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7, 기도 대신 불공(佛供)을, 자야 스리 마하보디 보리수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26. 12:52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7, 기도 대신 불공(佛供)을, 자야 스리 마하보디 보리수


해외 성지순례를 하고 있다. 일년에 한번은 외국 성지순례하기를 발원했다. 그 결과 몇 군데 성지순례했다. 어느 나라가 가장 마음에 들까? 스리랑카를 순례하고 나니 다른 나라는 시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 불교의 발생지 인도도 그다지 큰 감동이 아니다. 사대성지 또는 팔대성지 근처에만 불교가 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서 현지 시점은 2022년 12월 12일 늦은 오후이다. 순례자들은 제따바나 불탑을 보고 난 후에 보리수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는 ‘스리 마하보디(Sri Maha Bodhi)’사원에 있는 보리수를 말한다. 이 사원의 보리수에 대하여 ‘자야 스리 마하보디(Jaya Sri Maha Bodhi)’라고도 한다.


왜 자야 스리 마하디보디라고 했을까? 추측해 본다. 마하보디(Maha Bodhi)는 큰 깨달음을 말한다. 동시에 인도 보드가야에 있는 보리수를 연상케 한다. 스리(Sri) 는 무슨 뜻일까? 아마 스리랑카의 스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스리는 사자라는 뜻이다. 사자는 스리랑카의 상징이다. 자야(Jaya)는 무슨 뜻일까? 이 말은 승리라는 뜻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 구전되어 온 게송이 있다. 자야망갈라가타라는 게송도 그 중에 하나이다. 이 게송은 부처님의 여덟 가지 승리에 대한 게송이다. 그래서 각 게송마다 후렴구로서 “땅 떼자사 바와뚜 떼 자야 망갈라니(Ta-tejasā bhavatu  te  jaya-magalāni)”라고 끝난다. 이 말은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야는 승리라는 말임에 틀림 없다.

자야 스리 마하보디 보리수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에 자야 스리 마하보디 보리수가 있다. 부처님을 깨달음과 함께 하는 위대한 승리의 보리수인 것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이 보리수를 신성시한다. 어느 정도일까? 스리랑카 불자들은 보리수를 부처님 보듯 하는 것이다.

자야 스리 마하보디 보리수를 두 번 봤다. 처음 본 것은 12월 12일 오후 2시 무렵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보리수가 있는 사원은 문은 닫혀 있었다. 마치 점심 휴식시간처럼 잠시 문을 닫아 놓은 것이다. 늦은 오후에 문을 연다고 했다. 그 결과 다른 곳을 보고 온 난 다음 오후 6시 무렵에 다시 오게 되었다.

스리랑카에서는 오후 6시가 되면 해가 진다. 해는 오전 6시에 뜬다. 적도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일년 열두달 변화가 크지 않다. 오후 6시가 되자 어둑해졌다. 그럼에도 야간에 문을 열어 놓았다. 순례자들이 많기 때문에 밤낮으로 개장하는 것이다.

흰옷은 재가의 상징

스리랑카 불자들의 신심은 이 세상에서 최고인 것 같다. 이제까지 미얀마 불자들의 신심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 스리랑카에 와서 보니 비교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보리수가 있는 사원에 들어 섰을 때 깜짝 놀랐다. 흰옷 입은 불자들이 이곳 저곳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흰옷 입은 불자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백색의 행렬을 보았을 때 성스럽고 고귀하고 청정한 느낌을 받았다.


흰옷은 재가불자의 상징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확인된다. 부처님은 “밧차여, 나의 제자로 흰 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살며, 다섯 가지의 낮은 경지의 장애를 끊고, 홀연히 태어나, 거기서 열반에 들어,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재가의 남자신도가 백 명이 아니고, 이백 명이 아니고, 삼백 명이 아니고, 사백 명이 아니고, 오백 명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M73)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재가불자도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재가의 제자는 수도 없이 많다고 했다.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 앞에 평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재자의 남자신도와 여자신도에 대하여 “흰 옷을 입고 (odātavasana)”라고 했다.


부처님 당시에 흰옷은 재가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재가의 상징은 흰옷이다. 그래서일까 스리랑카 불자들은 성소에 갈 때는 흰옷을 입는다. 보리수 사원 입구에도 흰옷 입을 것을 권장했다. 간판에는 흰옷 입은 남녀 그림과 함께 “As a form of respect, kindly dress in white clothing at this sacred venue”라고 영어로 써 있다.


흰옷이 없으면 가게에서 흰옷을 사면 될 것이다. 꽃 파는 가게에서 흰옷을 판매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흰옷을 준비해 와야 한다. 이것이 성지에서의 기본 예절이다.

출국하기 전에 미리 흰옷을 준비했다. 백색의 법복을 준비한 것이다. 상의만 입었다. 그런데 한국불자들은 이런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성지순례를 다녀 온 후에 남긴 사진을 보면 의상이 컬러풀하다. 그리고 대부분 선글라스를 썼다. 현지인들은 이런 모습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스리랑카 불자들의 신심은

스리랑카 불자들의 신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단지 겉보기만을 봐서 그러는 것인지 모른다. 이날 보리수 사원 마당에 앉아 있는 어느 불자 가족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신심을 보았다. 그들은 마당 담벼락 쪽에 앉아 합장을 하며 무언가 독송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있고 나이 든 사람도 있다. 아마 삼대가 함께 순례 온 것 같다. 그들은 무엇을 독송하고 있는 것일까?


보리수는 일년 내내 푸르름을 유지한다. 그렇다고 보리수가 항상 가지에 매달려 있지는 않는다. 마치 단풍 지는 것처럼 컬러가 변해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보리수 사원 주변에는 낙엽을 쓰는 봉사자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 흰옷 입은 사람들이다.


보리수 사원에는 보리수가 메인이다. 보리수 사원에서 불탑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중앙에 보리수만 있다. 불상이 있기는 하지만 보리수 보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순례자들은 불상 보다는 보리수를 보고 자신이 소원하는 것을 바라는 것 같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진지하다. 공양단에 꽃공양을 하고 나서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한다. 입으로는 무언가 말을 하고 있다. “나모 땃싸 바가봐또”하며 예경문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삼보예찬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불공(佛供)이라는 좋은 말이 있음에도

한국불교에서는 흔히 기도한다고 말한다. 관음재일일 때는 관음기도라고 말하고, 지장재일일 때는 지장기도라고 말한다. 수험생이 있다면 수능기도를 할 것이다. 백일기도라는 말도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기도라는 말은 불교와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기도는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것이다. 유일신교에서 기도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에서의 종교상황은 마치 종교시장을 방불케 한다. 요즘은 기독교가 득세하고 있다. 수적으로 보았을 때는 비등한 것 같지만 사회적 영향력으로 보았을 때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불교는 기독교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를‘기독교 따라하기’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불교에는 기도라는 말 대신 불공(佛供)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부처님께 공양올린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훌륭한 말이 있음에도 굳기 기도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기복적인 신앙 때문일 것이다. 마치 불보살이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줄 것처럼 믿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사찰순례 갔었을 때 본 것이 있다. 그 사찰은 전국에서 수많은 불자들이 찾는 전국구와 같은 사찰이다. 그런데 사찰의 입구에 “여기 오시는 분들에게 한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 드립니다.”라는 취지의 문구를 보았다. 불보살에게 기도하면 소원성취가 됨을 말한다.

사찰에서 기도라는 말 대신 불공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사찰의 품격이 달라질 것 같다. 유일신교에서 사용하는 기도라는 말 대신 불공이라는 말을 쓰면 불자들의 마음 자세도 달라질 것 같다. 부처님에 대하여 자신의 소원이나 들어 주는 초월적인 전능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공의 공덕을 보면

불공은 어떻게 드리는 것일까? 이는 경전에서 근거를 찾아야 한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최후의 말씀이 있다.


전륜왕의 유체에 대처하듯, 여래의 유체에 대처하고 큰 사거리에 여래의 탑묘를 조성해야 한다. 거기에 화환이나 향이나 안료를 올리고 경의를 표하고 마음을 정화시킨다면, 사람들은 오랜 세월 안녕과 행복을 누릴 것이다.”(D16.112)


부처님은 탑묘를 조성하라고 했다. 반드시 부처님의 사리가 있는 탑묘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는 부처님이 탑묘를 조성할만한 가치 있는 사람으로서 부처님뿐만 아니라 연각승, 부처님의 제자, 전륜왕을 들었다. 여기서 제자는 아라한이 된 제자를 뜻할 것이다.

부처님도 아라한이었다. 부처님의 제자들도 아라한이 되었다. 누구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똑 같은 깨달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의 탑묘는 조성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아라한은 존경받아 마땅한 대상이다. 아라한은 또한 복전이다. 그래서 수타니파타 라따나경에서는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님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으니, 바른 길로 가신 님의 제자로서 공양받을 만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Stn.227)라고 했다.

사쌍팔배의 성자에게 공양하면 그 과보가 크다고 했다. 복전에게 공양하면 그 과보는 헤아릴 수 없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의 탑묘를 조성해 놓고 공양을 올린다. 공양물은 ‘화환이나 향이나 안료’(D16.112)라고 했다. 이런 전통이 있어서일까 스리랑카 불자들은 꽃공양을 하는 것 같다.

불공은 어떻게 드리는 것일까?

스리랑카 성지에 가면 공양단에 꽃공양한 것을 볼 수 있다. 꽃공양을 올린다음 합장하며 무언가 독송한다. 경에서는 ‘경의를 표한다.’(D16.112)라고 했다. 어떤 경의를 표하는 것일까?


스리랑카 불자들이 성지에서 독송하는 것을 들었다. 자세히 들어 보니 예경문과 삼보예찬이었다. “나모땃싸 바가바또 아라하또 삼마삼붓사”라는 예경문이다. 이는 “그 분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예경합니다.”라는 뜻이다. 이를 세 번 낭송한다. 다음으로 삼귀의를 한다.

삼귀의는 “붓당 싸라낭 갓차미, 담망 싸라낭 갓차미, 상강 싸라낭 갓차미”라며 세 번 한다. 왜 세 번할까? 그것은 다짐하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띠얌삐”라고 하고, “따띠얌삐”라고 말한다. 이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초님의 승가공동체에 대하여 거듭해서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겠다고 다짐하는 말과 같다.

다음으로 삼보예찬을 할 것이다. 이는 삼보에 대한 구체적인 찬탄이다. 그래서 열 가지 부처님 명호를 부르며 부처님 덕성을 찬탄한다. 가르침에 대해서는 “현세에 유익한 가르침이고, 시간을 뛰어넘는 가르침이고,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고, 궁극으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님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S11.3)라며 가르침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승가공동체의 공덕을 찬탄한다.

꽃공양을 하면서 예경문과 함께, 삼귀의, 삼보예찬을 하면 경의를 표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마음을 정화시킨다’(D16.112)라고 했다. 불공을 드리면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청정해졌음을 말한다.

이기적인 기도를 했을 때

언젠가 어느 절의 법당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노보살은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고 나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노보살은 어떤 불공을 드렸기에 마음이 편해졌을까?

어떤 이는 법당에서 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과 가족에 대한 것이다. 건강, 시험, 사업, 치유에 대한 것이 주류일 것이다. 이와 같은 사대기도를 했을 때 불보살이 들어 주면 다행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소원을 다 들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 같은 유일신을 믿는 축구선수들이 있다. 그들이 축구를 할 때 자신의 팀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신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할까? 여기 두 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다. 두 나라는 같은 유일신을 믿고 있다. 유일신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할까?

기도는 이기적이기 쉽다. 자신의 자녀에 대한 합격을 바라는 기도를 했을 때 다른 학생은 떨어질 수 있다. 사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입찰 기도를 했을 때 떨어진 업체도 있을 것이다. 이기적인 기도로는 마음이 청정해질 수 없다. 그러나 불공을 드리면 마음이 깨끗해질 수 있다.

불공을 드릴 때 부처님의 덕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가르침과 승가공동체의 덕목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런 불공은 이기적 기도와는 다른 것이다. 예경하고 삼귀의하고, 삼보예찬을 하고, 여기에다 오계를 낭송하고, 더 나아가 경을 하나 독송한다면 마음이 청정해질 것이다.

기도 대신에 불공을 해야

기도와 불공은 다른 것이다. 기도는 전능하고 초월적인 존재와 거래하는 것이다. 공물을 올려 놓고 거래하는 것과 같다. 만일 기도를 들어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까? 신심이 약화될 것이다.

사원에서 부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상당한 금액의 공물을 올려 놓고 기도했을 때 기도가 이루어지면 다행일 것이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믿음이 약화될 것이다. 어쩌면 기도발이 잘 먹히는 대상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불공이라는 훌륭한 말이 있다. 그래서 ‘기도한다’는 말 대신 ‘불공 올린다’는 말을 옛날부터 사용해 왔다. 이는 경전을 근거로 한다. 부처님은 “화환이나 향이나 안료를 올리고 경의를 표하고 마음을 정화시킨다면, 사람들은 오랜 세월 안녕과 행복을 누릴 것이다.”(D16.112)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불자들은 기도 대신에 불공을 해야 한다. 불단에 꽃을 올려 놓고 합장하며 나직이 독송해야 한다. 예경문부터 시작해서, 삼귀의, 삼보예찬, 오계, 좋아하는 경을 독송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마음이 정화된다.

마음이 청정하게 되었을 때 소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 없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오랜 세월 안녕과 행복을 누릴 것이다.”(D16.112)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불공을 올리면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고 저 세상에서도 행복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천상과 같은 삶을 살고, 죽어서도 천상에서 태어나 나서 행복한 것이다. 불공을 올리면 이래저래 행복한 것이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에 가면 오래된 보리수가 있다. 무려 2400년된 보리수이다. 이를 자야 스리 마하보디 보리수라고 한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을 때 바로 금강좌가 있었던 그 보리수를 말한다. 금강좌 보리수 가지를 꺽어서 이식한 것이 바로 스리랑카에 있다.


스리랑카 보리수는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런데 스리랑카 보리수는 부처님의 정각을 이루었던 바로 그 보리수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스리랑카에서는 자야 스리 마하보디 보리수가 수 없이 퍼져 있다. 어느 사원에 가든지 보리수를 볼 수 있다.

(인터넷)


스리랑카 불자들은 보리수를 신성하게 여기고 있다. 사원에 가는 것은 보리수를 참배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인지 보리수를 돌며 성수를 뿌려 준다. 보리수가 살아 있는 한 사원도 존속할 것이다. 보리수가 없다면 사원도 없고 불교인도 없을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보리수는 부처님을 상징한다. 또한 보리수를 부처님과 동일시한다. 그런데 보리수는 살아 있는 식물이라는 것이다. 보리수가 죽으면 불교도 죽는 것과 같다. 스리랑카에서 보리수 없는 불교는 상상할 수 없다.

자야 스리 마하보디 사원에서 스리랑카에서 가장 오래된 보리수를 보았다. 동시에 스리랑카 불자들의 신앙도 보았다. 그들의 보리수 숭배는 단지 부처님의 깨달은 나무라는 인식에서 그치지 않는다. 보리수가 오래오래 살아서 부처님 가르침이 오래오래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기도보다 불공이다. 공양단에 꽃 공양을 하고 난 다음에 예경을 한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에 대하여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기를!”라고 바란다. 이런 바람은 전능한 존재와 거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제게(또는 그대에게) 임하길 바라옵니다.”라고 바라는 것일 뿐이다.


2023-01-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