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4, 아바야기리(無畏山寺) 대탑은 왜 붉은색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19. 14:33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4, 아바야기리(無畏山寺) 대탑은 왜 붉은색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기를 남기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에도 그랬다. 만약 옛날에 여행기를 남기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있는 줄 조차 모를 것이다. 다만 남겨진 유적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여행을 가면 여행기를 남긴다. 이런 일은 나에게 있어서 의무적인 것이다. 여행기 없는 여행은 상상할 수 없다. 일상에 대하여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하는 자가 해외여행과 같은 찬스를 놓칠 수 있을까? 이번 스리랑카 순례 역시 후기 형식으로 여행기를 남기고 있다.

 

스리랑카 현지시점은 20221212일 늦은 오후이다. 순례자들은 아바야기리 사원(無畏山寺)의 식당, 연못, 불상 유적지 등을 둘러 보고서 차로 이동했다. 다음 행선지는 아바야기리 대탑이 있는 곳이다.

 

 

무엇이든지 처음 접하는 것은 인상이 강렬하다. 아바야기리 대탑도 그랬다. 온통 붉은 색이다. 땅 바닥도 붉은 색이고 탑도 붉은 색이다. 탑은 왜 붉은 색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아바야기리 대탑 가는 길은 한가하고 한산하다. 이는 마하비하라 사원 구역 안에 있는 루완웰리 대탑과 매우 비교된다. 순례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드문드문 있을 뿐이다. 왜 그런 것일까?

 

 

대탑 앞 입구에는 개들이 한가로이 누워 있다. 길바닥에서 오수를 즐기는 것이다. 스리랑카에서는 견격(犬格), 개도 존중되는 것 같다. 그 옛날에도 개는 이렇게 한가하게 보냈을까?

 

대탑 입구에 커다란 입간판이 보였다. 사진을 보니 아바야기리 이전과 이후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영문으로 된 설명문을 읽어 보았다.

 

 

아바야기리 스투파는 기원전 1세기에 건립되었다. 왈라감바(Walagamba) 왕에 의해서 건립된 것이다. 이는 기원전 3세기에 건립된 마하비하라 보다는 2세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사원임을 알 수 있다.

 

대탑은 높이는 235피트이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무려 71미터나된다. 아마 아누라다푸라 신성도시 구역에서 가장 높은 탑일 것이다. 격자형 기단은 한변이 150미터 가량 된다. 왠만한 학교 운동장보도 더 크다.

 

 

 

아바야기리 대탑은 복원된 것이다. 이는 1997년에 중앙문화기금(The Central Cultural Fund)으로 스투파 보존을 위해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유네스코가 지원한 것이다. 이 사업비에 려 530만불이 소요되었다. 한화로 689억원이다.

 

입간판을 보면 복원전과 복원후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복원 전에는 나무와 숲이 있어서 마치 작은 산처럼 보였다. 다만 꼭대기에 탑 모양의 형상이 있어서 오래 된 스투파였음을 알 수 있다.

 

(인터넷)

 

아바야기리 대탑이 오늘날과 같은 붉은 색 모습으로 우뚝 서있는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20156월에 완성되었다. 유네스코 프로젝트로서 1997년부터 작업이 시작되어서 18년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인터넷)

 

(인터넷)

 

대탑에 점점 가까이 다가간다. 발은 맨발이다. 성소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양말은 신지 않았다.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샌들을 신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 현지사람들이나 순례자들 대부분은 샌들을 신고 있다.

 

온통 붉은 색이다. 거대한 불탑 아래에 있는 이층지붕구조의 법당도 붉은 색이다. 탑돌이를 하기 전에 먼저 법당에 들어 갔다.

 

 

법당에는 와불이 있었다. 이는 부처님의 열반상을 말한다. 부처님이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있는 모습이다. 와불 불단에는 갖가지 색깔의 꽃공양이 올려져 있다. 그렇다면 법당에 왜 열반상이 있을까?

 

 

스리랑카에서 어느 법당에 가든지 와불상을 볼 수 있다. 동굴법당도 예외가 아니다. 보리수 앞에 있는 불상은 거의 백퍼센트 사마디불상이다. 이는 부처님의 정각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불탑이 있는 법당에 가면 반드시 와불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열반과 관련이 있다. 스투파에는 불사리에 모셔져 있기 때문에 와불이 있는 것이다.

 

 

아바야기리 법당에서 놀라운 것을 보았다. 그것은 힌두신상이다. 법당에 왜 힌두산상이 있을까? 이는 아바야기리의 개방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아바야기리는 테라와다불교이긴 하지만 대승의 교리도 받아 들였던 것이다. 심지어 밀교의 교리까지 받아 들였다. 이처럼 개방적인 아바야기리에 대하여 4세기 초반에 이곳을 방문했던 법현스님은 불국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마하비하라파(Mahāvihāravāsins)에서는 대승불교(Mahāyāna)를 거부하고 소승불교(Hīnayāna)를 실천하는 반면, 아바야기리파(Abhayagirivihāravāsins)에서는 소승불교(Hīnayāna)와 대승불교(Mahāyāna) 가르침을 모두 연구하고 삼장(Tripiaka)을 전파한다.”(위키백과, Abhayagirivihāra)

 

(위키백과)

 

법현스님은 스리랑카에 410년 무렵에 왔다. 스님은 아바야기리사원에서 2년 머물렀다. 스님은 중국 동진출신이다. 그때 당시 중국불교는 대승의 교리를 받아 들였다. 그래서일까 아무래도 개방적인 아바야기리에 있었을 것이다. 이는 스님이 아바야기리파에 대하여 소승과 대승을 모두 연구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천년전 스리랑카불교에서 크게 두 개의 파가 있었다. 하나는 마하비하라파이고 또 하나는 아바야기리파이다. 두 파는 천년 이상 경쟁했다. 한쪽이 부흥하면 한쪽이 몰락하는 등 마치 시소게임 하듯 했다. 이는 왕권과 관련이 있다. 왕이 후원하면 부흥하고 왕이 후원을 끊으면 몰락하는 것이다.

 

아바야기리파는 현재 스리랑카에서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흔적만 남아 있다. 거대한 붉은 벽돌의 아바야기리 대탑이 그때 당시의 영화를 말해 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아바야기리파는 왜 몰락했을까?

 

오늘날 인도에서 불교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인도에서 불교를 보기 힘들다. 불교의 사대성지나 팔대성지 근처에 가야 불교를 볼 수 있다. 인도에서 불교는 13세기에 망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슬람 침략이라는 말도 있고, 힌두교와의 습합으로 인하여 정체성을 상실해서 망했다는 말도 있다.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변질되어서 마침내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아바야기리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법현스님이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아바야기리파는 황금시대였다. 이는 사원이 왕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아바야기리 사원에 모셔져 있을 정도로 번영했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대륙의 새로운 사조가 유입되었다.

 

아바야기리에서는 법현스님아 오기도 전에 이미 대승불교가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3차 결집된 공인된 불교와 함께 대륙의 새로운 사조인 마하야나(대승불교)도 함께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마침내 바즈라야냐(금강승)까지 받아 들이게 되었다.

 

인도에서 불교는 13세기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불교가 대승을 거쳐서 바즈라야나로 전개되었을 때 힌두교와 크게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인도불교는 힌두교에 흡수되어서 사라져 버렸다. 아바야기리도 비슷한 길을 갔다고 본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청정도론이 있다. 해제를 보면 마하비라파와 아바야기리파의 대립과 경쟁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포용적인 아바야기리파는 마하야나는 물론 바즈라야나까지 받아 들이게 되었는데 이는 보수적인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바야기리파에서는 대승불교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그 중에 방등부경전인 베뚤리야삐따까가 있다. 이 교리에 대한 까타밧투의 주석서를 보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1)궁극적 의미로는 길과 경지만을 승가라고 하고, 승가는 어떠한 것도 수용하지 않는다.

2) 길과 경지만이 승가이므로 훌륭한 공양을 받아도 공덕을 증가시킨다고 볼 수 없다.

3) 길과 경지만이 승가이므로 먹고 마시고 향수하지 않는다.

4) 길과 경지만이 승가이므로 어느 하나라도 보시할 수 없고 승가 역시 받을 수 없다.

5) 부처님께서는 먹고 마시고 향수하지 않는데, 세간에 수순하기 위해서 그 몸을 나툰 것이라 부처님께 보시하는 것은 공덕이 없다.

6) 부처님께서는 도솔천에 있어서 인간 세상에 화신으로 나투신 것이다.

7)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은 화신으로 나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존자 아난다가 설한 것이다.

8) 긴 윤회를 함께 태어나서 수행하리라고 서원이 같으면 여자와 함께 음행해도 된다.”(베뚤리야삐따까 까타밧투의 주석서, KPTS 청정도론 해제 17)

 

 

아바야기리파는 이와 같은 교리를 받아 들였다. 이는 교단 정화의 빌미가 되었다. 스리랑카 왕 보하리까 띳사(AD.135-215)는 이러한 교리를 억압하고 베뚤리야삐따까를 불살랐다. 승려들을 이교적 타락에서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바야기리파는 2-3세기에 정화된 바가 있었다. 그럼에도 개방적인 아바야기리파는 대륙의 새로운 사조를 계속 받아 들였다. 마침내 8세기에는 대승불교의 밀교의 형태인 바즈라야나 불교가 행해지기에 이르렀다.

 

바즈라야나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먼 것이다. 힌두교의 가르침과 유사하다. 불교가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힌두교의 교리를 받아 들인 것이 바즈라야나라고 볼 수 있다.

 

아바야기리에서 바즈라야나를 받아 들인 것은 또다시 불교정화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번에는 스리랑카에서 아바야기리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리랑카 왕 파라카마바후 1(AD.1153-1186)에 의해서 폐지된 것이다. 스리랑카 역사서 쭐라왐사에 따르면, 마하비하라를 먼저 정화하고 이어서 아바야기리와 제따와나를 폐지했다.

 

아바야기리와 제따와나는 마하비하라로 흡수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승려들이 추방되었다. 마하비하라 승려가 되고자 한다면 사미부터 시작해야 했다.

 

아바야기리파는 12세기에 스리랑카 불교에서 사라졌다. 스리랑카에서는 마하비하라파만 남게 되었다. 마하비하라파가 승자가 된 것이다. 정통을 고수한 교단은 승자가 되고 변화를 수용한 교단은 패자가 된 것이다. 아바야기리가 망한 것을 보면 인도불교가 망한 것과 유사하다.

 

인도불교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다가 망했다. 이슬람 침입으로 망한 요인도 있고, 힌두교와 습합으로 망한 요인도 있다. 무엇보다 근본 가르침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가르침이 변질되었을 때 결국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는 13세기에 사라졌다. 그리고 잊혀졌다. 그로부터 700년 후인 1800년대 밀림속에서 유적지가 발견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리랑카에서 아바야기리는 12세기에 사라졌다. 그리고 잊혀졌다. 아바야기리가 사라진지 800년만인 1800년대 밀림에서 유적을 발견했다.

 

아바야기리는 밀림속에 버려지고 파괴되고 폐허가 되었다. 유적은 1800년대에 발견되었다. 그런데 위키백과에 따르면, 유적이 발견되었을 때 전문가들이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렸는데 제따와나 유적으로 잘못 식별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정도로 잊혀진 것이다.

 

아바야기리는 스리랑카불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에 대하여 위키백과에 따르면 현재 스리랑카 불교에서 대승불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불교에서는 3차결집된 공인불교가 공식적인 불교이지만 민간에서는 아발로키테스바라 보디사트바(관세음보살) 숭배가 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불교에서는 대승불교와 밀교, 힌두교 신앙의 영향이 곳곳에 있다. 이는 건축물에서도 나타난다. 이른바 출입구 디자인을 말한다. 출입구에 있는 수호신상이다.

 

 

스리랑카 사원에서는 입구에 두 개의 석판을 볼 수 있다. 건물로 이어지는 계단 입구 양쪽에 있다. 이를 가드 스톤이라 하는데 스리랑카에서느 무라갈라라고 한다. 이는 보호석이다. 우리나라에서 금강역사상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보호석에는 힌두교의 상징이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흔한 것은 나가라자 또는 코브라가 의인화된 모습이다.

 

가드 스톤은 아바야기리 유적에서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어느 사원에서든지 발견된다. 이는 힌두교의 영향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바야기리 불탑 앞에 있는 법당에서 본 힌두신상은 어쩌면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마치 우리나라 사찰에서 산신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바야기리는 기원전 1세기부터 12세기까지 1100년 동안 존속되었다. 때로 마하비하라와 경쟁해서 우위를 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법이 오염되어서 결국 사라졌다. 이는 종교의 강한 보수회귀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교리가 타락되었을 때 처음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바야기리는 천년 이상 존속하면서 성과도 있었다. 아바야기리에는 크게 네 개의 물라가 있었다. 이는 종교교육을 위한 그룹화된 기관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물라는 국제적이었다. 전세계에서 수행승들이 찾아 와서 유학했고 또한 전세계로 수행승을 파견했다. 어느 정도였을까? 상선을 타고 자바와 중국과도 교류한 것이다.

 

아바야기리는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전세계의 모든 종교와 사상이 연구되었다. 산스크리트어와 빠알리어로 된 경전이 있어서 전세계 불교학자들의 본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해탈도론을 저술한 우파티사 등 여러 학자들도 있었다. 이런 연유로 법현스님이 이곳 아바야기리에서 2년 머물렀을 것이다.

 

 

아바야기리 대탑을 탑돌이를 했다. 탑의 하단 직경은 백미터가 넘는다. 둘레를 도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린다. 그런데 탑을 보니 붉은 벽돌 사이로 풀이 자라고 있었다. 저대로 방치하면 나무도 자라게 될 것이다.

 

아바야기리 대탑이 복원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20015년에 복원되었으니 현재 모습은 불과 7년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있다. 왜 아바야기리는 마하비라하 사원 구역에 있는 불탑처럼 백색으로 칠하지 않았을까? 이를 세 가지 요인으로 본다.

 

첫 번째 이유는 아바야기리가 폐사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12세기에 불교정화 당시에 아바야기리는 제따와나와 함께 폐사가 되었다. 승려들이 추방당하거나 마하비하라의 사미가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아바야기리가 정법불교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하비하라는 정법을 따랐다. 3차결집된 공인된 불교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했다. 그래서 대륙의 새로운 사조에 물들지 않고자 했다. 그러나 아바야기리는 대륙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 들였다. 더구나 바즈라야나마져 받아 들였다. 그 결과 부처님 본래가르침과 멀어졌다.

 

세 번째 이유는 아바야기리 대탑에 사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리가 없다면 신도들이 찾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꽃공양도 볼 수 없다.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에 호양나무가 있다. 사막에 자라는 호양나무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넘어져서 천년이라고 한다. 아바야기리 대탑을 보니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인 것 같다.

 

 

천년도 전에 이곳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출가의 목적을 달성했을까? 저 멀리 극동에서 온 나그네가 대탑을 돌면서 묻는다. 이런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탑 난간에 있는 원숭이는 먹을 것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2023-01-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