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3, 법현스님의 구도열정의 현장 아바야기리 유적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18. 17:09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2, 법현스님의 구도열정의 현장 아바야기리 유적

 

 

순례자들은 왕궁유적에서 문스톤을 보고 난 다음 식당 유적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구역이 넓어서 이동할 때마다 렌트한 승용차로 이동해야 했다. 왕궁 유적에는 석축물과 붉은 벽돌만 남아 있었다. 이동한 식당 구역 역시 석축물과 벽돌뿐이었다.

 

 

현지 시각은 20221212일 중간 오후이다. 아바야기리 식당 유적을 보았을 때 그 규모에 놀랐다. 가이드에 따르면 아바야기리에 5천명의 스님들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석재로 만든 커다란 구유였다.

 

 

입간판 설명에 따르면 식당유적은 BC 1세기 때부터 네 단계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식당유적은 10세기 때 까쌋빠 왕(914-923 A.D) 비문에서도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법현스님이 이 식당유적에 대해서 언급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입간판에 법현스님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입간판에는 법현스님에 대하여 ‘Fa-hien’이라고 표기 되어 있다. 법현스님이 5세기 초에 이곳에 왔을 때 5천명의 스님들이 살았는데 이곳 메인 식당에서는 5천명분의 공양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석조구유는 길이가 19미터에 이른다. 이곳에 밥을 해 놓으면 5천명분이 되는 것이다. 옆에는 또다른 석조구유가 있는데 이는 커리와 같은 죽을 담아 놓을 수 있는 용도라고 한다. 모두 바위로 있어서 천년이상 남아 있는 것이다.

 

 

석조구유 옆에 붉은 벽돌로 된 유적이 있다. 이에 대하여 가이드는 식품저장창고라고 했다. 한장소에서 식품을 보관하고,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고, 식사를 하는 등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식당이 여러 개 있었을 것이다. 이곳이 가장 큰 식당 유적이기 때문에 메인 리펙토리(The Main Refectory)라고 하는 것이다.

 

 

아바야기리 식당유적에서 뜻하지 않게 법현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법현스님이 누구인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때 스님이다. 스님은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와서 이름을 남기게 되었을까?

 

법현스님은 중국에서 최초로 인도여행기를 남긴 스님이다.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을 해놓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수많은 구법승들이 서역을 거쳐 천축이라 불리우는 인도에 건너갔지만 기록을 남긴 스님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법현스님은 놀랍게도 나이가 60이 넘어서 순례를 떠났다. 그때 당시 나이가 60이라면 고령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왜 목숨을 건 순례를 떠난 것일까? 이는 불교가 중국에 체계적으로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여러 전통의 다양한 불교가 전래되다 보니 어떤 것이 앞선 것인지,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법현스님은 기록에 따르면 337년에 태어나 422년에 입멸했다. 스님이 구법여행을 떠나던 때는 399년이었다. 그때 스님의 나이는 62세이다. 어떻게 이렇게 고령의 스님이 떠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정법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법현스님, 위키백과)

 

스님은 중국에서 떠날 때는 육로를 이용했고 귀국할 때는 해로를 이용했다. 그런데 스님의 불국기에 있는 여행기를 보면 사막을 건너는 장면이 나온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널 때에 다만 죽은 자의 해골이 이정표가 될 뿐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스님은 혼자 가지 않았다. 스님의 불국기에 따르면 혜경(慧景), 혜응(慧應), 혜외(慧嵬), 도정(道整) 스님과 함께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해로로 귀국했을 때는 혼자였다. 도반 스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순례 중에 사망한 스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인도나 스리랑카에서 평생 살다가 입적한 스님도 있었을 것이다.

 

(법현스님 행적도)

 

법현스님은 육로로 6년 걸렸다. 인도에 도착한 해는 405년이 된다. 스님은 굽타왕조의 수도인 파트나에 3년간 머물면서 부처님의 유적지를 순례하고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또한 동인도에서 2년간 수학했다. 법현스님은 인도에서 5년 있었던 것이다.

 

법현스님에 대하여 놀라운 사실이 많다. 나이가 60이 넘어서 목숨을 건 순례를 했다는 것이 놀랍고, 그 다음으로는 스리랑카에서 2년을 보냈다는 것이다. 스님은 왜 스리랑카까지 넘어간 것일까?

 

법현스님이 인도에 갔었을 때 인도불교는 어땠을까? 대승불교가 꽃피우고 있던 시대였을 것이다. 근본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불교사상이 모두 다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스리랑카로 가야 했던 것은 인도대륙에서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해였을 것이다. 특히 율장에 대한 것이 그렇다.

 

중국에 불교가 유입되었을 때 체계적으로 전승된 것은 아니다. 이것저것 뒤섞여 들어 오다 보니 어떤 것이 진정한 부처님 가르침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율장에 대한 것이 그렇다. 이는 스님이 불국기에서 율장의 부족함을 개탄했다.”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다.

 

법현스님은 인도에서 5년동안 머물면서 삼장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을 것이다. 특히 율장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스리랑카에는 3차결집에서 공인된 빠알리 삼장이 고스란히 전승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스님은 아마도 부족한 자료를 보충하기 위해서 스리랑카로 건너갔는지 모른다.

 

인도대륙의 사조는 변화무쌍했다. 특히 중부지방의 불교사조는 끊임없이 바뀌었다. 대승불교가 흥기하고 중관과 유식, 여래장 등 각종 대승불교 사상이 발전되어 왔다. 법현스님은 어떤 사조의 불교에 관심 있었을까?

 

법현스님이 인도에 온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사조의 불교보다도 부처님 당시의 불교가 어떤 것인 것 관심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특히 율장에 대한 것이 그렇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의 불교가 스리랑카에서는 고스란히 원본 훼손없이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스리랑카에서 2년 머물렀을 것이다.

 

법현스님이 스리랑카로 건너오던 때는 410년이 된다. 그렇다면 법현스님은 스리랑카 어느 사원에서 머물렀을까? 이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청정도론 해제를 보면 법현스님 행적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이는 그가 머문 곳은 당연히 대승불교친화적인 아바야기리비하라 사원이었다.”(19)라고 언급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법현스님은 중국 동진의 스님이었다. 중국에서는 대승불교가 유행했기 때문에 대승불교 스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스님이 도착했던 인도에서도 대승불교가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스님이 스리랑카에 왔을 때는 개방적인 아바야기리 사원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아바야기리는 어떤 사원이었을까? 스리랑카에서 아바야기리는 상좌부로 분류된다. 다만 대승불교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에 대승상좌부로 불렸다. 이에 반하여 아바야기리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마하비하라는 소승상좌부라 불렸다.

 

스리랑카불교에서 마하비하라와 아바야기리는 천년 이상 대립관계에 있었다. 아누라다푸라에 두 사원이 있었지만 구역은 달랐다. 법현스님이 스리랑카에 들어 왔을 때는 아바야기리가 우세했다. 아바야기리는 대소승을 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려 숫자도 5천명 이상으로 가장 많았다. 이에 반하여 오로지 3차결집된 공인된 불교전통만을 고수하던 마하비하라는 승려가 3천명 가량으로 열세였다.

 

법현스님은 인도대륙에서 구할 수 없었던 것을 스리랑카에서 구했을 것이다. 아마도 사부니까야와 율장이었을 것이다. 중국에 중구난방식으로 들어 온 새로운 사조로서는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근본을 찾아 스리랑카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변방에서 정통성을 찾을 수 있음을 말한다. 왜 그런가? 변방에서는 왠만해서는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중앙에서는 자주 바뀐다. 대표적인 예가 2차결집을 야기했던 십사논쟁에 대한 것이다. 이는 서부에 있는 수행승이 중부에 있는 수행승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함으로 인하여 촉발되었다.

 

인도 서부는 변방이다. 변방에 전래된 불교는 전통을 바꾸려 하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섬은 더 심하다는 것이다. 스리랑카가 대표적이다. 섬은 변방일 뿐만 아니라 대륙과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소까 대왕 당시에 3차결집된 공인불교가 원본 훼손없이 고스란히 전승되어 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법현스님이 머나먼 남쪽 섬나라 스리랑카에 오지 않았을까?

 

법현스님은 411년부터 413년까지 2년동안 스리랑카에 있었다. 스님은 귀국할 때는 해로를 이용했다. 스님은 귀국해서 422년에 입적할 때까지 스님이 가져 온 율장과 아함경 등 수많은 불교경전을 번역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법현스님이 대승불교 경전보다는 초기불교 율장과 경장을 구하기 위해서 구법여행 했음을 알 수 있다.

 

순례자들은 식당유적을 보고 난 다음 커다란 연못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이드는 이곳을 엘레펀트 폰드(Elephant Pond)라고 했다. 스리랑카에서는 에트 포쿠나(Eth Pokuna)라고 한다. 우리말로 코끼리 연못이 될 것이다.

 

 

왜 코끼리 연못이라고 했을까? 코끼리가 목욕하는 곳이어서 엘레펀트 폰드라고 했을까? 연못은 매우 크다. 폭은 52미터이고 길이는 무려 159미터이다. 마치 항공모함처럼 크다. 코끼리가 목욕하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그러나 코끼리 목욕 공간은 아니다. 연못이 크다고 해서 코끼리 연못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순례자들은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시간에 쫓겨 거의 주마간산식으로 유적지를 둘러 보았다. 그 중에 불상이 있는 유적지가 눈에 띄었다. 어디선가 본 듯 하다. 팔이 잘리고 얼굴이 훼손된 불상을 보자 끌렸다. 이에 잠시 틈을 내서 사진을 찍으로 갔다.

 

 

유적지 명칭은 15번 보리수 사원(Bodhi-tree Shrine III) 유적이다. 보리수 사원 유적에는 중앙에 법당터 유적이 있다. 뒷편에는 석불이 하나 있는데 팔이 하나 잘려져 나갔다. 이 유적에 대한 안내문을 보니 “This is most ancient Bodhi-tree Shrine of the Abhayagiri monastery as reported by the Chinese monk Fa-hien, who visited Sri Lanka in 5th century A.D.”라고 쓰여 있다. 5세기에 법현(Fa-hien) 스님이 이곳을 다녀간 후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법현스님이 다녀 갔을 때는 오늘날 보는 것처럼 폐허는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번영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안내문을 보면 “The Budda images and Vajrasanas(Sacred Seats) found around the Bodhi-tree, and the remains of for construction phases from the first century B.C. are visible here.”라고 쓰여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불상과 금강좌가 보리수 주변에 있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어떤 유적은 기원전 1세기 것도 있다는 것이다.

 

 

법현스님은 불국기에서 이곳 아비야기리승원에 와서 본 것을 기록했다. 그때 본 것이 바로 보리수였다는 것이다. 그 보리수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보리수였던 것이다. 아마 묘목을 가져 온 것이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보리수 네 방향으로 불상이 있는데 이를 금강좌 (Vajrasana)라고 했다.

 

이번에 스리랑카 순례에서 아비야기리승원 구역에서 보리수 사원 유적을 보았다. 법현스님의 기록대로라면 보리수가 있어야 하고 네 기의 불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보리수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네 기의 불상 중에서 팔이 잘린 한기의 불상만 남아 있다.

 

 

팔이 잘린 불상은 금강좌에 앉아 있다. 불상의 얼굴은 약간 훼손되었다. 전형적인 사마디형 불상이다. 이 불상을 보자 가슴이 울컥했다. 그리고 어디서 본 듯 익숙했다.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불족을 말한다. 유적지에는 부처님 발바닥 모양이 커다랗게 바위에 조성되어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자 순간적으로 혹시 내가 전생에 이곳에서 수행자로 살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아비야기리승원 터에는 수많은 유적이 흩어져 있다. 한때 번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비야기리뿐만아니라 아누라다푸라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적을 보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나의 착각일지 모른다.

 

 

2023-01-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