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성지순례기21, 불교개혁을 이룬 위대한 군주 파라크라마바후, 폴론나루와 왕궁유적에서
어떻게 해야 여행기를 잘 쓸 수 있을까?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여행기는 써도 그만이고 안써도 그만이다. 그럼에도 흔적을 남기는 것은 의무감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폴론나루와에 대하여 써야 한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나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와 관련된 책도 읽어 보았지만 단편적이다. 가장 좋은 것은 인터넷에서 자료를 얻는 것이다.
폴론나루와를 키워드로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 결과 상당한 자료를 확보 했다. 무엇을 쓸 것인지에 대한 방향도 정해 졌다. 모두 4부작이 될 것 같다. 그것은 왕궁구역, 불치사가 있었던 사원구역, 거대한 다고바가 있는 사원 구역, 그리고 알 비하라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스리랑카 현지 시점은 2022년 12월 13일(화) 이른 오후시간이다. 햇살은 따사로웠다. 그러나 덥지는 않았다. 30도 이내의 쾌적한 날씨이다. 아누라다푸라에서 동남쪽으로 100키로 떨어진 거리에 있다. 차로는 두 시간가량 걸린다. 고속도로는 없다. 왕복 2차선 국도로 달린다.
폴론나루와는 스리랑카 고대도시 중의 하나이다. 스리랑카 중세시대 도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폴론나루와 왕국이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번영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려시대에 해당된다.
폴론나루와는 아누라다푸라와 함께 신성도시(The Sacred City)라고 한다. 고대도시는 광활한 대지에 자리잡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도시 전체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폴론나루와 입장료는 대체로 비싼편이다. 외국인에게는 25불 받는다. 아마 스리랑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입장료일 것이다. 가장 입장료가 비싼 곳은 시기리야이다. 시기리야 입장료는 30불이다.
입장료를 구입하면 폴론나루와 고대도시 전역을 볼 수 있다. 여기에 현지인 가이드까지 한사람 붙었다. 그는 툭툭을 가지고 있었다. 김형근 선생과 운전기사 가미니와 함께 세명이서 툭툭을 탔다.
툭툭의 앞좌석은 운전석이다. 앞좌석에는 운전기사 한사람만 탈 수 있다. 현지인 가이드가 운전했다. 뒷좌석은 본래 두 명 앉을 수 있다. 운전기사 가미니와 함께 타다 보니 세 명이 뒷좌석에 타게 되었다.
운전기사는 영어를 잘한다. 이곳에서 가이드를 오래 한 것 같다. 더구나 식견도 있는 것 같다. 능숙한 영어로 설명하지만 잘 알아 듣지 못한다. 그럼에도 천천히 알려 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툭툭운전기사겸 가이드는 세 구역을 차례로 갈 것이라고 했다. 가장 먼저 왕궁을 보고, 그 다음에는 불치사가 있었던 불교사원을 보고, 그 다음에는 기타 불교유적지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후기를 쓰고 있는 입장에서 본다면 맞는 것이다.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이동하여 차례로 구역별로 보는 것이다.
가이드는 가장 먼저 왕궁유적지로 인도했다. 두 개의 커다란 건물 뼈대만 있는 곳이다. 이곳에 대하여 왕이 살던 곳이라고 했다. 유적 내부에 들어가서는 “이곳이 왕의 침실이 있었던 곳입니다.”라며 각 방을 설명했다.
왕궁에서는 누가 살았을까? 현지에서는 단지 스리랑카 중세시대 왕이 살던 곳쯤으로 알았지만 후기를 쓰면서 검색해 보니 파라크라마바후 1세(재위 1153-1186) 왕이 지은 것이다. 궁전은 7층으로 되어 있고 1,000개의 방이 있었다고 한다.
7층 구조에 1000개의 방이 있었다면 큰 궁전이었을까? 유튜브를 검색하다 보니 하나의 미니어처를 볼 수 있었다. 7층의 누각으로 된 궁전이다. 부속 건물까지 합한다면 1000개의 방이 가능했을 것이다.
(인터넷)
폴론나루와 유적을 보면 가장 자주 접하는 왕의 이름이 있다. 그것은 파라크라마바후이다. 유적 안내 동판에는 어김없이 이 왕의 이름이 나온다. 폴로나루와 시대는 사실상 파라크라마바후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라크라마바후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다. 영문판 위키피디아를 보니 여러 항목에 걸쳐서 장문으로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어쩌면 스리랑카 중세시대 영웅에 해당될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레이트(The Grate)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다. 대왕이라는 것이다.
파라크라마바후는 33년 왕으로 살았다. 이 기간 동안에 폴론나루와는 전성기를 맞이 했다. 폴론나루와에 있는 유적 대부분은 이 왕이 재위했을 때 건설되었다. 그래서 위대한 왕이라고 칭한다.
여행기를 쓰면서 가장 힘든 것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 특히 역사를 알아야 유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역사를 모르고 유적만 본다면 붉은 벽돌만 보고 온 것이 된다.
폴론나루와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 거의 열흘 자료수집에만 매달렸다. 영문자료가 볼만한 하다. 한글로 된 여행기도 있으나 알차지 못하다. 특히 영문판 위키피디아를 보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
요즘은 인터넷 시대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글에서는 번역을 제공하고 있다. 이른바 구글번역을 말한다. 나온지 오래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스리랑카 여행기를 작성하면서 구글번역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영문을 번역기에 놓고 실행하면 불과 1초만에 번역되어 나온다. 그것도 신뢰할 만한 번역이다.
영문판 위키피디아를 이용하여 파라크라마바후 일대기를 읽어 보았다. 스리랑카의 위대한 영웅이라 할만하다. 그동안 스리랑카는 인도 촐라족으로부터 침략을 당해서 고통을 겪었는데 파라크라마바후 치세 기간 동안에는 오히려 인도 대륙에 영향력을 미쳤다. 군대를 파견했기 때문이다.
파라크라마바후 일대기를 보면 놀라운 일이 많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미얀마를 원정한 것이다. 어떻게 인도양을 건너서 저 멀리 있는 미얀마까지 원정군을 보낼 수 있었을까?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국가와는 우호관계에 있었다. 미얀마에서는 스리랑카 테라와다 불교를 받아 들였다. 그런데 스리랑카에서 계맥이 단절되자 역으로 미얀마로부터 계맥을 전수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고대시대부터 스리랑카와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와 교류가 있었다.
파라크라마바후가 미얀마에 원정군을 보낸 이유가 있었다. 미얀마에서 왕이 바뀌고 난 다음에 스리랑카 사절을 해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스리랑카 사절단을 투옥하고 고문했으며 돈, 코끼리, 선박을 포함한 모든 소유물을 압수했습니다.”(위키백과)라고 했다.
파라크라마바후는 자신의 사절단이 해침을 받자 해군을 파견했다.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이에 대하여 “1년 분량의 곡물, 특별히 개조된 화살, 스리랑카의 무시무시한 전투 코끼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리랑카에서 대양을 가로 질러 군대를 파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욱 더 놀라운 일은 코끼리 부대까지 파견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미얀마 바고 강 유역에 있는 도시를 점령했다. 그리고 관계악화의 원인을 제공한 미얀마 나라투 왕(재위 1167–1171)을 암살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12세기에 대양을 가로질러 원정군을 파견했다는 것이 놀랍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는 몬순 계절풍으로 대양 항해가 가능했던 것이다. 빠르면 2주만에 동남아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한다.
스리랑카 파라크라마바후 왕은 해군을 파견하여 미얀마 나라투 왕을 폐위 시켰다. 이와 같은 스리랑카의 침략은 미얀마에서도 알려진 사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나라투 미얀마 왕에 대한 징벌적 공격이었다는 사실이다.
파라크라마바후 왕의 업적은 오늘날 폴론나루와 유적에서 볼 수 있다. 각 유적지 동판 설명문에는 왕의 이름이 꼭 들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은 또 하나 기념비적인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스리랑카불교 정화에 대한 것이다.
파라크라마바후 왕은 아누라다푸라를 복원했다. 폐허가 되고 정글로 사라진 투파라마야, 미힌탈레, 루완웰리세이야 불탑 등을 복원한 것이다. 당연히 세 개의 사원 마하 비하라(大寺)와 아바야기리 비하라(無畏山寺), 닥키나 비하라도 복원되었을 것이다.
파라크라마바후 왕 시대 때는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지 천년이 넘었다. 거의 1500년 된 시점에 이르렀을 때 스리랑카 불교는 타락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위키백과에서는 “승가의 대부분은 비구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많은 경우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우파사카처럼 행동하는 등 수년에 걸쳐 타락했습니다.”라고 설명해 놓았다.
스리랑카 승가가 타락한 것은 대륙의 사조를 무분별하게 받아 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승불교에 이어 금강승 불교까지 받아 들이게 된 것이다. 금강승 중에서도 좌도밀교를 받아 들였다면 성적으로 타락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파라크라마바후 왕은 까쌋빠 대장로를 통해 불교 개혁을 추진 시켰다. 까쌋빠 대장로는 삼장에 정통했다. 대장로는 특히 율장에 밝았다. 마치 인도 마우리아 왕조 아소까 대왕이 목갈리뿟따띳싸 장로를 시켜서 불교를 개혁한 것과 유사해 보인다.
아소까 대왕 당시 이교도들이 불교 상가에 스며 들었다. 그들은 불교도가 아니면서 불교도인 것처럼 살았다. 더구나 승단의 공식적인 행사인 우뽀사타(포살)와 빠와라나(자자) 행사에 슬며시 끼여 들었다. 이렇게 되자 청정한 수행승들은 더 이상 포살을 할 수 없었다.
포살과 자자는 청정한 수행승들이 하는 것이다. 한사람이라도 청정하지 않은 자가 앉아 있다면 행사를 할 수 없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포살의 경’에 따르면, “여래가 부정한 모임에서 포살을 행할 수 없고, 의무계율을 설할 수 없다.”(A8.20)라고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포살일에 청정하지 못한 수행승이 앉아 있자 더 이상 포살을 행하지 않았다. 이는 경에 따르면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 체하고 청정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청정한 삶을 사는 체”(A8.20)하는 수행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갈라나 존자는 청정하지 못한 수행승을 끌어 내었다. 승가가 청정해지자 포살을 행했다. 이처럼 포살은 청정한 수행승들이 모여서 계목을 외우는 것이다. 자자를 통해서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럼에도 이교도가 슬며시 끼여 들었을 때 청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살과 자자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스리랑카 불교를 중흥시킨 파라크라마바후 왕을 보면 아소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승단을 정화 했기 때문이다. 정통교단으로 인정받고 있는 마하비하라 하나만 남기고 청정하지 못한 교단을 폐쇄 시켰다.
청정하지 못한 교단 중에는 아바야기리 비하라가 있었다. 아바야기기리 비하라는 베툴라바다(Vetullavada)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베툴라바다 전통은 무엇인가?
베툴라바다는 대승불교의 방등부경전을 신봉하는 그룹을 말한다. 이 교리에 대한 주석서를 보면 “긴 윤회를 함께 태어나서 수행하리라고 서원이 같으면 여자와 함께 음행해도 된다.”(베뚤리야삐따까 까타밧투의 주석서, KPTS 청정도론 해제 17쪽)라는 내용이 있다. 바로 이런 점이 “비구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많은 경우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집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정점에 아바야기리 비하라(無畏山寺)가 있었던 것이다.
1165년 폴론나루와에서 승가의 개혁을 위한 테라와다 평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파라크라마바후 왕의 요청을 받은 까쌋빠 대장로는 아바야기리 비하라 등 부패한 교단을 폐쇄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저항이 있었다. 스리랑카 역사서에 따르면 대부분 승려들은 개혁에 참여하지 않고 해외로 이주했다고 한다. 또한 재가의 삶으로 돌아 갔다고 한다.
스리랑카에서 승단개혁이 있었다. 그 결과 마하비하라 단일 교단이 성립되었다. 이를 오늘날 테라와다 불교라고 말한다. 장로들의 불교라는 뜻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보수적인 교단을 말한다. 아소까 대왕 당시에 3차 결집된 빠알리 삼장을 토대로 한다.
오늘날 스리랑카에서는 대승불교나 금강승 불교를 볼 수 없다. 12세기 파라크라마바후 왕 당시에 불교 정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불교계 신문 기자는 이런 사실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녀의 유튜브 방송을 보면 “아바야기리 비하라를 쳐 낼 것이 아니라 함께 갔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라는 취지로 말했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방등경 교리대로 “긴 윤회를 함께 태어나서 수행하리라고 서원이 같으면 여자와 함께 음행해도 된다.”라는 가르침에 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오늘날 스리랑카 불교는 소수종교로 전락했을 것이다.
오늘날 파라크라마바후는 스리랑카에서 위대한 군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33년 재위기간 중에 관개 시스템, 군대 재편성, 불교 관습 개혁, 예술 장려, 남인도와 버마에서 군사 작전 수행 등의 업적을 남겼다. 이와 같은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재정의 지출이 막대했을 것이다.
어느 나라이든지 위대한 사람이 있다. 스리랑카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군주는 파라크라마바후였다. 그래서일까 이후 4세기 동안 7명의 군주가 파라크라마바후라는 이름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12세기에 실존했던 위대한 군주의 이름은 파라크라마바후 1세로 불렸을 것이다.
폴론나루와 왕국은 오래 가지 못했다. 1070년부터 1232년까지 162년동안 존속했다. 이후 인도 타밀족의 침략으로 몰락했다. 그리고 정글속으로 사라졌다. 폴론나루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03년의 일이다.
스리랑카에서 파라크라마바후 왕이 없었다면 오늘날 스리랑카 불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가르침이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정화가 있었다. 마치 아소까 대왕이 그랬던 것처럼 스리랑카 불교를 정화해서 오늘날 세계불교를 리드하는 위치에 서게 만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은 종교이다. 종교는 본래 보수 회귀성이 있다. 본래 가르침에서 멀어질수록 원음에 충실하고자 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스리랑카에서는 12세기에 불교개혁이 이루어져서 보수로 회귀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현재 한국불교는 기로에 서 있다. 상층부의 타락이 심하다. 상왕이라 불리우는 전총무원장은 머리를 기르고 수염도 길렀다. 도박, 은처 등 갖가지 추문이 있다. 그는 심지어 룸싸롱 출입도 한 바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스님들은 침묵하고 있다. 한국불교에서 정화는 언제나 가능할까?
한국불교가 중흥하려면 부패한 승려들을 추방하고 배제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 원음에 충실해야 한다. 부처님 초기 가르침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마치 스리랑카에서 과감하게 불교개혁 했듯이.
2023-02-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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