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2, “이 댓돌을 딛고 가는 자 열반에 이르리라!”아바야기리 문스톤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17. 11:06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2, “이 댓돌을 딛고 가는 자 열반에 이르리라!”아바야기리 문스톤을 보고


여행을 가면 여행기를 남긴다. 단지 보는 것으로 끝난다면 너무 아깝다. 귀중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여행한 것이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로서 남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신의 기록도 될 뿐만 아니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지 시점은 2022년 12월 12일 중간 오후이다. 순례자들은 투파라마야 불탑을 보고 난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방향을 알 수 없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가이드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 갈 뿐이다.


유적지와 유물이 있는 구역은 매우 넓다. 하나의 도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집도 없고 상점도 없고 건물도 없는 도시이다. 아누라다푸라 신성도시를 말한다. 고대 유적이 있는 도시 전체가 신성한 구역이라서 성스러운 도시라고 했을 것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는 덥지 않다. 녹음은 우거져 있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나무는 왕자처럼 커다란 위용을 자랑한다. 구역이 너무 넓어서 차로 이동해야 한다. 왕복 2차선 소로에는 자동차와 툭툭, 오토바이가 달린다. 대체로 한가한 풍경이다.

현지인 가이드가 가장 먼저 안내한 곳은 문스톤(Moonstone)이다. 위치는 왕궁거주지역(Monastic Residentil complex)에 있다, 문스톤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본다. 한자어로 반월석(半月石)이다. 왜 이곳에 데려 왔을까? 그것은 아누라다푸라 신성도시 가장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아바야기리 사원 구역이다. 가이드는 북쪽에서 차츰 남쪽으로 이동하여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아누라다푸라 신성도시에는 세 개의 사원구역이 있다. 남쪽에는 마하비하라 사원 구역이 있고, 동쪽에는 제따와나 사원 구역이 있고, 북쪽에는 아바야기리 사원 구역이 있다. 여기서 마하비하라는 한자어로 대사(大寺)라고 하고, 아바야기리는 무외산사(無畏山寺)라고 한다.

두 파는 경쟁했다. 한쪽이 번영하면 하면 또 한쪽은 몰락했다. 이런 관계가 천년 이상 지속되었다. 최종 승자는 마하비하라파이다. 12세기에 아바야기리파는 몰락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 때부터 12세기까지 무려 1300년 동안 아바야기리는 존속했었다. 그 근거지가 아누라다푸라 북쪽 구역에 있는 아바야기리 유적이다.


아바야기리 유적지는 매우 넓다. 하나의 작은 도시와도 같다. 그래서 유적지를 이동하려면 차량을 이용해야 한다. 문스톤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미지 하우스’, ‘엘레펀트 폰드’, ‘사마디불상 3’순으로 보았다. 그런데 아바야기리에는 과거 왕궁 유적지도 있다는 것이다. 왕궁 유적지에 문스톤이 있었다.


문스톤은 현지어로는 산다까다 파하나(Sandakada Pahana)라고 한다. 스리랑카 고대 건축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으로 건물입구에 설치 되어 있는 일종의 댓돌이라고 볼 수 있다. 반원형으로 생긴 댓돌을 밟고 입구에 들어 가는 것이다.

문스톤은 돌로 만든 반원형 댓돌이다. 우리나라 절에서 볼 수 있는 댓돌 같은 역할을 한다. 법당에 들어가기 전에 커다란 댓돌이 있는데 이를 딛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 스리랑카에서는 사원의 입구나 궁전의 입구에 반월형의 댓돌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댓돌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가이드는 문스톤의 아름다움을 설명했다. 두 곳에 있는 문스톤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하나는 이곳 아바야기리 구역에 있는 문스톤이고, 또 하나는 폴론나루와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약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동물 문양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문스톤은 아누라다푸라 후기에 처음 보여진 것이라고 했다. 현지 입간판을 보니 7-8세기에 해당된다. 사원이나 왕궁 입구 댓돌에 문양을 넣기 시작한 것이 문스톤의 시초가 되는데 가면 갈수록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스톤에는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을까? 크게 네 개의 반원형 테두리가 있다. 가장 안쪽부터 연꽃, 백조, 네 가지 동물, 불꽃 문양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문양은 모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반월 가장 안쪽에는 연꽃문양이 있다. 반쪽만 있는 연꽃이 두 개의 테두리로 되어 있다. 연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부처님을 상징할 것이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을 진흙 속에 피어 있는 연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연꽃이 왜 부처님의 상징일까? 이는 상윳따니까야 ‘꽃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자라 물 위로 솟아 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연꽃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국내 서적에서는 연꽃에 대하여 천국을 상징한다고 했다. 문스톤이 사원 입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궁전 입구에도 있고 주요 건물 입구에도 있다고 본다면 타당한 설명으로도 보인다.

연꽃문양에 대한 설명은 현지 입간판에도 보인다. 입간판에는 연꽃문양에 대하여 “lotus by enlightenment”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문스톤에 있는 연꽃문양은 깨달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연꽃은 부처님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깨달음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절에 가면 연꽃문양을 많이 볼 수 있다. 불교의 꽃이 연꽃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연꽃 문양 바깥에는 백조와 네 종류의 동물 문양이 있다. 문양의 경계는 리야벨(liyabel)이라 하여 덩굴식물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백조를 보면 헤엄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입에는 풀을 물고 있다. 여기서 백조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국내 서적에서는 순결을 상징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현지 입간판에서는 “the pious by the swans”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백조의 경건함을 의미한다.

백조가 왜 경건함의 상징일까?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숫타니파타에 따르면 백조는 수행승의 상징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 (Stn.22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아마 이런 이유로 문스톤에서는 백조를 경건함의 상징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백조 다음에 있는 테두리는 네 가지 동물에 대한 것이다. 코끼리, 사자, 말, 황소 문양이다. 이들 동물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위키백과에 따르면 사성제와 생노병사를 상징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현지 입간판에서는 “samsara by the quadrupeds”라 하여 네 발 달린 짐승은 윤회를 상징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가장 바깥 쪽에는 불의 테두리가 있다. 이는 욕망을 상징한다. 불꽃 같은 욕망이다. 존재가 삼계를 윤회하는 한 결코 멈추지 않는 욕망이다. 이런 상징도 경전에 근거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상윳따니까야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S35.28)


부처님은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있다. 이는 일체가 불타고 있다는 말과 같다. 부처님이 말한 일체는 여섯 감각영역이다. 그래서 “시각도 불타고”라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어떤 불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탐욕의 불,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S35.28)라고 말씀 하셨다.

아바야기리 구역에 있는 문스톤에는 네 가지 상징이 있다. 그것은 연꽃, 백조, 네마리 동물, 그리고 불꽃이다. 가장 바깥에 있는 불꽃은 탐, 진, 치의 불꽃을 상징한다. 욕망의 불꽃이 타오르는 한 윤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안쪽 테두리에는 생, 노, 병, 사 윤회를 상징하는 네 마리 동물, 즉 코끼리, 사자, 말, 황소 문양이 있다.

윤회는 괴로운 것이다. 언제까지 고통의 바다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백조의 테두리가 있다. 백조는 수행승을 상징한다. 백조는 흰색이기 때문에 순결을 상징한다. 백조는 청정한 삶을 사는 수행자를 상징하는 한다. 청정한 삶을 살았을 때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장 안쪽 테두리는 연꽃이다. 연꽃은 부처님을 상징하기도 하고 깨달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부처님을 깨달은 자라고 하는데, 부처님은 진흙탕 속에 핀 연꽃으로 묘사되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연꽃은 깨달음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고 동시에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문스톤 가장 안쪽에는 달이 있다. 연꽃 테두리 안쪽에 반월형의 둥근 달이 있는 것이다. 달은 무엇을 상징할까? 아마 그것은 열반일 것이다. 왜 그런가? 앙굴리말라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예전에는 방일하여도
지금은 방일하지 않은 자,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저질러진 악한 일을
선한 일로 덮으니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참으로 젊은 수행승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M86)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당시에 연쇄 살인자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와서 아라한이 되었다. 살인자에서 아라한이 된 앙굴리말라는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게송으로 노래했다. 이에 대하여 구름을 벗어난 달과 같다고 했다. 여기서 달은 해탈과 열반을 상징한다.

문스톤에서 가장 안쪽에 반원형의 달이 있다. 그런데 달은 열반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근거가 있는 말이다. 청정도론 22장 ‘앎과 봄의 청정’을 보면 열반의 순간에 대하여 “구름이 제거된 하늘에서 달을 보고 월식을 알 수 있었다.”(vism.22.8)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그 가운데 세 개의 구름은 진리를 은폐하는 거칠고, 중간이고, 미세한 오염의 어둠과 같다. 세 개의 바람은 세 가지 수순단계의 앎과 같다. 눈 있는 자는 혈통전환하는 앎과 같다. 달은 열반과 같다.”(Vism.22.9)


청정도론은 스리랑카에서 5세기 붓다고사가 지은 것이다. 청정도론은 니까야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이다. 이런 이유로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부동의 준거틀과 같다. 그런데 청정도론을 보면 열반의 순간을 글로서 설명해 놓았다는 것이다.

깨달음에 대하여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팔만사천법문을 해서 알려 주고자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비유를 통해서 설명이 가능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청정도론에서도 비유로서 열반을 설명하고 있다. 열반에 대하여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설명한 것이다.

앙굴리말라 장로는 게송의 말미에 후렴구로서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이라고 했다. 여기서 달은 열반을 상징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도 “달은 열반과 같다.”(Vism.22.9)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아바야기리 구역에 있는 문스톤, 반월석에 있는 달은 열반을 상징하는 것임에 틀림 없다.

문스톤은 우리말로 하면 법당 댓돌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법당에 들어 갈 때 댓돌을 밝고 들어간다. 그런데 댓돌이 너른 것도 있다는 것이다. 불갑사 대웅전에 있는 댓돌은 크기가 마치 제사상을 펼쳐 놓은 것처럼 크다. 그러나 아무런 문양이 없다.

(불갑사 대웅전 댓돌)


스리랑카에도 댓돌이 있다. 그런데 스리랑카에서는 정교한 문양을 놓았다. 그것은 불교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윤회하는 세계에서부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상징을 집어 넣은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열반이다. 이런 댓돌을 사원 법당 입구에서도 볼 수 있고 궁전 입구에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일반 건물 입구에서도 볼 수 있다.


법당에 들어 갈 때 댓돌을 밝고 들어간다. 우리나라 법당 댓돌에도 문스톤과 같은 상징을 넣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문스톤은 세간의 세계에서 출세간의 세계로 넘어가는 문과 같다. 문스톤은 윤회의 세계에서 열반의 세계로 건너가는 문과 같다. 그래서 스리랑카 문스톤을 보면 “이 댓돌을 딛고 가는 자 열반에 이르리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2023-01-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