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0, 루완웰리세이야 불탑과 마하비하라(大寺)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 12. 18:36

스리랑카 성지순례기10, 루완웰리세이야 불탑과 마하비하라(大寺)(인터넷)


순례시점은 2022년 12월 12일(월) 오후이다. 순례자들은 미리사베티야 불탑에서 루완웰리세이야(Ruwanweli Seya) 불탑으로 향했다. 도중에 비를 만났다. 처음에는 약하게 내렸으나 빗줄기는 점차 강해졌다. 마침내 폭우로 변했다. 열대성 스콜같았다.

 


비가 내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승용차 안에서 보내야만 했다. 비가 오래 가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아열대나 열대지방의 경우 비가 세차게 내리지만 반시간 정도 지나면 그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가 내린지 40분만에 비가 그쳤다. 루완웰리세이야 주차장에는 월요일 평일임에도 순례객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 사람들은 스리랑카 사람들이고 거의 대부분 흰 옷을 입었다.

 


주차장에 꽃가게가 있었다. 이번에는 불단에 꽃공양을 하고자 했다. 스리랑카 국화 여섯 송이에 200루피였다. 스리랑카 국화는 연꽃이다. 연꽃 중에서도 수련이다. 보라색 나는 수련이다. 검색해 보니 영어로 ‘Nymphaea nouchali’이다.

 


아누라다푸라에는 여러 기의 불탑이 있다. 높이가 50미터가 넘는 대탑은 다섯 기가 있다. 그 중에서도 흰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세 개이다. 바로 이전에 다녀 온 미리사베티야이 있고, 그리고 참배하고자 하는 루완웰리세이야가 있고 2021년에완공된 산다히루세이야가 있다. 나머지 두 기는 아비야기리 불탑과 제따와나 불탑이다. 두 기는 붉은 벽돌로 되어 있다.

 


아누라다푸라에 여러 기의 불탑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 된 것은 루완웰리세이야 불탑이다. 두투게무누왕이 자신의 통치기간인 기원전 137년에서 119년 사이에 건립한 것이다. 무려 이천년전에 이렇게 거대한 탑이 건립되었다.

스리랑카 불자들은 아누라다푸라에서 두 곳을 가장 신성시하는 것 같다. 한곳은 보리수가 있는 스리마하보디 사원이고, 또 한곳은 스리랑카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루완웰리세이야 불탑이다.

 


루완웰리세이야가 스리랑카 불자들의 신앙의 고향으로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오래된 탑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불사리가 안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2쿼트 또는 1도나의 부처님 유물이 안치되어 있어 부처님의 유물 중 가장 큰 컬렉션이라고 한다.

 


루완웰리세이야에는 평일임에도 흰옷 입은 스리랑카 순례자들이 많았다. 이는 바로 옆에 있는 미리사베티야와는 대조적이다. 미리사베티야에서는 스리랑카 불자들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공양단에 꽃공양도 몇 개 되지 않았다.

 


비가 개인지 몇 분 되지 않았다. 불탑에 주변에는 물기가 있었다. 맨발로 그 너른 불탑 주변을 돌아 보았다. 가장 먼저 꽃공양을 먼저 올렸다. 불상이 있는 곳이라면 예외없이 꽃공양이 올려져 있다.

공양단에는 반드시 꽃공양만 하는 것은 아니다. 도네이션박스라 하여 우리나라로 말하면 불전함도 있었다. 그런데 속이 투명했다. 밖에서도 돈이 보이는 것이다. 지폐도 있고 동전도 있다.

 


도네이셔 박스를 보았다. 10루피나 20루피가 대부분이다. 꽃 값이 100루피에서 200루피를 하니 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 꽃 살 돈이 없으면 돈으로 보시하는 것 같다. 돈이 없으면 보시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루완웰리세이야,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 꼭 이 자리에 서고 싶었다. 그 때가 언제였던가? 블로그를 시작하고 나서 몇 년 되었을 때 악까까소 스님의 스리랑카 순례기를 접했다. 스님이 2008년 웨삭 때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글과 사진을 남긴 것이다. 그때 루완웰리세이야를 보았다.

반원형의 흰 불탑을 보았을 때 경이로웠다. “어떻게 저렇게 큰 대탑을 세울 수 있었을까?”라며 의문을 가졌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자료 검색을 해보니 옛날에는 더 높았다는 것이다.

불탑이 세워졌을 때 높이는 55미터 가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증축이 되어서 높이가 107미터에 이르렀다. 이집트 피라미드에 버금가는 높이인 것이다.

 


무엇이든지 영원한 것은 없다. 천년 이상 번영했었던 아누라다푸라도 이민족의 침입에 의해서 폐허가 되었다. 폐허가 되어서 밀림속에 방치 되었다. 그러다가 1800년대 초에 영국인에 의해서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밀림속의 루완웰리세이야의 모습은 어땠을까?

위키피디아를 보면 루완웰리세이야를 발견했을 때 사진이 있다.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니다.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진을 보면 형태만 남아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 파괴된 불상과 건물 잔해가 흩어져 있다.

루완웰리세이야는 천년 이상 번영했다. 아누라다푸라에서도 마하비하라 구역에 있었다. 마하비하라는 오늘날 스리랑카 불교의 종가집이라고 볼 수 있다. 마하비하라는 오늘날 테라와다불교의 종가집이고 더 나아가 세계불교의 종가집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하비하라는 한국불자들에게도 낯익다. 왜 그런가? 대사(大寺)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큰절이라는 뜻이다. 마하비하라는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될 때부터 중심지였고 또한 큰절이었다.

아누라다푸라 신성도시에는 크게 세 구역이 있다. 마하비하라 구역, 아바야기리 구역, 제따와나 구역을 말한다. 이 중에서 마하비하라와 아바야기리는 경쟁관계였다. 왕실의 영향에 따라 발전되거나 퇴보 되었다.

현재 스리랑카 불교는 마하비하라 불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세기 중세시대에 마하비하라파는 아바야기리파를 몰아내고 주도권을 확보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두 파는 이렇게 주도권 다툼을 했을까?

마하비하라와 아바야기리는 모두 테라와다 불교이다. 후대 사람들은 전자를 소승상좌불교라고 칭하고, 후자를 대승상좌불교라고 칭했다. 전자는 보수적이었고 후자는 개방적이었다. 전자는 전통을 고수하고자 했고, 후자는 인도대륙의 새로운 사조, 즉 대승불교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현재 스리랑카불교는 테라와다불교 종주국의 위치에 있다. 3차 결집된 공인된 불교가 스리랑카를 통해서 전세계로 뻗어 나갔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로마나이즈화된 빠알리 삼장이 전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스리랑카 불교는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매일 빠알리경전을 접한다. 또한 청정도론을 종종 열어본다. 스리랑카에서 이와 같은 경장과 논장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 옛날 스리랑카 스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마하비하라 구역의 중심지 루완웰리세이야에 섰다. 5세기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도 저 거대한 불탑을 바로 보았을까? 불탑은 어디서나 보이는 랜드마크 역할을 했기 때문에 보았을 것이다. 그것도 아침저녁으로 보았을 것이다.

5세기에 불탑은 지금보다 더 높았을지 모른다. 최대 높이가 107미터까지 되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붓다고사는 대탑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 불탑을 부처님 보듯 모셨을 것이다. 왜 그런가? 불탑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완웰리세이야는 스리랑카 최대의 사리탑이기도 한다.

불자들은 무불상시대에 부처님을 상징을 숭배했다. 보리수와 사리탑이 대표적이다. 불상의 시대에도 스리랑카에서는 보리수와 불탑에 대하여 부처님 보듯 하는 것 같다.

니까야를 보면 불탑 숭배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다. 부처님뿐만 아니라 연각승, 그리고 부처님 제자들의 사리탑을 만들어 불공 드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불자들은 기도가 아니라 불공드려야 한다. 이는 불공드려서 공덕을 쌓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과보가 기대될까? 이는 법구경에 있는“아유 반노 수캉 발랑 (āyu vaṇṇo sukha bala)”(Dhp.109)라는 장로의 축원으로 알 수 있다. 이 말은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기를!”라고 해석된다.

불자들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위를 기원한다. 그 대표적인 문구가 바로 “아유 반노 수캉 발랑(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기를!)”인 것이다. 이것 이상 좋은 축원문은 없는 것 같다.

경전에서는 불공의 공덕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했을까? 이는 “청정한 믿음을 일으켜서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세계에 태어난다.”(D16.113)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보시하고 지계하는 청정한 삶을 살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5세기 붓다고사가 섰던 자리에 서 있었다. 붓다고사는 이곳 마하비하라에서 어떤일을 했을까? 그것은 대륙의 새로운 사조로부터 공인된 불교를 지켜내는 일이었다. 가르침이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청정도론 해제를 보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청정도론은 5세기에 붓다고사가 저술했다. 청정도론은 오부니까야의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이다. 오늘날 남방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부동의 준거틀이 되고 있다. 그런데 붓다고사는 청정도론을 저술하고 이어서 각 니까야의 주석을 했다는 사실이다.

붓다고사는 인도사람이다. 5세기 당시에는 인도에서도 테라와도 불교가 있었다.스리랑카 승가에서 삼장법사로 알려져 있는 붓다고사를 초대한 것이다. 이는 싱할리어로 기록되어 있는 삼장을 빠알리로 환원역하기 위해서 초대된 것이다.

스리랑카 마하비하라는 순탄치 않았다. 박해를 받아 위기를 겪었을 때도 있었다. 이는 경쟁상대인 아바야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하비하라 승가에서는 아바야기리가 득세하자 위기를 느꼈다. 그것은 정통불교를 지켜내야한다는 사명감에서 산스크리트불교에 대항하여 빠알리불교를 부흥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제4차 결집으로 이루어진 싱할라문자로 기록된 삼장을 빠알리어로 다시 복원하는 것이었다.

스리랑카에서 4차 결집은 기원전에 있었다. 붓다고사가 출현할 때까지 400-500년 동안 인도대륙에서 사조는 변화무쌍했다. 이에 이교의 교설이 승가에 침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빠알리삼장이 싱할리어로 묶여 있다 보니 주석서가 업데이트 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마하비하라에서는 빠알리삼장에 정통한 삼장법사 붓다고사를 초대하여 주석서를 보완하고자 했다.

붓다고사가 스리랑카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청정도론을 쓴 것이었다. 기존 고주석과 무애해도 등을 참고하여 오늘날 남방 테라와다불교의 부동의 준거틀이라 불리우는 청정도론을 완성한 것이다.

청정도론은 가장 아끼는 논서이다. 청정도론을 보면 그 동안 궁금했던 것이 모두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히 청정도론을 읽은 불자와 읽지 않은 불자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청정도론이 계, 정, 혜 삼학의 결정판이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에 게송이 하나 있다. 이는 청정도론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청정도론은 이 짧은 한 개의 게송에 모두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는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Vism.1.1, S1.23)

 


이 게송은 상윳따니까야와도 병행한다. 게송을 보면 계행, 지혜, 선정이 나온다. 이는 계, 정, 혜 삼학에 대한 것이다. 청정도론은 계, 정, 혜 삼학에 대해서 청정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게송은 청정도론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송과도 같은 것이다.

스리랑카 역사서 쭐라방사를 보면 붓다고사 연대기가 수록되어 있다. 연대기에서는 붓다고사에 대하여 “그의 음성은 부처님처럼 심오했기 때문에 그를 붓다고싸라고 불렀다.”라고 소개했다. 연대기에서는 붓다고사가 주석서를 쓴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이는 인도에서 붓다고사를 스리랑카에 보낸 다음과 같은 장로의 말로 알 수 있다.


여기는 오직 성전만이 보존되어 있고, 여기에 주석서는 없고 스승들의 교설도 산실되어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싱할리어 주석서가 아직 존재하는 곳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쳤고 사리뿟따 등이 송출한 그대로 제3결집에서 전승되어 온 것을 마힌다 장로가 주석의 방식을 잘 고려하여 싱할리어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곳으로 가서 그것을 배운후에 마가다어로 번역해라. 그것이 전세계에 이익을 가져 올 것이다.”


여기는 인도대륙을 말한다. 인도대륙에는 경장과 율장은 있었지만 주석서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빠알리니까야를 읽을 때 주석을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스리랑카에는 주석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는 붓다고사를 스리랑카로 보내서 성전을 주석하게 한 것이다. 참고로 붓다고사가 주석한 것은 다음과 같다.

 


디가니까야 주석서는 ‘Sumagalavilāsinī’라고 한다. 줄여서 ‘Smv’라고 한다. 맛지마니까야는 ‘Papañcasūdani’라고 하는데 ‘Pps’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붓다고사는 무려 13개의 주석서를 썼다. 물론 감수한 것도 있을 것이다.

붓다고사는 고주석서를 참고하여 새로운 주석을 했다. 이는 대륙의 변화무쌍한 새로운 사조로부터 정통불교를 지켜 내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전세계 독자들은 이런 과실을 따먹고 있다. 이는 “그것이 전세계에 이익을 가져 올 것이다.”라는 말로 예언한 것 같다.

붓다고사는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 마하비하라에서 머물렀다. 쭐라왐사에 따르면 “보리수 아래 부처님의 교학에 능통한 수행승을 초빙하여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라고 했다. 오늘날 스리마하보디 보리수에서 읽었을 것이다.

붓다고사는 어디서 머물렀을까? 쭐라왐사에 따르면“도서관에서 자유롭게 체류하면서 그는 싱할리 주석서를 근본어인 마가다어로 번역하고 그것으로 모든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에게 이익을 주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붓다고사는 마하비하라 도서관에 주로 있었다. 도서관에는 싱할리어로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패엽경이 있었을 것이다. 붓다고사는 한편으로 삼장을 듣고 또 한편으로는 주석서를 읽었을 것이다. 마침내 빠알리어로 삼장과 주석서를 완성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었다.

오늘날 전세계 불자들은 붓다고사가 남긴 유산을 향유하고 있다. 그런 붓다고사는 아누라다푸라 마하비하라 사원 구역에서 보리수를 보고 대탑도 보며 주석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 보리수와 대탑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붓다고사는 빠알리 성전을 배울 때 말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라는 말이다. 이는 다름아닌 사성제를 말한다. 고귀한 제자가 번뇌를 알고 번뇌의 발생을 알고 번뇌의 소멸을 알고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주석을 했을 것이다.

루완웰리세이야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탑돌이가 끝나자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런데 이날 저녁 루완웰리세이야의 환상적인 모습을 보았다. 오후 6시 넘어 스리마하보디 보리수를 참배하고 난 다음 루완웰리세이야를 지나쳤을 때 밤하늘에 빛나는 대탑을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날 저녁 게스트하우스에서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어서 페이스북에 올려 놓았다.


루완웰리세이야 다고바는 아누라다푸라에 우뚝 서 있다. 마치 도시의 랜드마크처럼 사방 어느 곳에서도 다 보인다. 고대도시 밀림 어느 곳에서도 찬연하게 빛나는 흰 다고바를 볼 수 있다. 운전기사 가미니는 뷰포인트를 알려 주었다. 차를 멈추고 찍으라고 했다.


야간에 수 많은 사진을 찍었다. 멀리 보이는 것은 줌으로 확대하면 좀더 선명해진다. 갈수록 좋은 뷰포인트가 나왔다. 그때 마다 가미니는 차를 멈추고 찍으라고 했다. 한번은 호수에 비친 다고바를 찍었다. 최후로는 다고바 정면에서 가까이 보이는 장면을 찍었다. 줌으로 확대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고바 자체가 커다랗게 들어 온 것이다.


흰색으로 빛나는 성스러운 루완웰리세이야 다고바를 가졌다. 만족한 사진을 얻자 뿌듯했다. 고생한 보람을 느끼는 듯 했다. 두고두고 간직할 작품을 건진 것 같았다. 신성한 고대도시 아누라다푸라가 이 한장의 사진에 다 들어 온 듯 했다.”



스리랑카의 반구형 불탑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아름답다. 어느 때 보아도 성스럽다. 제따와나 불탑에서 석양에 본 루완웰리세이야도 환상적이었다.

귀국해서 스리랑카 순례기를 쓰고 있다. 순례기 한편을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검색이 이루어진다. 관련된 책도 사서 보고 있다. 이렇게 순례기를 장문으로 쓰는 것은 그날의 감동을 글로서 표현하고자 함이다.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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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대자연의 장관을 보면 경이로움에 경탄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공구조물은 어떠할까? 높은 산에 올라가서 대도시의 마천루를 보면 경이롭기는 하지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왜 그런가? 도시의 거대한 구조물이 암덩어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암세포는 무한증식을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죽지도 않는다. 도시의 마천루를 보면 경이와 함께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러나 거대한 종교적 건축물을 보면 경이롭기도 하고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상베가(savega)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감동이다. 그래서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아누라다푸라,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백색의 거대한 다고바를 보면 고대도시에 와 있는 것 같다. 저녁 해질무렵 석양의 다고바는 장엄해 보인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을 때 찬연히 빛을 발하는 다고바는 신비스럽다. 나는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라고.

(인터넷)

 


2023-01-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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