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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이 나에게 임하기를!

담마다사 이병욱 2023. 7. 9. 10:00

오늘도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이 나에게 임하기를!
 
 
산떼나  소마  위디나- 지따와- 무닌도  땅  떼자사-  바와뚜  떼  자야  망갈라-니” 지금 시각 아침 6시 57, 아지트에서는 자야망갈라가타가 울려 퍼진다. 세계적인 불교음악가 이미우이(Imee Ooi, 黃慧音)가 부른 것이다.
 
이미우이 음악은 언제 들어도 아름답다. 가만히 듣다 보면 잔잔한 기쁨이 일어난다. 기쁨은 환희가 된다. 특히 자야망갈라가타(吉祥勝利偈)를 들으면 마음이 고양된다. 그것은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된 빠알리어는 어떤 내용일까? 이는 “성자의 제왕 고요함과 부드러움으로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라는 내용이다. 자야망갈라가타는 테라와다불교권에서 예불문 중의 하나이자 수호경이다.
 
음악을 들을 때는 볼륨을 크게 해 놓고 들어야 한다. 그래야 음악이 온 몸에 와 닿는 것 같다. 빠알리어로 창송되는 자야망갈라가타도 그렇다.
 
아침에 이미우이음악을 들으면 가슴에 와 닿는다. 절절한 마음이 된다. 모두 빠알리어로 외운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음악에 완전히 몰입 되었을 때 세상 살 맛을 느낀다. 이런 음악을 들으며 임종을 맞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우이 음악은
 
이미우이 음악은 명상음악으로도 알려져 있다. 자애송(The chant of metta)의 경우 자애명상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우이 음악이 말기암 환자에게 치료용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십년도 넘은 것 같다. 아마 그때가 2000년대 말이었던 것 같다. 능인선원에서 임시체험을 담당하던 어느 법사가 이미우이 음악을 보내 달라고 했다. 내가 만든 선물용 씨디가 그 사람 손에까지 들어 간 것이다.
 
임사체험 법사는 왜 이미우이 음악씨디를 요구했을까? 그것은 말기암 환자들에게 이미우이 음악을 틀어 주었을 때 반응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씨디를 갖기 원했다는 것이다. 하루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지원해 주었다.
 
이미우이음악 씨디를 늘 가지고 다닌다.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준다. 페이스북친구들에게도 선물을 주었다. 내가 올린 글에 ‘좋아요’ 등을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 주는 등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우편으로 보내 주었다. 백명 이상 된다.
 
이미우이 음악과 함께 산지 16년되었다. 2005년 블로그를 처음 만든 이래 자연스럽게 이미우이 음악을 알게 되었다. 이미우이 음악은 신천지나 다름 없었다.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것 같았다.
 
이미우이음악을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것은 2007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라따나숫따와 자야망갈라가타를 알고 나서부터 매료 되었다. 마치 천상의 음악을 듣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용이다. 그것은 초기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미우이 음악이 있다.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것이다. 이미우이음악에 매료 되면서 이미우이음악은 물론 갖가지 불교음악을 다운 받았다. 우리나라 사이트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중국 불교사이트에서 다운 받았다. 2000년대 말상황에서는 가능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음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막아 놓았다.
 
나의 2000년대는 어땠는가? 한마디로 실의와 좌절의 나날이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막막하고 먹먹했다. 이럴 때 이미우이음악을 접했다.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다.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 같았다. 특히 라따나숫따(寶石經)와 자야망갈라가타(吉祥勝利偈)가 그랬다.
 
건강검진을 받지 않는다고 하여
 
오늘은 일요일 아침이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일터로 향했다. 눈만 뜨면, 밥만 먹으면 집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다. 갈 곳이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갈 데가 없다면 산이나 도서관을 향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일터가 있어서 매일 사무실로 향한다.
 

 
오늘 비올 확률은 90%이다. 새로 깔아 놓은 날씨 앱으로 알 수 있다. 그 동안 날씨를 무시했었다. 그러나 최근 걸어서 아지트로 가는 날이 많게 됨에 따라 날씨에 민감해졌다. 더구나 요즘 장마철 아닌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마트안양점’을 돌아 경수대로를 건넌 후 ‘꿈에 그린 아파트’를 가로질러 안양천에 이르렀다. 이때가 오전 6시가 약간 넘었다. 징검다리를 건너서 메가트리아를 가로질러 오피스텔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생각이 일어난다. 좋은 생각이다. 글쓰기 소재가 된다.
 

 
어제는 극과 극을 보냈다. 아침에 목이 칼칼하고 오한이 나는 등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 타이레놀로 잡히지 않았다. 병원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에 가능하면 가지 않으려 한다. 건강검진을 받지 않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일인사업자로 사는 17년동안 건강 검진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다. 아니 건강검진을 피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행위로 인하여 비난을 받았다. 이빨이 아파서 치과에 가는 것과 감기에 걸려서 내과나 이비인후과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 일체 병원에 가지 않았다.
 
나의 몸에 어떤 병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정밀검사하면 여러 개 걸릴 것 같다. 그렇다고 의사의 말대로,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 할까? 유튜브에서 한림대 성심대 교수 김현아 선생의 강의를 듣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BTN이나 시니어TV를 보면 김현아 선생의 죽음학 강연을 접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좋은 말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현대의료의 죽음 비즈니스에 속지말자’라는 말이 가장 와 닿는다.
 
사람들은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는다. 전세계적으로 의료시스템이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정기검진도 빠지지 않고 받는다는 사실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받는다. 마치 몸을 무균질의 청정한 장소로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 건강검진을 받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이로 인하여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비난도 많이 받았다. 요즘 유튜브시대이다. 병원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이유에 대한 것을 BTN에서 보았다. 김현아 선생의 강연을 듣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 그러나 아프지 않음에도 건강검진을 해서 조그만 암을 찾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김현아 선생은 무시해도 된다고 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수많은 암을 지니고 살고 있는데 사는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암이라 하여 반드시 떼어내고 소멸시켜야 할까? 사람은 항상성이 있다. 아프면 계속 아픈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본래 위치로 돌아 가려는 속성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세월이 지나면 복원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해야 잘 죽는 것일까?
 
오늘 아침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이비인후과에서 약을 타와서 먹자 즉각 반응이 나타났다.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목의 칼칼함과 오한이 싹 사라진 것이다. 이런 약 정도는 타먹는다. 그렇다고 정기건강검진하여 암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수술을 하는 행위는 하려 하지 않는다.
 
어제 하루 종일 일터에서 휴식을 취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가만 앉아 있었다. 안락 의자를 뒤로 제끼고 편안한 마음으로 유튜브를 보았다. 주로 김현아 선생의 죽음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김현아 선생 강연은 들을 만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또한 존엄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듣다 보니 연명치료는 피해야 할 것 같다. 응급실에 실려와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죽음을 맞는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잘 죽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집에서 죽는 것이다. 이는 말기암 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발적인 죽음일 수도 있다. 김현아 선생이 강연 말미에 소개한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노혁명가의 죽음)
 
위엄있는 삶도 어렵지만 사람이 한명(限命)을 알고
자신의 죽음을 위엄있게 맞기가 쉽지 않거늘
그러나 선생은 그렇게 했다

더는 목숨에 연연하지 않겠다며

일체의 병원 치료와 주사를 거부하고
꼬박 스무하루를 굶은 뒤
소년처럼 머리를 면도로 깨끗이 밀고

간호사를 불러 관장하고 중산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남들이 다 잠자는 새벽 두시 반에
조용히 식구들을 깨워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평소의 모습처럼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얘기를 하시다가
그만 깜빡 저세상으로 가시었다

입가엔 행복했던 날 손녀와 함께 짓던 미소 자국이

역력했으며 눈가에선 마지막 매섭고
밝은 빛이 빛났다 향년 85세
 
(어느 노혁명가의 죽음, 이시형)
 

 
시의 작자는 이시형으로 되어 있다. 정신과전문의 이시형선생이 아니라 시인 이시형이 지은 것이다. 여기서 노혁명가는 누구인가? 김학철 독립운동가이다.
 
김학철 선생을 알고 있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다. 아마 90년대였던 것 같다. 그때 EBS에서 본 것이다. 연변에서 사는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다. 검색해 보니 1916년생이다. 1990년대 북쪽 혁명가를 TV로 볼 수 있었다.
 
김현아 선생은 왜 죽음강연에서 왜 이 시를 소개했을까? 아마 그것은 연명치료의 무의미함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집에서 자연사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곡기를 끊고 죽는 것에 대하여
 
이 시에서 주목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꼬박 스무하루를 굶은 뒤”라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굶어 죽는 것이다. 자살과는 다른 것이다. 자신의 삶이 다 끝났을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일종의 안락사와 같은 것이다.
 
김현아 선생은 죽음강연에서 안락사를 말했다. 스위스 안락사에 대한 설명은 놀라웠다.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안락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죽고 싶다면 안락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효과적인 안락사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곡기를 끊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죽음과 관련하여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특히 선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해학적이기도 하다. 죽음을 예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 자꾸 미루는 것이다. 그러다가 좌탈입망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정말 자신의 죽음을 예고 하고 그 날에 죽을 수 있을까?
 
언젠가 불교방송에서 들은 것이 있다. 성본스님에 따르면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예고 하고 그 날에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있다면 굶어 죽는 것이 있다고 했다. 다음달에 죽고자 한다면 곡기를 끊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본스님은 스스로 굶어 죽는 것에 대하여 일종의 안락사라고 했다.
 
김현아 선생은 BTN 죽음강연에서 굶어 죽는 안락사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강연 말미에 행복한 죽음과 관련하여 좋은 시가 있다고 하여 소개 했다. 그리고 시를 낭송하고 강연을 마쳤다. 굶어 죽는 안락사가 최상의 죽음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죽는 순간까지 사띠하면
 
수행자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수행자는 어떻게 죽어야 최상의 죽음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분명하다. 임종의 그 순간까지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테라가타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라한의 인생관이 있다. 아라한은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죽음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54)라고 했다.
 
아라한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자이다. 살고자 하는 욕망도 죽고자 하는 욕망도 없다. 단지 때를 기다린다. 월급생활자가 월급날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무아의 성자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자이다.
 
무아의 성자에게 죽음이라는 말은 단지 명칭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오온의 죽음을 맞는 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5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죽는 순간까지 사띠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임종순간까지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렇게 임종 순간까지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라고 말한다.
 
테라와다불교권에서 최상의 축복은 아라한이 되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에 호흡의 생멸, 통증의 생멸 등 사띠를 유지한다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의 순간에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어 내는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samasisi)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의 최상의 희망은 어쩌면 사마시시일지 모른다. 죽는 순간까지 알아차림을 유지하여 죽음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이다. 그런데 경전에는 이런 예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디까의 경(S4.23)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 제자중에 고디까 존자가 있었다. 고디까는 열심히 수행했다. 그러나 바라던 목표에는 이르지 못했다.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했다. 무려 여섯 번 거듭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고디까는 “이제 나는 여섯 번이나 일시적인 마음에 의한 해탈에서 물러났다. 나는 차라리 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어떨까?”(S4.23)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가장 청정한 상태에 머물렀을 때 자결하고자 한 것이다.
 
고디까는 자결했다. 여섯 번이나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가 일곱 번째로 일시적인 심해탈 상태가 되었을 때 몸에 칼을 댄 것이다. 이런 고디까의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느 사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살은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제자들의 자살을 허용했다. 다만 중병에 걸렸을 때 자살을 허용한 것이다. 이는 박깔리경(S22.87)과 찬나경(S35.87)을 보면 알 수 있다.
 
박깔리 존자는 중병에 걸렸다. 그러나 마음은 청정한 상태였다. 박깔리는 고통스러워 자살하고자 했다. 이런 소식을 접하자 부처님은 “박깔리여 두려워 말라, 그대의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S22.87)라며 전하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이 청정한 자, 마음이 해탈된 자가 중병에 걸려 고통스러울 때 자살을 허용한 것이다.
 
고디까는 완전한 해탈을 이루지 못했다. 일시적 해탈 상태에서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가 일곱 번째로 일시적 해탈을 이루자 몸에 칼을 댔다. 그렇다면 고디까는 어느 세상에 가게 되었을까?
 
흔히 자살하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음이 청정한 자의 자살은 다르다. 고디까 존자의 자살이 대표적인 예이다. 비록 일시적이긴 하지만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자살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고디까가 어느 세상에 태어났는지 무척 궁금했던 것 같다. 이에 부처님은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이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S4.23)라고 말해 주었다.
 
임종의 순간에 의식이 있으면, 그 의식은 다음 생의 첫 의식이 된다. 이를 재생연결식이라고 한다. 십이연기의 고리에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라한의 죽음은 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의식이 일어날 만한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임종순간에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이다. 이를 사마시시라고 한다. 주석에서는 찬나의 자결에 대하여  “그는 자결했다. 그는 숨통을 끊었다. 그러나 그 순간 두려움이 덮쳤고 운명을 알렸다. 그는 자신이 범부상태인 것을 인식하고 재빨리 통찰하여 모든 형성된 것을 극복하고 거룩한 경지에 들어 이승과 갈애를 멸한 자(samasīsīn)로서 열반에 들었다.”(Srp.II.373)라고 설명되어 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 김현아 선생의 죽음강연을 들어 보면 위엄 있게 죽어야 한다. 독립운동가 김학철 선생은 위엄 있게 죽었다. 21일 동안 곡기를 끊고 굶어 죽은 것이다. 일종의 안락사이다. 이럴 때 자신의 죽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 보았을 것이다. 임종 순간까지 사띠를 유지하면 최상의 죽음이 될 것이다.
 
오늘도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이 항상 나에게 임하기를!
 
오늘 아침 걸어서 일터에 왔다. 오늘 아침 식사는 밤호박으로 했다. 해남 친구가 보내 준 것이다. 친구의 처에 따르면 밤호박을 홍보하는 장문의 글을 보고 주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안동에 사는 사람인데 블로그를 10년 째 보는 사람이라고 한다.
 

 
밤호박 홍보글을 블로그와 페이스북, 그리고 이곳저곳 카톡방과 밴드에 올렸다. 그러나 주문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전화 한통이면 명품 밤호박을 접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같은 학번 같은 학과 동기 카톡방 친구들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극히 일부 친구들만이 주문할 뿐 이제까지 한번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밤호박을 커피와 함께 먹었다. 커피는 절구질한 절구커피이다. 여기에 꿀을 탔다. 그 결과 꿀절구커피가 되었다. 파근파근한 밤호박에 꿀절구커피는 최상의 맛이 되었다. 이미우이 음악과 함께 먹었다. 일터에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의 노래가 가득 울려 퍼졌다. 오늘도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이 항상 나에게 임하기를!
 
 
에따-삐  붓다  자야  망갈라  앗타  가-타-
요 와-짜꼬  디나디네  사라떼  마딴디-  
히뜨와-아네까  위위다-니  쭈빳다와-니
목캉 수캉 아디가메이야 나로 사빤뇨”
 
이 부처님의 승리의 행운을 나타내는
여덟 게송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면
하나 아닌 수많은 불행을 극복하고
슬기로운 자 해탈과 지복 얻을 것이 옵니다.”(자야망갈라가타 9번 유통분 게송)

 
 
2023-07-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