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8, 스리랑카 비구니 계맥은 복원되었을까? 위하라마하데비승원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29. 12:38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8, 스리랑카 비구니 계맥은 복원되었을까? 위하라마하데비승원에서


여행을 가면 반드시 기록을 남긴다. 후기 없는 여행은 상상할 수 없다. 귀중한 시간과 비싼 돈을 들여서 여행한 것이다. 어찌 헛되이 버릴 수 있을까? 기록을 남겨 두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인터넷 바다에 띄워 놓으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연 있는 사람이 읽어 보게 될 것이다.

스라랑카 현재 시점은 2022년 12월 13일 화요일 아침이다. 아누라다푸라 게스트하우스에서 날이 밝았다. 날씨는 우리나라 초여름 날씨이다. 건기이어서일까 하늘은 푸르고 녹음은 우거졌다. 이국적인 야자수가 이곳이 이지(異地)임을 알게 해 주는 것 같다.

출근길 활력넘치는 아누라다푸라

게스트하우스는 녹음이 우거진 곳에 있다. 평일 아침이어서 그런지 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걸어간다. 어느 여자노인은 바구니에 꽃을 따고 있다. 아주 작고 흰 꽃이다. 어떤 용도로 활용하는 것일까? 이런 상상을 해 보았다. “집에 있는 불전에 꽃공양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게스트하우스에서 8시경에 출발했다. 식사는 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순례 이틀째 되는 날이다. 오늘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미힌탈레가 될 것이라고 짐작했다.


순례자를 태운 승용차는 게스트하우스를 출발했다. 아누라다푸라 시내에 들어섰다. 마침 출간시간이어서일까 시내는 활력이 넘친다. 버스, 승용처, 오토바이, 툭툭 등 각가지 탈 것들이 도로를 질주한다. 이른 아침 햇살에 일터에 가는 사람들은 평화로워 보였다.


아침을 먹어야 했다. 승용차는 어느 식당에 차를 세웠다. 식당 이름은 P&S이다. 이는 ‘PERERA AND SONS’의 약자이다. 1902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식당인 것 같다. 식당에서는 빵과 카레라이스를 팔았다.


아침 식사로서 햄버거를 선택했다. 스리랑카식 카레라이스는 입맛에 맞지 않는 것 같다. 향신료가 강렬한 이유도 있다. 빵값은 얼마일까? 소시지가 있는 빵 하나에 160루피이다. 이는 우리나라 돈으로 500원가량 된다. 햄버거는 단품으로 250루피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1000원가량 된다. 물가가 우리나라보다 3분의 1 이하 가격으로 싼 편이다.

위하라 마하데비 아라마야(vihara mahadevi aramaya)

승용차로 여행하면 기동력이 있다.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간다. 먹고 싶은 곳이 있으면 멈춘다. 큰 일정은 있지만 작은 일정은 그때 그때 결정된다. 비구니 사원에 가는 것도 그랬다.

아누라다푸라에 비구니 승원이 있다. 이름은 위하라마하데비아라마야(vihara-mahadevi-aramaya)이다. 왜 사원에 가게 되었는가? 이는 혜월스님이 잘 아는 사원이기 때문이다. 순례지로 가기 전에 잠시 시간을 내서 방문한 것이다.


스님과 함께 여행하면 좋은 점이 많다. 사원에 자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원에 가서 스님들을 만나 볼 수 있고 차담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순례에서 혜월스님과 함께한 것은 행운이라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

위하라마하데비 사원은 스리랑카 비구니 승원이다. 스리랑카에도 비구니가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스리랑카 승가는 모두 비구들만 있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혜월스님을 따라 사원으로 들어 갔다. 사원은 산뜻했다. 야자수가 있어서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비구니 승원이라 그런지 깔끔했다. 우리나라 비구니 승원은 잘 가꾸어져 있다. 스리랑카 비구니 승원도 가람 배치가 오밀조밀하고 정원이 잘 꾸며져 있다.

위하라마하데비에서 가장 어른 스님이 혜월스님을 마중나왔다. 장로니 스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로니 스님은 혜월스님과 한국인 두 명을 접견실로 안내 했다.


접견실에서 비구니 스님들이 차례로 혜월스님에게 인사를 했다. 스리랑카식 인사를 말한다. 어떻게 하는가? 무릎을 꿇고 발 아래에 머리를 가까이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식의 인사를 종종 봤다. 재가불자들도 스님을 보면 무릎을 꿇고 발 아래 머리를 조아리듯이 인사하는 것이다.

혜월스님이 비구니 승원을 방문한 것은 무언가 도움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본다. 미국에 살고 있는 혜월스님은 일년에 두 차례 자신의 고국 스리랑카를 방문하는데 그때 마다 인연있는 사람이나 승원을 찾아 가는 것 같다.

비구니는 아니지만 비구니로 인정

스리랑카 비구니 승원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았다. 비구니 스님은 몇 명이나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25명 가량 살고 있다고 한다. 비구니 승원은 68년된 것이다. 계산해 보니 1954년에 설립되었다.


승원에는 가장 나이가 많은 비구니 스님이 있다. 혜월스님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것 같다. 혜월스님에 따르면 자신이 15세 때 이 승원에서 비구니 스님을 보았다고 한다. 참고로 스리랑카 사람 혜월스님은 아누라다푸라 출신이다.

나이가 많은 비구니 스님을 장로니라고 한다. 승원에서 가장 어른 스님인 것이다. 그러나 비구니계를 받지 않았다면 장로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스리랑카에서는 비구니계맥이 오래 전에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 불교에 비구니 교단은 있을까? 비구니 교단이 있는지는 잘 파악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스리랑카에는 비구교단은 있지만 비구니 교단은 계맥이 오래 전에 단절되었기 때문에 비구니 교단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비구니가 사는 승원은 스리랑카 도처에 있다고 한다.

혜월스님에 따르면 스리랑카에서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은 여자 스님들은 정식 비구니 스님이 아니라고 했다. 모두 사미니 신분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사회에서는 이를 비구니 스님으로 인정해 주고 있다고 한다.


비구니 계맥이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계맥은 11세기에 단절되었다. 남부인도에서 촐라왕조가 침입했을 때 아누라다푸라는 폐허가 되었는데 비구계맥도 단절되었고 비구니계맥도 단절되었다. 이후 폴론나루와에서 불교가 다시 중흥기를 맞이 하게 되었을 때 비구계맥은 미얀마 승가로부터 비구계맥을 이어 받았다. 그러나 비구니 계맥은 복원되지 않았다.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계맥은 11세기에 사라졌다. 이에 따라 비구니 교단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비구니 스님들은 있었다. 비구니계를 받지 않는 정학녀 또는 사미니계 상태의 스님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1996년에 대승불교권에서 스리랑카 비구니 스님들에게 계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스리랑카 비구니 계맥의 부활로 보고 있다.

스리랑카 불교에서는 아직도 비구니 교단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스리랑카교단이 매우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테라와다라는 말 자체가 보수적이라는 사실이다.

상좌불교 또는 장로불교라는 뜻의 테라와다불교 교단에서는 구족계를 줄 때는 율장을 근거로 한다. 율장대로만 한다면 보수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설령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계맥이 복원되었다고 하더라도 비구교단으로부터 계맥전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반쪽 짜리밖에 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테라와다 율장에 따르면 비구니 교단을 복원하려면 반드시 비구교단으로부터 계를 다시 한번 더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구니 팔경법에 따르면

부처님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부처님 가르침 앞에 모두 등등하다. 이는 부처님은 흰 옷 입은 재가자들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사람들이 다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하물며 비구니 스님은 어떠할까?

부처님 제자들의 깨달음에 대한 게송이 있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테라가타가 대표적이다. 이를 장로게라고 한다. 그런데 장로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장로니게도 있다. 이를 테리가타라고 한다.

장로와 장로니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비구교단과 비구니교단이 있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비구니 교단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고따미의 경’(A8.51)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 고따미의 경에 실려 있는 팔경법에 대하여 악법이라고 말한다. 이는 ‘구족계를 받은지 백년이 되는 비구니도 방금 구족계를 받은 비구에게 합장하고 응대해야 한다.’등의 조항을 말한다.

여성이 비록 출가를 했어도 멀리 외딴 곳에 떨어져서 탁발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팔경법을 보면 세 번째 항에서 “수행녀는 수행승이 없는 곳에서 안거해서는 안된다.”(A8.51)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도둑이나 강도로부터 수행녀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비구 승가 가까이 살도록 했다.

부처님의 교단에서 여성들이 출가를 했어도 여전히 보호 받을 대상이었다. 그래서 비구승가 가까이 살아야 했고 비구들에게 예경해야 했을 것이다. 비구 승가 동의 하에 비구니 계를 주는 것도 그때 당시 시대상황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지금은 부처님 당시가 아니다. 지금은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그러나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지위는 낮았었다. 여성의 지위가 올라가 양성평등의 시대가 된 현시점에서 반드시 팔경법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구승가 동의 없이 구족계를 받았을 때

팔경법을 보면 여섯 번째 항목에 비구니계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이는“정학녀는 이년 동안 여섯 가지 원리에 대하여 학습한 뒤에 수행승과 수행녀의 참모임에서 구족계를 청해야 한다.”(A8.51)라는 조항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설령 비구니 교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비구 교단에서 다시 한번 더 구족계를 받아야 함을 뜻한다.

비구니가 되려면 비구 스님들 앞에서 구족계를 받아야 한다. 이는 율장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비구니 스님의 구족계와 관련하여 빠알리 율장에 하나의 사례가 있다.

빠일리율장에 비구니계 수계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제4장 속죄죄법 145조에 따르면, ‘법랍 만 12년에 대한 학습계율’이 있다. 이는 “그런데 그때 수행녀들이 법랍 만 12년이 되었다고 참모임의 동의없이 구족계를 주었다.”(Vin.IV.24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비구 승가의 허락없이 비구니 승가에서 수행녀에게 구족계를 준 것이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 수행녀들은 반드시 비구승가의 허락이 있어야 구족계를 받을 수 있었다. 비구승가에서 비구니 계를 주어야 정식 비구니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구 승가의 허락 없이 수행녀에게 구족계를 주었을 때 비난이 따랐다. 그래서 욕망을 여읜 수행녀들은 “어찌 수행녀들이 법랍 만 12년이 되었다고 참모임의 동의없이 구족계를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분개하고 혐책했다.

비구승가 동의 없이 수행녀들에게 구족계를 준 사실은 부처님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은 사실인지를 묻고서는 “그 수행녀들은 적절하지 않고… 해서는 안될 일을 한 것이다.”(Vin.IV.245)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문제가 되는 수행녀들을 불렀다, 그리고 여러가지 방편으로 견책하고 법문으로 고무했다. 수행녀들에게 걸맞는 법문을 한 것이다. 그리고 수행녀들에게 구족계를 주는 것을 허용한다고 말했다.

부처님은 수행승(비구)들에게 말했다. 부처님은“수행승들이여, 법랍 만 12년의 수행녀들에게 구족계를 주는 것을 허용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주어야 한다. 그 법랍 만 12년의 수행녀가 참모임에 나아가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수행녀들의 발에 머리를 조아린 뒤에 한쪽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Vin.IV.246)라고 말했다.

율장 비구니계를 보면 비구니계를 받는 장면이 잘 묘사 되어 있다. 비구니계를 받으려면 반드시 비구 앞에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녀가 무릎을 꿇은 대상은 비구니 승가의 스님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녀들의 발에 머리를 조아린다.’라고 말했다.

비구니가 되려면 비구가 보는 앞에서 비구니들에게 “존귀한 자매들이여, 저는 이러이러한 수행녀로서 참모임에 구족계를 주는 것에 대한 허락을 요청합니다.”(Vin.IV.246)라며 세 번 요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과연 이런 방식대로 비구니계를 주는 곳은 세계에 어디에 있을까? 부처님 당시에나 가능했을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계맥이 단절되기 전에도 이렇게 했을지 모른다.


테라와다의 길과 대승불교의 길

스리랑카 비구니계맥과 관련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논문 자료 등을 보면 1996년에 한국과 대만의 비구니 스님들이 스리랑카 비구니 스님들에게 계를 주어서 비구니 계맥이 복원되었다고 써 놓았다. 그러나 보수적인 장로교단에서 이를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실제로 스리랑카 교단에서는 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런가? 율장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는 차이가 있다. 테라와다불교는 장로불교라는 말처럼 전통을 고수하고자 한다. 반면에 대승불교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다. 이는 2차 결집의 원인이 된 십사문제로도 알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 결과 중관, 유식, 여래장 사상으로 전개 되었다. 대승불교가 중국에서는 선불교로 정착되었다.

테라와다는 테라와다의 길이 있고, 대승불교는 대승불교의 길이 있다. 이는 각 불교의 정체성에 따른다. 테라와다불교는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전통을 지키고자 한다.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계율대로 살고자 하는 것임을 말한다. 반면에 대승불교는 가르침과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 결과 다양한 사상이 전개되었고 계율도 시대에 맞게 또는 지역에 맞게 변용했다.

스리랑카는 대표적인 테라와다불교권 국가이다. 더구나 스리랑카는 테라와다불교의 종가집이라고 말한다. 이런 불교전통에서 비구니 계맥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대승불교 비구니 계맥이 복원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스리랑카 비구교단에서는 이를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비구니 승원

혜월스님을 따라 스리랑카 비구니 승원을 가게 되었다. 아누라다푸라 시내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지도로 위치를 확인하고 싶었다. 승원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구글지도에서 위치를 찾아 낼 수 있었다.


비구니 승원은 명칭은 비하라마하데비 아라마야이다. 구글지도에는 주소가 ‘8CF8+2VR, Bandaranaike Mawatha, Anuradhapura, 스리랑카’로 찍힌다. 그러나 웹사이트는 보이지 않는다. 검색을 해도 사진만 몇 장 나올 뿐이다.

스리랑카 성지순례라 하여 유적지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불교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원에 가는 것도 성지순례에 해당된다. 더구나 사원에는 보리수도 있고 불상도 있다. 비하라마하데비 승원에서도 볼 수 있었다.


비하라마하데비는 비구니 스님들의 사는 곳이기도 하고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넓은 부지에 이 건물 저 건물이 있고 조경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편안하고 안은한 느낌이 든다.


마침 마당 한가운데 망고나무에 열매가 열렸다. 수확할 때가 된 모양이다. 운전기사 가미니가 망고 따는 것을 도와 주었다. 혜월스님에 따르면 이곳 승원에서 나는 망고가 특별한 것으로 다른 데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맛이 있다고 한다.


승원 안에는 유치원도 있다. 아침에 출근 하는 사람들이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엄마 손 잡고 오는 아이도 있었고 아빠 손 잡고 오는 아이도 있었다. 한켠에 마련된 유치원에는 15명 가량의 아이들이 여자 선생님과 함께 있었다.


스리랑카 비구니 승원에서 차도 마시고 승원 구경도 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을 보았다. 이런 것도 행운일 것이다. 혜월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혜월스님은 이곳 승원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후원역할도 하는 것 같다. 승원을 출발하기 전에 비구니 스님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계맥이 단절된지 천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비구니 승원은 존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근래에 대승불교로부터 계맥 전승이 있었다. 그러나 보수적 교단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비구니 교단으로 인정되는 것일까? 보수적 스님들이 입적하고 나면 인정되는 것일까? 혜월스님 말대로 장로비구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은 이미 비구니 스님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2023-01-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