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두라 광장에서, 스리랑카 성지순례기 40
스리랑카에서 시점은 2022년 12월 17일 이른 오후이다. 순례자들이 탄 자동차는 갈레를 벗어나서 콜롬보로 향했다. 도중에 들러야 할 데가 있다. 파나두라 논쟁 (Panadura Debate)이 열렸던 장소에 가보기로 했다.
갈레에서 파나두라 가는 길은 해안도로의 연속이다. 스리랑카 서남해안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풍광이 좋아서인지 서양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혜월스님에 따르면 한달살이나 두달살이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관광객과 현지인의 차이는 극명하다. 서양사람들은 거의 벗은 몸으로 다닌다. 남녀가 탄 오토바이가 지나 간다. 남자는 웃통을 벗은 상태이다. 유럽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치안상태가 좋은 것도 이곳에 머무는 이유가 된 것 같다.
현지인들 시장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옛날 시골 오일장터와 유사하다. 어느 나라이든지 장이 서는 곳은 활기가 넘친다.
파나두라는 콜롬보 남단에 있다. 이곳은 파나두라 논쟁으로 유명하다. 1873년 불교와 기독교의 사상논쟁이 있었다. 이 대론에서 불교가 승리했다. 그렇다면 왜 이 논쟁이 중요할까?
스리랑카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불교국가이다. 기원전부터 불교를 종교로 했다. 그 결과 스리랑카 각지에 수많은 불교유산이 있다. 그런데 물질적 유산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적 유산도 있다.
스리랑카는 빠알리 삼장의 나라이다. 또 스리랑카는 청정도론의 나라이다. 빠알리 삼장과 청정도론을 읽어 보면 정신문명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물질문명은 얼마나 발전될지 모른다. 스마트폰을 보면 알수 있다. 그러나 정신문명은 정점에 도달했다. 이는 부처님이 무상정등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불교도들은 이런 경지를 추구한다. 스리랑카에서도 최상의 경지를 추구해 왔다. 청정도론을 보면 열반에 이르는 경지에 대하여 써놓았다.
스리랑카는 서세동점 시대에 해상제국주의 국가에 먹이감이 되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와서 총과 대포로 점령했다. 그렇다고 스리랑카 정신세계까지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 주먹이 센 깡패가 있다. 힘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 여기 제국주의가 있다. 역시 힘으로는 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정신세계까지 빼앗기지는 않는다. 스리랑카가 그랬다.
영국은 스리랑카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학교에서는 바이블을 가르쳤다. 공무원을 뽑을 때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만 뽑았다. 수백년 동안 그렇게 했다. 그래도 불교는 무너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교리에 있어서 비교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내가 하는 말이 있다. 불교보다 더 훌륭한 종교가 있으면 그쪽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불교 보다 더 나은 종교를 보지 못했다. 스리랑카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1873년 파나두라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사상논쟁이 있었다. 논쟁을 하면 결과는 뻔하다. 단지 불교가 우월한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나두라 논쟁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을까?
파나두라 논쟁과 관련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영문판 위키백과에 미겟투왓테 구나난다 테라(Migettuwatte Gunananda Thera)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파나두라 논쟁이 설명되어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Panadura Debate)
이 모든 논쟁은 가장 주목할 만한 “파나두라 논쟁”(පානදුරාවාදය)으로 정점을 이루었는데, 이는 1873년 감폴라 논쟁 이후 2년 만에 열렸습니다. 논쟁의 원인은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가 영혼에 관한 설교를 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1873년 6월 12일 파나두라의 웨슬리안 예배당에서 구나난다 장로는 일주일 후 실바목사가 제기한 요점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두 종교단체는 1873년 7월 24일 파나두라에서 또 다른 토론을 열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논쟁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은 불교도들이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에서 쉽게 패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 승려들은 토론 기술에 대해 쓴 디그나가(Dignāga)의 냐야 빈두(Nyaya Bindu)와 다르마끼르띠(Dharmakirti)의 따르까 사스뜨라(Tarka sastra)와 같은 팔리어 및 산스크리트어 텍스트에 익숙했으며 공개 토론의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토론은 1873년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랑코트 비하라(Rankot Vihara) 근처 제라미아스 디아스(Jeramias Dias)가 소유한 부지에서 열렸습니다. 가장 유능한 토론자들이 기독교인들 편에 소환되었습니다. 구나난다 장로는 불교도 측의 토론자였으며 실바와 시리만나(Catechist S.F. Sirimanna)는 기독교 측을 대표했습니다. 논쟁은 신의 본질, 영혼, 부활부터 카르마 개념, 환생, 열반, 십이연기(Pratītyasamutpāda) 또는 연기의 원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K.D.G. 국립 문서 보관소 소장인 위말라뜨나(Wimalaratna)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실바 목사는 약 6,000~7,000명의 청중에게 연설했지만 그의 말을 이해한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완전히 대조적으로 구나난다 장로는 반대자들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평범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비자야 사마라위라(Vijaya Samaraweera) 박사는 그의 기사 “정부와 종교: 문제와 정책 c. 1832 to c. 19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구나난다 장로는 박식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높은 수준의 토론가이고, 기개 있고, 재치 있고, 웅변적인 사람임을 입증했습니다. 이 토론에서 생성된 감정과 구나난다 장로의 성격의 영향은 다음 세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교 운동에 있어서 파나두라에서의 구나난다 장로의 승리는 10년 간의 불교 신앙의 조용한 회복을 확증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코타헤나에서 ‘불교 전파 협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Buddhism)’의 설립과 갈레에서 랑카프라카라 출판사가 설립된 것이 불교의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이번 회복의 첫 번째 긍정적인 단계입니다.”
토론 둘째 날이 끝날 무렵 군중은 “sadhu, sadhu”를 외치며 기독교인들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분위기가 뜨거워지자 구나난다 장로는 목소리를 높여 “모두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발언 이후 군중은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해산되었습니다. (영문 위키백과, 구글번역기)
영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파나두라 논쟁에서 승리자는 구나난다 장로였다. 구나난다 장로의 승리는 결국 불교의 승리였다. 이에 군중들은 “사두! 사두!”라고 연호 했는데, 이 말은 “잘 했습니다, 잘 했습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상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라고 받아 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파나두라 광장에 섰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인 1873년에 이곳에서 세기의 대론이 있었다. 광장에는 그때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벽화가 있다. 또한 광장에는 구나난다 스님 동상이 있다. 한 손을 들고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부처님 수인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벽화를 보면 불교측 사람들은 당당한 모습이다. 반면에 기독교측 사람들은 당황스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토론 이전에 승부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영화 7인의 사무라이가 있다. 두 사람 사이에 결투가 벌어졌다. 고수가 보기에는 칼을 뽑기 전에 이미 승부는 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실력차이가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미 한사람은 죽은 목숨이다. 파나두라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토론도 그랬을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구전으로 전승되어온 게송이 있다. 자야망갈라가타이다. 부처님의 여덟 가지 승리에 대한 게송이다. 이 중에는 외도에 대한 승리의 게송도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Saccaṃ vihāya mati-saccaka-vāda-ketuṃ
Vādābhiropita-manaṃ ati-andhabhūtaṃ
Paññā-padīpa-jalito jitavā munindo
Taṃ-tejasā bhavatu te jaya-maṅgalāni
“삿짜까가 진리를 버리고 진리에서 벗어난
논쟁에 맹목적으로 뛰어들었을 때,
성자들의 제왕 지혜의 불 밝혀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 6번게송)
부처님이 자이나교의 삿짜까와 대론했다. 삿짜까는 기둥도 떨게 만든다는 토론의달인이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맛지마니까야 35번경인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에 실려 있다.
부처님은 삿짜까와의 대론에서 문답식으로 했다. 먼저 삿짜까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삿짜까가 물어 보면 부처님이 답하는 식이었다. 다음으로 부처님이 물어 보고 삿짜까가 답하는 식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끝장 토론을 보는 것 같다.
부처님은 자아론자인 삿짜까가에게 오온이 나의 것인지 물었다. 부처님은 “그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라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M35)라며 물은 것이다.
물질이 나의 것이라면 물질은 나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 당연히 이렇게 하라고 하면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질은 나의 통제권 밖에 있다. 느낌도,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나의 통제권 밖에 있다. 이런 오온에 대하여 어떻게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온은 나의 것이 아니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자아나 영혼 등 어떤 변치 않는 것도 나의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자아나 영혼, 신은 실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면 명칭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문답식으로 삿짜까를 이겼다.
부처님은 토론의 달인이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외도와 대론하여 승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맛지마니까야 40번경에서는 하느님(Brahma)과 대론에서도 하느님을 굴복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 망상적인 하느님이 있다. 망상적 하느님 바까(Baka)는 자신이 영원히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이 잘못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하느님을 찾아 갔다. 하느님도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음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은 망상적 하느님 바까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
없는 것을 추구하는 존재에 대하여
나는 그 존재를 긍정하지 않고
어떠한 환희에도 집착하지 않았다.”(M49)
이 게송은 부처님이 사라진 것에 대하여 가시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부처님은 존재에 대한 기쁨을 제거해 주고자 신통으로 바까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 것이다.
존재의 최상자인 바까는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자아와 이 세상은 영원하다고 보는 영원주의자에게 사라짐은 두려운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갈애이다. 영원히 존재하고 싶은 갈애인 것이다. 부처님은 사라짐을 보여 줌으로써 자아와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고자 했다.
부처님은 망상적 하느님 바까와의 대론에서 승리했다. 특히 창조주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는 “하느님은 하느님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다.”(M49)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경험되지 않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명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느님이여,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곧바로 알고 하느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 나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긍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여, 이와 같이 곧바로 아는 것에 관한 한, 그대와 동일하지 않은데 어떻게 내가 그대보다 열등합니까? 오히려 내가 그대보다 훌륭합니다.”(M49)
부처님은 창조주로서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느님도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음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참으로 그대 하느님 바까는 무명에 빠졌습니다. 참으로 그대 하느님 바까는 무명에 빠졌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느님 바까는 왜 무명에 빠졌을까? 이는 부처님이 “왜냐하면 그대는 항상하지 않은 것을 항상하다고 말하고,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말하고, 영원하지 않는 것을 영원하다고 말하고, 홀로 완전하지 않은 것을 홀로 완전하다고 말하고, 불멸이 아닌 것을 불멸의 것이라고 말하고, 또한 생겨나고 늙고 죽고 사라지고 윤회하는 것을 두고 그것에 대하여 생겨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것과는 다른 더 이상의 해탈이 있는데도, 그것과는 다른 더 이상의 해탈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하느님 바까는 영원히 살 것으로 착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창조주인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하느님은 창조주가 아니라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은 것도 알려 주었다. 이렇게 부처님에 하느님을 교화했다.
그 어떤 사상이나 견해도 부처님의 연기법에서는 부서진다. 이는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 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토론의 달인이었다. 당연히 부처님의 제자들도 토론의 달인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알면 토론의 달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1873년 스리랑카 파나두라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된다.
2022-12-1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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