로와 국왕의 역사적 만남

미힌탈레에서 마힌다 장로와 데바님삐야띳싸 국왕이 만났다. 스리랑카 불교가 시작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그런데 위키백과에 따르면 스리랑카 데바님삐야띳싸 국왕은 아소까 대왕과 친구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분명하지 않다.


아소까 대왕은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천명했다. 그리고 전세계 열 개 나라에 담마사절단을 파견했다. 그 중에 하나가 스리랑카였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따르면 전륜왕은 막강한 사군을 가졌다고 했다. 아소까 대왕 역시 사군을 가졌다. 이런 왕에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소까 대왕 당시에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다. 그리고 불교는 인도대륙을 넘어서 전세계로 전파되었다. 어쩌면 스리랑카는 전륜왕이라 일컬어지는 아소까 대왕의 막강한 힘에 불교를 받아 들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스리랑카 국왕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 조건에 따라, 정지적 판단에 따라 불교를 받아 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대가 불교를 필요로 해서 받아 들였을 것이다.

울창한 밀림의 지평

미힌탈레에는 볼 것이 많다. 하루를 다 잡아도 못 볼 정도로 많다. 그러나 갈 길 바쁜 순례자들에게는 고작 한시간 반가량 주어졌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았다.


산이 있으면 꼭대기에 오르고 절이 있으면 절로 간다. 미힌탈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위산이다. 그것도 매우 험준한 바위산이다. 두발이 아닌 네 발로 올라가야 한다. 성지이기 때문에 맨발로 올라 간다. 스리랑카 불교가 시작된 곳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다. 바위에 계단을 내었다. 맨발로 올라가서 일까 반질반질하다. 자칫 부주의로 넘어질 수 있다. 난간에 의지하여 천천히 올라 갔다.


드디어 정상에 섰다. 사방이 툭 터져 있다. 일망무제 밀림의 연속이다. 바로 맞은 편에는 거대한 스투파가 있다. 이천년 된 것이라고 한다. 한 방향을 보니 강이 있다. 강 가까이에는 논이 있어서 벼농사를 짓고 있다. 경작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 밀림이다. 사방이 울창한 밀림의 지평을 이르고 있다.


부처님이 전도선언 한 것은

아소까 대왕은 왜 자신의 아들 마힌다 장로를 스리랑카에 보냈을까? 물론 담마비자야 때문일 것이다.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아소까 비문을 보면 담마비자야는 명백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가져 온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니까야에서 발견되는 전륜왕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가 60명에 달했을 때 전도선언을 했다. 부처님 가르침이 훌륭한 줄 안다면 알려야 함을 말한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이는 부처님이“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전도선언한 것은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보았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세상에서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면 평화와 행복이 따름을 말한다. 이는 아소까 비문에 쓰여 있는 “부처님 가르침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가져 온다.”라는 말과 일치한다.


지금은 정법시대

오늘날 스리랑카는 불교국가가 되었다. 그것도 이천년도 전에 불교를 받아 들였다. 그리고 작은 섬나라에서 불교가 꽃을 피었다. 먼 중국에서까지 구법승이 찾아 올 정도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테라와다 불교 종주국 또는 종가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은 正法(정법)시대일까? 지금은 정법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법시대의 조건은 무엇인가?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 삼장이 전승되어 있기 때문에 정법시대이다. 둘째는 팔정도 수행이 있기 때문에 정법시대이다. 셋째는 팔정도 수행으로 사향사과의 성자가 출현했다면 정법시대인 것이다.


스리랑카에서는 정법을 지켜 왔다. 특히 빠알리 삼장을 목숨을 걸고 지켰다. 그 결과 전세계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 모두가 미힌탈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힌다 장로와 데바남삐야 국왕이 만난 장소에서 스리랑카 불교가 시작되었고, 테라와다 불교가 시작되었고, 세계불교가 시작되었다. 그 역사적 현장의 한복판에 있었다. 바위산에서 우거진 밀림의 지평을 보았을 때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2023-02-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