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성지순례기 35, 부처님이 방문한 위대한 축복의 탑묘 키리베헤라
여행은 늘 마음 설레이게 만든다. 국내여행이 이럴진대 해외여행은 어떠할까? 낯선 이지(異地)에서 보고 듣고 느낀다.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다. 현지에서 여행 못지 않게 회상하는 즐거움도 있다. 후기를 쓸 때이다. 여행기를 쓰면 다시 한번 여행을 다녀 온 것 같다. 스리랑카 키리베헤라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스리랑카에서 현지날자는 2022년 12월 16일 금요일이다. 이른 오전에 누와라 엘리야를 나서 장쾌한 협곡을 보았다. 엘라를 지나니 평지가 나타났다. 이전에 보던 것과 다르다. 아누라다푸라의 평지와 달리 덜 개발 된 것 같다.
스리랑카 동남부는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것 같다. 그래서일까 서울 면적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얄라 국립공원이 있다. 국립공원에 가기 전에 도로에서 코끼리를 만났다. 무려 다섯 번 만났다. 두려움과 공포의 시간을 가졌다. 강제 코끼리 사파리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짜릿했다. 진짜 사파리를 한 것이다.
패키지 일정에 없는 키리베헤라
가고자 하는 곳은 키리베헤라(Kiri Vehera)이다. 혜월스님이 출가한 절이라고 한다. 이번 스리랑카 성지순례 일정에 키리베헤라가 포함된 것은 행운이다. 아마도 스님이 출가한 절이기 때문에 잡아 놓았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일반 여행사의 패키지에도 키리베헤라가 들어가 있을까?
스리랑카 성지순례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가장 일반적인 8일 일정을 보면 아누라다푸라, 시기리야, 담불라, 캔디, 콜롬보로 되어 있다. 또 다른 8일 일정을 보면 아누라다푸라, 미힌탈레, 담불라, 시기리야, 폴론나루와, 간달라마, 알루비하라, 캔디, 켈라니아, 콜롬보로 되어 있다. 어느 여행일정에도 키리베헤라는 보이지 않는다.
키리베헤라는 스리랑카 동남부 우바 지방에 있다. 얄라국립공원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일까 원시의 자연을 본다. 청정지대에 있는 성지인 것이다.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물소 였다.
길을 가다가 물소 떼를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황소와는 다르다. 동남아에 사는 시커먼 물소가 떼를 지어 있는 것이다. 마치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을 보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다른 지역과 확실히 달랐다.
스리랑카는 국토가 작다. 그럼에도 다양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의 지평이 있는가 하면 해발 2천미터가 넘는 고원도 있다. 동남부에는 초원과 늪지대도 있다. 우리나라 남한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지역에 다양한 지형이 있는 것이다. 또한 지역의 다양성 못지 않게 문화의 다양성도 있다.
혜월스님이 출가한 절 카타라가마(Kataragama) 사원
키리베헤라에는 커다란 사리탑이 있다. 그런데 사원이 있는 구역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카타라가마(KATARAGAMA) 사원을 말한다. 먼저 카타라가마 사원에 들어갔다.
카타라가마 사원 입구는 노랑 황금색 아치로 되어 있다. 두 마리의 코끼리 형상이 흰 상아를 내밀고 서 있다. 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은 보리수이다.
혜월스님은 보리수 앞에 섰다. 자신이 젊었을 때 출가했을 때도 이 보리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70년대 후반인 것 같다. 스님이 21세 때 이 절로 출가했다고 한다.
보리수는 거대하다. 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Kataragama 사원 뒤에 있는 Bo 나무는 스리랑카 Anuradapura에 있는 Sri Maha Bodhiya의 여덟 묘목(Ashta Phala Ruhu Bodhi) 중 하나입니다. 이 나무는 기원전 3세기에 심어졌습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카타라가마 보리수는 아누라다푸라 보리수와 형제보리수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인도 보드가야에 있는 보리수가 이곳에까지 있게 된 것이다. 보리수가 있기 때문에 성지중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건기이어서일까 보리수도 단풍이 든 것 같다. 울긋불긋한 보리수도 있다.
불교사원 안에 힌두교 사당이
카타라가마 사원을 다 보지 못했다. 법당 건물이 있지만 들어가 보지 못했다. 겉에서만 보았을 뿐이다. 법당 건물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끝냈다. 그런데 카타라가마 사원에는 불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힌두교 사원도 있었다.
카타라가마에는 세 가지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여행기를 쓰기 위해서 검색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카타라가마에는 불교사원도 있고 힌두교 사원도 있는 것이다. 다만 힌두교 사원은 같은 영역 내에 있지만 벽으로 구분되어 있고 작은 통용문만 있을 뿐이다.
카타라가마 사원 안에는 힌두교 사당도 있다. 불교사원 안에 힌두교 사당이 있어서 힌두신이 모셔저 있다. 보시함으로 보이는 도네이션 박스도 있다. 혜월스님에 따르면 힌두신은 불교를 보호하는 신장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힌두사당은 한국의 산신각이나 칠성각 정도의 개념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카타라가마사원에 대하여 더 알아 보았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Kataragama 사원은 스리랑카의 Kataragama에 있으며 불교 수호신인 Kataragama deviyo와 Hindu에게 헌정된 사원 단지입니다.”라고 소개 되어 있다. 카타라가마사원은 불교도에게나 힌두교도에게나 성지인 것이다.
불교도와 힌두교도의 성지 카타라가마
카타라가마사원에 대한 여러 전설이 있다. 힌두교전설도 있고 불교전설도 있고 무슬림전설도 있다. 불교전설과 관련해서는 두투가무누(Dutugamunu) 왕이 등장한다. 이는 “Kataragama deviyo가 Ellalan과의 전쟁 전인 기원전 1세기에 Dutugamunu가 숭배한 신이며 Dutugamunu가 그의 승리 후에 Kataragama에 Skanda-Kumara에 성소를 세웠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자주 등장하는 신의 이름이 있다, 그것은 ‘Kataragama deviyo’라는 신을 말한다.
카타라가마 데비요는 무엇을 말할까? 사원의 유래가 된 카타라가마 데비요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Kataragama deviyo(또한 불림: Skanda Kumara, Kartikeya, Sinhala: කතරගම දෙවියෝ)는 스리랑카의 수호신입니다. 매우 강력하다고 여겨지는 인기 있는 신인 Kataragama deviyo를 모시는 사당이 전국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싱할라 불교도들은 그를 스리랑카에 있는 사사나 부처님의 신성한 후원자로도 믿습니다. 루후누 마하 카타라가마 데발라야(Ruhunu Maha Kataragama Devalaya)로 알려진 카타라가마 신에게 바쳐진 고대 사원은 우바 주의 모나라갈라 지구에 있는 카타라가마의 남동쪽 마을에 있습니다.
오늘날 Ruhunu Maha Kataragama devalaya는 다양한 종교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통합하는 사원이 되었습니다. 스리랑카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온 수천 명의 신자들이 매일 이 사원을 방문합니다. Kataragama deviyo는 Tamil 사람들이 Murugan이라고 부르는 힌두교 전통의 God Skanda와 동일시됩니다. Skanda로 알려진 대승 불교의 동일한 수호신도 있습니다. 신지학자들은 루후누 카타라가마 데발라야를 인류와 세계의 영주인 사나트 쿠마라에게 바치는 성지로 식별합니다.”
(Buddhist Kataragama, 위키백과)
카타라가마 데비요는 스리랑카 수호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신은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의 수호신도 된다는 것이다. 힌두교와 관련된 힌두 카티르카맘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스리랑카와 남인도의 타밀 힌두교도들은 이곳을 카티르카맘(Katirkamam)이라고 부릅니다. Katirkaman은 Skanda-Murukan과 관련이 있습니다. 남인도의 Saivite Hindus도 그를 Subrahmanya라고 부릅니다. 그는 Kandasamy, Katiradeva, Katiravel, Kartikeya 및 Tarakajith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이름 중 일부는 Katirkamam의 루트 katir에서 파생됩니다. "카티르"는 형태가 없는 빛을 의미합니다. 신은 6개의 얼굴과 12개의 손 또는 1개의 얼굴과 4개의 손으로 묘사됩니다. Murugan에 대한 사랑과 나쁜 카르마를 완화하기 위해 bhaktars는 벨로 뺨과 혀를 뚫고 등 피부를 뚫은 큰 갈고리로 Murugan의 murthi를 운반하는 큰 전차를 당깁니다. 이 관행은 kavadi로 알려져 있습니다. Murugan의 vahana 또는 차량은 공작 Mayil입니다.
Murugan의 형으로 알려진 사랑스러운 코끼리 얼굴 신 Ganesha를 기리는 Sella Katirkamam이라는 관련 사당이 근처에 있습니다. 현지 마닉 강가 또는 마니카 강가이(보석의 강)는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신성한 목욕을 하는 재계의 장소입니다. 지역 주민들은 보석 함량이 높고 정글을 통해 강을 따라 늘어선 나무 뿌리의 약효 때문에 목욕을 하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Hindu Katirkamam, 위키백과)
힌두교와 관련된 카타라가마 신은 카티르카맘이라 한다. 또한 스칸다 무루칸(Skanda-Murukan)과도 관련이 있는데, 이는 카르티케야(Kartikeya)와 같은 말이다. 전쟁의 신 또는 승리의 신을 뜻한다. 불교도와 힌두교도가 민간에서 공통으로 숭배하는 대상은 전생의 신, 승리의 신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쟁의 신, 승리의 신 카타라가마 데비요
스리랑카 동남부에 있는 카타라가마 사원은 불교와 힌두교의 성지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불교세가 강하기 때문에 불교사원의 영향력 하에 있다. 또한 800미터 떨어진 곳에 그 옛날 부처님이 이곳에 직접 오셨다고 전해지는 키리베헤라 불탑이 있다.
이번 스리랑카 순례는 스리랑카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잘 모르고 떠났다. 다녀와서 후기를 쓰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혜월스님이 출가했다는 카타라가마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카타라가마에는 불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힌두교도 있다는 것이다.
두 종교 신도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수호신이 있다. 이를 카타라가마 데비요라고 한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민간신앙 수호신 같은 것이다. 전쟁의 신 또는 승리의 신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최영장군이나 중국의 관운장과 같은 위치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비사문천이 될 것이다. 비사문천은 북방을 관장하는 벳싸바나 대왕의 한자식 이름이다.
사부대중의 수호신 벳싸바나 대왕
초기경전에도 전쟁의 신이 있다. 사대왕천에서 북방을 관장하는 벳싸바나 대왕을 말한다. 이는 디가니까야 32번경 아따나띠야의 경에서 볼 수 있다.
아따나띠야의 경에 따르면, 북방을 관장하는 벳싸바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수호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다. 그래서 누구든지 아따나띠야 주문을 외우면 안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따니띠야 주문은 꽤 길다. 주문은 “눈 있는 님, 길상의 님인 비빳씬께 영광이 있기를!”라고 시작된다. 한국빠일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예경지송에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게송이 있다.
“눈 있는 님, 지복의 님인
비빳씬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
모든 존재를 애민히 여기시는
씨킨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
목욕재계하신 님, 고행의 님인
벳싸부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
악마의 군대를 쳐부순
까꾸싼다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
고귀한 님으로서 궁극에 이른
꼬나가마나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
모든 것에서 해탈하신
깟싸빠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
싸끼야 족으로 아들로 빛나니
일체의 고통을 제거하는
원리를 가르쳐주신 님이신
앙기라싸님께 예경하나이다.
세상에서 적멸에 들어서
있는 그대로 통찰하신
그 부처님들은 두 말을 하지 않으니
두려움을 여읜 고귀한 님들이시나이다.”
(예경지송, 과거칠불의 수호경)
아따나띠야 주문은 꽤 길다. 천수경에 있는 신묘장구대다라니보다 몇 배 이상 긴 길이의 주문이다. 이 주문을 외우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벳싸바나 대왕은 부처님에게 말했다. 수행승이나 수행녀, 재가의 남자신도나 여자신도를 해코지 하는 야차 등 귀신이 있으면 “그의 머리를 일곱조각으로 분쇄할 것입니다.”(D32.8)라고 말한 것이다.
꽃 파는 여인들은 모두 미인
카타가라마 사원에서 키리베헤라 불탑이 있는 곳까지는 직선 거리로 800미터이다. 마치 신작로 같은 흙길이 곧게 주욱 뻗어 있다. 저 멀리 아스라히 백색의 다고바가 보인다. 저 곳을 향하여 네 명이 길을 떠났다. 혜월스님과 김형근 선생, 그리고 나와 운전기사 가미니 네 사람이다.
성소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양말도 신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모두 맨발이다. 무려 800미터나 떨어져 있는 신작로같은 흙길을 맨발로 걸었다.
흙길 주변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다. 열대지방에서 보는 상록수이다. 종종 남방에서만 볼 수 있는 대나무도 있다. 대나무가 무리를 이루어 서 있는데 멀리서 보면 한구루 나무처럼 보인다. 가지가 아래로 내려온 나무도 볼 수 있다. 마치 커튼 쳐 놓은 것처럼 보인다. 보리수도 이런 류의 나무에 해당된다.
나무 그늘 아래는 시커먼 물소 떼가 무리 지어 있다. 이런 광경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TV에서 동물의 왕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곳 남동부 지방은 자연과 원시가 공존하는 곳 같다. 평화롭기 그지 없는 길을 걸었다.
백색의 불탑이 다가올수록 꽃가게가 나타났다. 꽃가게는 즐비하다. 이곳에서는 오로지 꽃만 판다. 꽃 공양용 꽃을 파는 것이다. 향, 초, 꽃 등 공양물이 있지만 꽃 공양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스리랑카 전역 어느 사원에서나 볼 수 있다.
꽃가게를 지나칠 수 없다. 불탑에 꽃 공양하기 위해서 꽃을 샀다. 그런데 꽃 파는 여인들은 한결같이 미인이라는 사실이다. 스리랑카 미인들은 모두 꽃가게에 있는 것 같다.
꽃과 미인은 통하는 것 같다. 같은 꽃을 팔아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파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같은 여자라도 미인형이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꽃가게에서 꽃 파는 여인들은 모두 미인 같다. 특히 미소가 아름답다.
위대한 축복의 탑묘 키리베헤라(Kiri Vehera)
기리베헤라에 도착했다. 백색의 거대한 불탑이 전면으로 다가 왔다. 크기는 얼마나 될까? 위키백과에 따르면 높이가 95피트이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높이가 28미터이다. 아파트 9-10층 높이에 해당된다.
혜월스님이 말한 것이 있다. 기리베하라는 부처님이 오셨던 곳이라고 했다. 전설 같고 신화 같은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스리랑카를 세 번 방문 했는데, 세 번째 방문한 곳이 이곳 키리베헤라라는 것이다.
키리베헤라 불탑 앞에는 안내판이 있다. 싱할라어와 타밀어, 영어로 적혀진 것이다. 영어로 쓰여 있는 것을 구글번역기로 돌려서 해석해 보니 “전설에 따르면 스리랑카를 세 번째 방문했을 때 수프리모 고타마 붓다는 500 Bde of Arihath Theroes와 함께 스리랑카의 Katharagama에 있는 Kihiri Grove에 도착했습니다(BE 8/BC Century 6)”라고 번역되었다.
부처님이 부처님 재세시에 5백명의 장로와 함께 스리랑카를 방문했다고 한다. 키리베헤라는 세 번째 방문한 곳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런 비문이 역사적인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스리랑카 역사서 마하왕사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어비문은 읽기가 쉽지 않다. 구글 번역기를 이용하여 나머지 부분도 번역해 보았다. 부처님이 이곳을 방문해서 법문을 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비문에는 “이 성지에는 당시 부처님께서 좌정하셨던 금좌와 여래의 머리 사리, 아노마 강 유역에서 싯다르타 세베르드 왕자의 머리카락 다발이 가지고 있던 금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지역 관리자가 보물로 삼았습니다.”라고 적어 놓았다.
키리베헤라 전설에 따르면, 키리베헤라에는 부처님의 성물이 있다고 한다. 부처님이 직접 전달해 준 보리수좌의 좌대, 심지어 아노마 강에서 자른 머리카락 다발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성물이 있어서일까 ‘망갈라 마하 베헤라(Mangala Maha Vehera)’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말은 ‘위대한 축복의 탑묘(The Blessed Great Chethiya)’라는 뜻이다.
키리베헤라는 여러 이름이 있다. 키히리 베헤하(Kihiri Vehera)라고도 하는데 이는 일명 성스러운 ‘키리웨헤라 체티야(KIRIWEHERA CHETHIYA)’라고도 한다. 위키백과에서는 ‘키리 베헤라(Kiri Vehera)라고 표기 되어 있다.
키리라는 말은 기리라고도 발음된다. 혜월스님에 따르면 기리라는 말은 ‘소의 우유처럼 하얗다’라는 뜻이다. 아마도 백색의 다고바를 우유빛으로 본 것 같다. 어쩌면 소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인지 모른다. 중앙대로에 물소떼가 유유자적 이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방문한 솔로마스타나 16성소
부처님은 정말 스리랑카에 왔을까? 이에 대하여 충분히 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서와 유적을 근거로 들고 있다. 설령 그것이 전설이고 신화일지라도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키리베헤라와 같은 성소가 스리랑카 전역에 16군데가 있다. 이를 솔로마스타나(Solomasthana)라고 한다. 오늘날 스리랑카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다.
솔로마스타나는 16곳이 있다. 이와 같은 성소에 부처님이 세 차례에 걸쳐서 방문했다고 한다. 고대 스리랑카 연대기 마하왐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부처님 방문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9월에 마히양가나를 처음 방문했습니다. Mahavamsa는 그가 그곳에서 야차를 정복하고 그들을 Giri라는 섬으로 보냈고, 그로 인해 나중에 그 나라에서 불교가 확립되는 배경을 설정했다고 말합니다. 부처의 두 번째 스리랑카 방문은 깨달음을 얻은 지 5년 만에 나가디파를 방문하여 나가왕 출로다라와 마호다라 사이의 보석 의자에 대한 분쟁을 해결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지 8년째 되는 해에 부처님은 500명의 비구와 함께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그 나라를 방문하셨습니다. 이 방문은 Kelaniya에 대한 것이었고 Maniakkika라는 이름의 Naga 왕이 이전 방문 중에 부처님에게 자신의 왕국으로 오라고 요청한 초대 때문이었습니다. Maniakkika의 거처에서 Dharma에 대한 담론을 마친 후 Mahavamsa는 부처님이 Samantakuta, Diva Guhava, Dighavapi 및 Jaya Sri Maha Bodhi, Ruwanwelisaya, Thuparamaya 및 Sela Cetiya가 현재 서있는 장소를 방문했다고 기록합니다.”(위키백과, Solosmasthana)
키리베헤라는 솔로마스타나 16곳 중에 하나에 해당된다. 참고로 16곳의 솔로마스타나는 다음과 같다.
1) Mahiyangana Raja Maha Vihara
2) Nagadeepa Purana Viharaya
3) Kelaniya Raja Maha Vihara
4) Sri Pada
5) Diva Guhava
6) Deegavapi Raja Maha Viharaya
7) Muthiyangana Raja Maha Vihara
8) Tissamaharama Raja Maha Vihara
9) Jaya Sri Maha Bodhi
10) Mirisawetiya Vihara
11) Ruwanwelisaya
12) Thuparamaya
13) Abhayagiri vihāra
14) Jetavanaramaya
15) Sela Cetiya
16) Kiri Vehera
솔로마스타나 16곳을 보면 스리랑카 주요 불교성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이번 순례에서 다녀 온 곳은 3번 켈라니야, 9번 자야 스리 마하 보디, 10번 미리사웨티야, 11번 루완웰리사야, 12번 투파라마야, 13번 아바야기리, 14번 제따바나라마야, 그리고 이번에 방문한 16번 키리베헤라이다.
16곳의 솔로마스타나를 보면 주로 아누라다푸라에 집중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리랑카 동남부에도 솔로마스타나가 있다. 스리랑카 동남부 우바 지방에는 1번 Mahiyangana Raja Maha Vihara, 7번 Muthiyangana Raja Maha Vihara, 그리고 16번 Kiri Vehera, 이렇게 세 곳이 있다.
솔로마스타나 16곳 중에서 1번은 Mahiyangana Raja Maha Vihara이다. 이 사원은 건립연대가 기원전 6세기로 되어 있다. 부처님 재세시에 해당된다. 그래서일까 이 사원을 설명한 위키백과를 보면 부처님의 첫 방문지로 기록 되어있다.
키리베헤라는 솔로마스타나 16곳 중의 하나이다. 순서가 가장 나중에 있기 때문에 가장 나중에 방문한 것일까? 그것은 알 수 없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부처님이 세 번째로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 혜월스님이 출가했다. 카타라가마 사원에서 출가한 것이다.
스리랑카사람 혜월스님에 대하여
혜월스님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았다. 이동 중에 문의해서 안 것도 있고 들어서 안 것도 있다. 내가 아는 혜월스님에 대하여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혜월스님이 처음 한국에 온 것은 1984년이다. 한국에서 8년 있었다.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1977년에 출가했다. 출가한지 7년 되었을 때 한국에 온 것이다. 그때 당시 송광사에는 외국인 스님들도 있었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다고 한다. 한국스님들이 영어를 할줄 몰라서 말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혜월스님은 한국말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연세대 한국어 학당에 가서 책을 샀다. 또한 종로에서 영영한 사전을 샀다.
스님은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다. 3개월이 지나자 어느 정도 소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외국인 스님들은 연세대 한글학당 다니면서 공부 했으나 혜월스님은 독학으로 깨친 것이다.
혜월스님은 언어 천재인 것 같다. 출가전에 독일어를 깨쳤다고 한다. 출가한 후에는 한국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살았는데 그때 마다 외국어를 깨쳤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할줄 아는 말은 싱할리어, 영어, 한국어, 독일어, 스페인어, 힌두어, 산스크리트어, 빠알리어라고 한다. 태국에도 2년 살았기 때문에 태국말도 조금 할 줄 안다고 한다.
스님은 전세계를 돌아 다녔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한국뿐만 아니라 홍콩, 대만, 호주에서도 각각 2년 살았다. 지금은 미국 엘에이(LA)에 살고 있다.”(2022-12-17)
기록이 중요하다. 들었던 것을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잊어 버린다. 스마트폰 앱에 키워드라도 적어 놓으면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혜월스님과 관련하여 들은 것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스님은 왜 출가하셨어요?”
불자들은 스님들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다. 가장 궁금한 것은 출가에 대한 것이다. 혜월스님의 출가동기도 궁금했다. 그래서 “스님은 왜 출가하셨어요?”라고 물어 보았다.
혜월스님의 대답이 궁금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본 랏타빨라 존자의 출가이유를 기대했다. 그러나 의외였다. 스님은 한 수행자를 보고서 출가했다고 한다. 아마도 수행자의 위의에 감화를 받아서 수행자의 삶을 살기로 한 것 같다.
혜월스님과 함께 다니다 보니 갖가지 진기한 이야기도 듣는다. 스님에 따르면, 스님이 출가한 날 당일에 스리랑카 대통령이 왔다고 한다. 스님이 출가한 날 그날에 대통령이 키리베헤라를 방문한 것이다. 우연일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그거 역사책에 나오지 않나요?”라고 물어 보았다. 물론 농담으로 말한 것이다. 이렇게 스님은 유머러스한 면이 있다.
혜월스님은 몇 살 때 출가했을까? 스님이 말한 것을 종합해서 추론해 보니 21살 때인 1977년에 출가한 것 같다. 1956년생으로 알고 있다.
키리웨하라 가는 길은 꽃길
스리랑카 성지순례기 35번째 이야기는 카타라가마와 키리베헤라에 대한 것이다. 멀고 먼 남쪽나라, 더 이상 갈 수 없는 스리랑카, 거기에서도 동남쪽에 있어서 세상의 끝처럼 보이는 곳에 갔었다. 그곳은 놀랍게도 부처님이 다녀갔다고 한다.
카타라가마는 불교와 힌두교의 성지이다. 사원안에는 불교와 힌두교 신도들이 함께 믿는 카타라가마 데비요가 있다. 인도 힌두교에서 유래하는 전쟁의 신, 승리의 신을 말한다. 우리나라 산신과 같은 민속신앙의 신격이다. 초기경전에는 벳싸바나 대왕이 이에 대응될 것이다.
키리베헤라 가는 길은 꽃길이었다. 길이가 800미터에 달하는 길은 원시의 길이었다. 물소 떼가 지나다니고 물소떼가 초원에서 유유자적하게 쉬고 있는 원시의 땅이었다. 아직 현대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을 보았다. 꽃 파는 여인의 웃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보였다.
백색의 키리베헤라 다고바는 가슴을 설레게 했다. 마치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루완웰리세이야 다고바를 보는 것처럼 마음을 충만하게 했다. 전설에 따르면 부처님이 다녀간 곳이고, 또한 부처님의 유물과 성체가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성소중의 성소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이 다녀갔다는 16개의 솔로마스타나 중에 하나가 되었다.
한번 써 놓은 여행기는
오늘 아침 8시부터 키리베헤라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시각 오후 4시이다. 하루일과 중에 대부분을 여행기를 쓰는데 보냈다. 이런 행위는 헛된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써 놓으면 남는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는 것이 가장 쉽다. TV나 유튜브를 보는 삶이 가장 편하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행위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이다. 글쓰기 중에서도 여행기를 쓰기가 가장 어렵다.
여행기를 쓰려면 먼저 자료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해당지역의 역사와 문화도 알아야 한다. 해당지역의 역사와 문화, 종교 등 전반적인 것을 알아야 훌륭한 여행기가 될 수 있다.
여행기를 써 놓으면 누구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살면 세월이 지나도 남는 것이 없지만, 이렇게 여행기를 쓰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면 남는 삶이 된다.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있을 것이다.
힘들게 작성한 여행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번 써 놓은 여행기는 남아 있다. 인터넷바다에 있는 한 인연 있는 사람이 읽어 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군가 읽어 보았을 때 글을 쓴 목적은 달성된다. 키리베헤라, 언제 한번 다시 가볼 수 있을까?
2023-06-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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