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스님, 현진스님의 마야사
이 보다 평화로울 수 없다. 도량은 잘 가꾸어져 있다. 비구니스님 도량인줄 알았다. 알고보니 글 쓰는 스님, 현진스님의 도량이다.
하늘은 맑고 푸르다. 하늘에는 조각구름이 떠 있다. 햇살은 강렬하다. 스마트폰에는 33도로 뜬다. 체감온도는 37도이다. 작열하는 햇살이지만 그늘만 들어 가면 살만하다. 마야사도 그렇다.
여행을 하면 꼭 절에 들른다. 그 옛날 실크로드를 여행하던 상인이 절에 가서 안녕을 바라는 것과 같다. 돈황에 가면 석굴을 조성한 상인 이름을 볼 수 있다.
국내 여행도 여행이다. 여행 도중에 지역에 있는 사찰을 반드시 방문한다. 청주에 있는 상당산성자연휴양림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귀가길에 마야사를 들렀다.
마야사는 청주에 있다. 전통사찰은 아니다. 현진스님의 원력과 신도들의 정성으로 2012년 창건되었다. 이제 11년 된 새내기절이다. 그럼에도 인터넷에는 꽤 잘 알려져 있다. 절이 공원처럼, 절이 예술작품처럼 잘 꾸며져 있다.
현진스님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다만 블로그 초창기 때 현진스님의 글을 봤다. 그때 당시 교계신문에 연재된 '스님이야기'는 흥미를 끌게 하기에 충분했다.
불자들은 스님이야기를 좋아한다. 세상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 가는 스님이야기는 군대이야기만큼 재미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출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스님은 왜 출가하셨어요?"라며 묻는 것이다.
현진스님의 스님이야기는 해인사 승가대학 이야기가 많다. 해병대출신 수좌가 성철스님과 법거량 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수좌가 “삼삼은구(3X3=9)”라며 일구를 날렸다. 그러자 성철스님은 “구구팔십일(9X9=81)이다. 이놈아!”라며 받았다. 본래 선문답은 답이 없는 이다. 그날 이후 수좌는 짐 싸서 나갔다고 한다.
현진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은 많다. 글 쓰는 스님, 현진스님은 인터넷을 통해서 알고 있다. 오늘에야 스님의 도량을 방문하게 되었다.
도량은 카페도 겸하고 있다. 마야카페가 그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 같다. 찻집이 아니라 카페인 것이다. 절에 와서 대웅전에 삼배만 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커피 한잔 마실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마야사에는 갖가지 볼거리가 있다. 그 에서도 기억남을 만한 것은 삼소불(三笑佛)이다. 눈 가리고, 귀 막고, 입 다문 모양의 웃는 부처님이다. 설명문에는 “눈 닫고, 귀 닫고, 입 닫으라. 그리하면 고요해지고 평화로울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삼소불 문구는 잘 알려져 있다. 일본 동조궁 원숭이 형상도 삼소불 문구와 유사하다. 강화도 전등사에도 이와 유사한 형상이 있다. 오리지널은 어떤 것일까?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생각건대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 하기 때문이다.”(Thag.501)
마하 깟짜야나 장로가 읊은 게송이다. 삼소불 게송과 유사하다. 다만 두 가지가 빠져 있다. 바보같고 허약한 자와 같아야 된다는 것이 빠진 것이다.
테라가타 501번 게송은 수행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위빠사나 선원에서도 응용되고 있다. 미얀마 양곤 외곽에 있는 담마마마까 국제선원 법요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대의 눈이 밝을지라도 장님처럼 행동하라.
그대의 귀가 밝을지라도 귀머거리처럼 행동하라.
그대의 말이 웅변일지라도 벙어리처럼 행동하라.
그대의 몸이 건강할지라도 환자와 같이 행동하라.
잠자리에 들어서도 뒤척이지 말고 송장처럼 가만히 관찰하면서 잠들어라.”
(담마마마까 법요집, 56쪽)
선원에서는 묵언해야 한다. 사야도는 “도반들과 선원에 왔지만 항상 홀로 있는 것처럼 지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적멸을 성취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눈과 귀와 입을 막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두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바보처럼 사는 것이다. 그리고 아픈 환자처럼 사는 것이다.
왜 바보처럼 살라고 했을까? 그것은 자만을 경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알면 현명한 자라고 했다. 반대로 어리석은 자가 현명한 자인 줄 알면 더욱더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 내가 있다는 자만을 내려 놓았을 때 바보처럼 사는 것이 되지 않을까?
왜 환자처럼 살라고 했을까? 이는 행동을 천천히 하라는 말과 관련 있을 것이다. 위빠사나 선원에서는 모든 것을 천천히 한다. 걷는 것도 천천히 걷는다. 알아차림하며 걷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리아픈 환자처럼 일어설 때도 천천히 일어나고 앉을 때도 천천히 앉으라고 했다.
마야사는 고요하다. 깔끔한 도량에는 휴지 하나 보이지 않는다. 잔디는 잘 가꾸어져 있다. 마치 삭발한 스님의 머리를 보는 것처럼 잘 깍여 있다. 절로 적멸에 들 것 같다.
2023-07-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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