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성지순례기 38, 올코트 대령의 오래된 일기, 비자야난다 피리베나를 방문하고
오늘 아침햇살이 찬란하다. 현재 시각은 새벽 5시 50분이다. 오전 6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벽으로 보는 것이다. 일터에서 자판을 치고 있다.
오늘 새벽에 집을 나섰다. 해가 뜨기 전에 나서기로 했다. 남들 자는 시간에 깨어 집을 나서면 상쾌하다. 오늘도 승리자가 된 듯 하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스리랑카 여행기를 쓰는 것이다. 지금까지 37편의 여행기를 썼지만 아직도 마무리 되지 않았다. 이번에 쓸 여행기는 올코트 대령(Henry Steel Olcott, 1832 ~ 1907)에 대한 것이다.
올코트 대령(Henry Steel Olcott, 1832 ~ 1907)
올코트대령은 누구인가? 영문판 위키백과를 보면 “헨리 스틸 올콧(Henry Steel Olcott, 1832년 8월 2일 - 1907년 2월 17일)은 미국의 군인, 언론인, 변호사, 프리메이슨, 신지학회의 공동 설립자이자 초대 회장이었다.”라고 소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올코트 대령이라고 하여 직함을 붙여 부른다.
스리랑카 현지 시점은 2022년 12월 12월 17일 토요일 오전이다. 갈레에서 식민지 시대, 제국주의 시대의 유적을 보고 난 후 갈레시내로 향했다. 갈레포트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세계적인 관광지이지만 갈레시내는 스리랑카 서민들이 사는 지역이다.
갈레에 가면 올코트 대령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김형근 선생이 순례일정에 집어 넣은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올코트 대령이 계를 받은 사원을 찾아 가는 것이다.
김형근 선생은 올코트 대령이 수계를 받은 주소를 확보했다. 운전기사 가미니가 주소대로 찾아 갔다. 갈레시내에서 올코트대령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것은 ‘VIDYALLKA PIRIVENA’라는 이름의 담마스쿨이었다.
담마스쿨은 백색건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올코트대령과 관련 있을 것 같았다. 불상이 있고 보리수도 있었다. 더구나 로터리에는 사람의 동상도 있었다. 그것은 중년남자가 양복 입은 동상이었다.
동상이 있고 담마스쿨이 있어서 이 건물이 올코트 대령이 수계받은 현장인줄 알았다. 그러나 명백히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이에 김형근 선생은 담마스쿨에 들어가서 이곳이 올코트 대령이 수계받은 곳이 맞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나 담마스쿨은 수계현장이 아니었다.
올코트 대령이 수계 받은 현장은 다른 곳이었다. 김형근선생이 알아낸 것은 비자야난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원이었다. 이제 주소를 알았으니 찾아만 가면 된다.
갈레시내는 전형적인 스리랑카 사람들이 사는 도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갈레포트에 있는 건축물과는 달리 서민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건물은 낡았고 도로는 무질서하다. 낙후된 도시의 이미지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평화스럽다. 무엇보다 사원 가는 길에 불상이 있었다.
도시에 커다란 불상이 있었다. 붉은 색 가사를 입은 입상이다. 불상 옆에는 커다란 보리수가 있다. 이곳도 사원일 것이다. 사진을 확대해서 보니 ‘Sri Gnanabhasha Mawatha’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비자야난다를 찾아 갔다. 네비에도 잘 잡히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물어서 접근해 갔다. 어느 로터리에 이르자 중앙에 동상이 하나 보였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기골이 장대한 형상의 동상이 있다. 한눈에 올코트 대령 동상으로 파악 되었다. 이전 로타리에서 본 양복입은 동상에는 수염이 없었다. 제대로 온 것 같았다.
동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올코트 대령의 동상이 분명했다. 동상 아래에는 설명문이 있다. 싱할리어로 되어 있어서 읽을 수 없다. 설명문에 1880.5.17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 온다. 이는 올코트 대령이 이곳 스리랑카에 와서 최초로 오계를 받은 날자를 의미한다.
올코트 대령 동상은 로터리 중앙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어렵게 찾은 것이다. 그 동안 글로만 접하던 인물이다. 스리랑카 근대불교운동의 시작이자 오색불교도의 설계자인 올코트 대령 동상을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올코트 대령은 불교로 정식 개종한 최초의 잘 알려진 유럽계 미국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리랑카에서는 영웅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불교를 부흥시켰기 때문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올코트 대령에 대하여“독립 투쟁의 영웅 중 한 명이자 현재 종교, 국가 및 문화 부흥의 선구자”로 보고 있다.
스리랑카 성지순례가면 추천코스가 있다. 주로 유적 위주의 순례가 되기 쉽다. 그러나 뚜렷한 목적을 가진 순례에서는 남들이 가보지 않는 곳도 대상이 된다. 올코트 대령이 수계 받은 사원도 바로 그런 곳에 해당된다.
근처에 사원이 있을 것이다. 운전기사 가미니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서 마침내 사원 입구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그토록 한번 가보고 싶었던 사원에 온 것이다.
사원은 입구에서부터 예사롭지 않다. 도심에 있기 때문에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중형 사이즈는 되었다. 사원은 갖출 것을 다 갖춘 것 같다. 그것은 불탑과 보리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원은 한적하다. 우리 순례팀만 있다. 도심에 있어서일까 건물이 여러 동 들어차 있다. 마치 작은 대학 캠퍼스를 연상케 한다. 순례자들이나 관광객이 찾는 사원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사원이름은 비자야난다 피리베나(Vijayananda Pirivena)이다. 여기서 피리베나는 무슨 뜻일까? 검색해 보니 “스리랑카의 승려 교육을 위한 수도원 대학”이라고 한다.
2018년 현재 스리랑카에는 753개의 피리베나가 교육부에 의해서 설립되고 유지되고 있다. 출가한 승려가 구족계를 받기 전에 이 피리베나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피리베나는 한국불교식으로 말하면 승가대학이 된다.
비자야난다는 사원이라기 보다는 승가대학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원과 다르다. 이곳 저곳에 강당과 같은 건물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 갔을 때는 스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원 관리인은 우리 일행을 주지스님이 있는 건물로 안내 했다. 주지스님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사전에 연락도 하지 않고 간 것이다. 불쑥 찾아 간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환대해 주었다.
주지스님은 나이가 많아 보였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지만 여든 살 안팍인 것 같다. 깡말라서 뼈가 드러나 보인다. 학구적 인상이다. 또한 부드러운 이미지이다.
주지스님은 마치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 온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스리랑카 사람 혜월스님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속복을 입은 낯선 외국사람들이 찾아 갔을 때 이런 환대가 있을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주지스님은 자애롭게 대해 주었다.
주지스님은 올코트 대령이 쓴 일기를 보여 주었다. 책은 오래 전에 출판된 것 같다. 문고판 사이즈로 꽤 두껍다. 책의 표지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올코트 대령 사진이 있다. 책의 제목은 ‘OLD DIARY LIVIES’이다.
책은 대단히 낡았다. 수십년 된 것 같다. 시중에서 이 책을 살 수 있을까? 검색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절판된 것이라면 새로 발간해야 할 것이다.
올코트 대령의 ‘OLD DIARY LIVIES’는 오래된 일기장이라는 뜻이다. 어떤 내용일까? 검색해 보니 “6권으로 구성된 이 컬렉션(2000페이지 이상)은 Theosophic Society 창립에 대한 특별한 설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제공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신지학회와 관련된 일기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지학회는 무엇일까? 검색해 보니 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Theosophical Society는 난해한 신종교 운동인 Theosophy의 조직체입니다. 1875년 미국 뉴욕에서 설립되었습니다. 설립자 중에는 러시아의 신비주의자이자 신지학 운동의 주요 사상가인 Helena Blavatsky와 초대 회장인 Henry Steel Olcott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와 같은 아시아 종교 전통의 일부뿐만 아니라 신플라톤주의와 신비주의와 같은 오래된 유럽 철학과 운동에서 광범위한 영향을 받습니다.”라고 설명해 놓았다.
신지학회에 대한 검색을 계속 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미군 대령이었던 올코트는 스리랑카에서 1873년에 열린 기독교와 불교(정확히는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 간의 논쟁인 '파아나두라 대논쟁'(Panadura Wadaya / Panadura Debate )에서 불교 측이 우위를 점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에 큰 영향을 받아 신지학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오늘날 신지학회는 뉴에이지운동과도 관련이 있다. 현재 신지학회는 수많은 단체로 분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지학회가 수많은 회원을 보유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인류의 우의, 인간의 복지실현, 인간의 잠재력 발굴이이다. 이와 같은 신지학회의 출발이 올코트 대령과 부인 블라바츠키 여사인 것이 흥미롭다.
올코트 대령의 올드다이어리라이브즈는 여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볼륨은 1874년에서1878에 쓴 것으로서“Olcott와 Madame Blavatsky 사이의 첫 만남과 1875년 Theosophical Society의 창립”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이 책은 온라인에서 다운 받을 수 있다.
주지스님은 대단히 친절하고 자애로운 것 같다.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고 갑자기 들이 닥친 일행에게 사원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법당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스리랑카 순례 다니다 보면 법당 들어갈 일이 별로 없다. 불탑과 보리수가 주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탑과 보리수를 도는 행위로 끝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법당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주지스님과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법당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중앙에 홀이 있다. 홀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복도식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법당은 신심을 내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탄생에서부터, 성도, 초전,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갖가지 조형물과 벽화로 장식해 놓았기 때문이다.
주지스님은 우리를 특별한 벽화로 안내 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올코트 대령과 그의 부인이 둘이서 수계를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부처님 일대기 벽화와 함께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곳 비자야난다 사원이야말로 올코트 대령 부부가 수계를 받은 확실한 장소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주지스님은 우리를 다음 코스로 데려 갔다. 그 곳은 강당건물이다. 강당 안에 들어가니 벽화속에 있는 바로 그 강당이다. 올코트 대령 부부가 수계를 받던 바로 그 강당으로 인도한 것이다. 이는 벽화 속에서 본 세 개의 문의 형태로 확인 되었다. 벽화에서 본 문 세 개가 강당에도 있었던 것이다!
주지스님은 사원 투어를 시켜 주었다. 그리고 시자를 시켜서 차를 대접하게 했다. 일행은 길 건너 유치원 건물 2층에 있는 스님들 숙소에 갔다. 그곳에서 차를 마셨다. 처음 찾아 간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환대한 것 같다. 그런 환대는 아마도 스리랑카 사람 혜월스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어렵게 찾아 왔다. 우여곡절도 겪었다. 누구도 찾아 갈 생각하지 않는 곳을 찾아 왔다. 그것도 물어물어 찾아 왔다. 이에 사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번 순례 목적은 달성되었다. 누구나 아는 이름 있는 성지를 가는 것도 좋지만 꼭 가볼 만한 곳에 가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곳 중의 하나가 올코트 대령부부가 수계받은 비자야난다 사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원을 방문하고 나자 가슴이 뿌듯했다. 마치 큰 일을 해낸 것 같다. 남들이 가 볼 생각을 안하는 곳,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모르는 곳에 가 본 승리감이다.
만약 그때 김형근 선생이 물어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엉뚱한 곳을 그곳이라고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순례팀에 행운이 있어서일까 제대로 찾아 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올코트 대령의 수계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스리랑카 근대불교부흥운동의 신호탄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세계에 불교를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왜 그런가? 올코트 대령의 수계는 스리랑카 출신 다르마팔라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다르마팔라는 스리랑카 근대불교부흥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다. 이는 올코트 대령의 수계와 관련이 있고 더 나아가 파나두라 논쟁과도 연결된다.
스리랑카는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전에는 네덜란드가 들어 왔고 더 이전에는 포르투갈이 들어 왔다. 영국 식민지 시절 스리랑카 불교는 위축되었다. 이를 일거에 만회 해준 사건이 있었다. 파두나 논쟁에서 불교가 기독교에 승리한 것이다.
파두나 논쟁의 승리는 올코트 대령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올코트 대령은 스리랑카에서 수계 받게 되었다. 스리랑카에서 올코트 대령의 활약은 다르마팔라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세계종교회의가 열렸다. 그때 다르마팔라는 스리랑카 대표로 참가했다. 그때 다르마팔라는 불교를 알렸다. 이후 미국에서 불교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르마팔라는 불교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그 결과 미국에서 불교 붐이 일어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 가까운 원인으로 올코트 대령의 수계가 있었고, 먼 원인으로는 파나두라 논쟁에서 구나난다 스님의 승리가 있었던 것이다.
스리랑카 근대불교부흥운동은 세 가지 사건에 기반한다. 구나난다 스님이 1873년 파나두라 논쟁에서 승리한 것, 파나두라 논쟁에서 승리한 것에 자극받아 올코트 대령이 1880년에 스리랑카에서 수계한 것, 올코트 대령의 활동에 영향받아 다르마팔라가 1893년 시카고 종교회의에서 연설한 것을 들 수 있다.
불교는 승리의 종교이다. 불교가 왜 승리의 종교인가?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모든 외도의 견해에 대해서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파나두라 논쟁에서 승리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파나두라 논쟁의 승리로 올코트 대령이 스리랑카에 오게 되었다. 이후 스리랑카에서는 본격적인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수계현장이 바로 비자야난다 사원인 것이다. 비자야난다는 '승리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비자야가 승리를 뜻하는 빠알리어이고 난다는 즐거움 또는 기쁨이라는 뜻이다.
순례기를 쓸 때 부담스럽다. 단순히 사진이나 올리는 것으로 끝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순례기를 작성하지 않는다. 단지 다녀 오는 것으로 그친다. 그럼에도 이렇게 순례기를 남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기록은 해 놓으면 남는다. 물건처럼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돈처럼 흔적도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여행을 다녀 와서 애써 기록을 남겨 놓으면 닳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남는 것은 기록밖에 없다.
올코트 대령은 OLD DIARY LIVIES라는 기록을 남겼다. 오래된 일기라는 책이다. 이렇게 기록을 남기니 역사적 자료가 된다. 후학들의 연구자료가 되는 것이다. 비자야난다 피리베나에서 본 낡은 책이 그것이다.
여행기 작성은 무척 힘이 든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등 모든 것이 조사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작성하고 나면 충만한 마음이 된다. 특히 이번 여행기가 그렇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누구도 올코트 대령의 수계 현장인 비자야난다 피리베나방문 기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초 기록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2023-07-1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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