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스리랑카 성지순례기 37, 갈레에서 본 제국주의 흔적

담마다사 이병욱 2023. 7. 6. 10:42

스리랑카 성지순례기 37, 갈레에서 본 제국주의 흔적
 
 
여행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여행은 크게 비즈니스여행과 즐기는 여행으로 나뉜다. 업무로 인하여 나가는 경우 국가이익에 도움이 된다. 달러를 벌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러 나가는 여행은 국익에 도움 되지 않는다. 달러를 쓰기 때문이다.
 
외국에 그다지 많이 나가 보지 않았다. 자비로 해외여행 한 것은 2011년이 처음이다. 그때 스님과 함께 팀을 이루어 중국 정주-낙양-서안을 여행했었다. 성지순례 여행인 것이다. 당연히 여행기를 남겼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여행지에서 라따나경 외우기 시동을 걸었다. 놀고 먹고 즐기는 여행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바다 밖으로 처음 나간 것은 1990년의 일이다. 그때 당시 개발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장비검수 목적으로 일본에 갔었다. 도쿄 아래에 있는 가나가와현 닛츠키(일본통신기)에 갔었다. 검수목적으로 갔지만 영업과장으로부터 관광안내도 받았다. 후지산 중턱까지, 눈이 있는데 까지 올라갔다.
 
독일에 처음 간 것은 1991년의 일이다. 수출된 제품에 문제가 발생해서 해결하기 위해 간 것이다. 로젠하임에 머물면서 문제를 했다. 이후 독일은 몇 차례 더 갔었다.
 
주로 유럽에 갔었다. 판촉활동하는데 개발자로서 따라 간 것이다. 바르셀로나, 파리, 스위스,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갔었다. 런던에는 전시회를 보기 위해 갔었다. 모두 2003년 이전의 일이다.
 
여행을 가면 여행기를 남긴다. 직장 다닐 때 업무로 여행 갔을 때는 보고서를 썼다. 2011년 이후 성지순례 떠날 때는 순례기를 작성했다. 순례기 없는 여행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잠시 한시간 동안 들른 곳일지라도 사진을 근거로 순례기를 작성한다. 스리랑카 갈레(Galle)도 그런 곳의 중 하나일 것이다.
 
강리도에도 표기된 스리랑카
 
때는 2022년 12월 17일 토요일 아침이다. 선라이즈드림 게스트하우스를 아침 일찍 출발하여 갈레로 향했다. 지도를 보니 게스트하우스와 갈레는 같은 생활권에 있다.
 

 
갈레, 이번 스리랑카 순례하면 접한 도시이다. 그런데 갈레는 서세동점시절 서구열강의 각축장이 된 곳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지리적 여건이 말해 준다. 스리랑카 최남단에 있어서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가는 길목에 있는 것이다.
 
스리랑카를 인도양의 진주라고 한다. 그리고 인도의 눈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서구열강이 이곳에 진출하기 이전에 아랍상인들이 드나들었다. 그래서일까 강리도에도 스리랑카가 표기 되어 있다.
 

 
사무실에 강리도가 걸려 있다. 디지털로 복원된 것을 인쇄한 것이다. 조선시대 1402년에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이다. 원본은 사라졌고 필사본이 일본 류코쿠대에 보관되어 있다.
 
강리도를 보면 인도양에 동그란 모양의 섬이 있다. 섬은 아라비아 반도와 인도 대륙의 중간에 있는데 해도(海島)라고 쓰여 있다. 해도가 스리랑카인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라비아 상인들은 인도 대륙보다는 스리랑카를 더 중시 했음을 알 수 있다.
 

 
스리랑카는 인도양의 중앙에 있어서 반드시 한번은 거쳐 가야 하는 곳이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서세동점 시절 서구 열강들도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스리랑카를 탐냈을 것이다. 그 중에 갈레가 핵심이다.
 

 
갈레 포트 시계탑에 서니
 
이른 아침 갈레 포트에 섰다. 갈레 관광의 시작점인 시계탑 주차장에 주차해 놓았다. 아침 햇살이 동쪽에서 찬란하게 비추었다. 날씨는 선선하다. 적도 가까이 있어서 찌는듯이 더울 것으로 생각하지만 의외로 선선하다.
 
시계탑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갈레포트 북쪽에 해당된다. 갈레포트는 남쪽으로 마치 반도처럼 툭 튀어 나왔는데 시계탑이 있는 곳은 북쪽 성문 가까이에 있어서 포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갈레포트는 17세기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위에서 조망하면 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붉은 기와 지붕과 오래된 벽, 그리고 법원, 은행, 관공서 등이 있어서 그때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갈레는 어떤 곳일까? 위키백과를 찾았다. 갈레는 콜롬보에서 119km 떨어진 남서쪽 끝에 위치해 있다. 갈레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이곳에 1589년 최초로 성채를 짓기 전에도 아랍상인들의 거점이었다. 갈레는 이후 네덜란드가 1649년부터 점령하면서 절정기를 맞았다. 갈레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천혜의 요새
 
갈레는 반도 모양이다. 북쪽은 목이 좁다. 북쪽 성문만 막으면 천혜의 요새가 된다. 반도 전체는 바닷가 아래에 까지 성벽으로 지어져 있다. 그리고 성벽에는 포대가 있어서 대포가 바다를 향하고 있다.
 

 
갈레 포트를 걸었다. 반도는 크지 않다. 시계탑에서 서쪽 해안 성벽을 따라 남쪽 등대까지는 고작 1.2키로 정도로 천천히 걸으면 20여분 걸린다.
 

 
해안은 파도가 거세다. 해안가 바위 위에 성벽을 만들어 진지를 만들었다. 그 옛날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사용하던 대포가 그대로 있다. 대포에 새겨진 것을 보니 ‘53852 CARRON 1795’라는 문자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1795이다. 1795년이면 네덜란드 지배시절에 해당된다.
 

 
갈레는 유럽의 침략자들이 오기 이전에도 유명한 항구였다. 그것은 인도양의 중간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스리랑카가 인도양의 중간에 있어서 동쪽과 서쪽 교역로의 중심역할을 한 것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모로코 여행자 이븐 바투타(Ibn Battuta)는 1342년에 갈레(또는 그가 부르는 칼리)를 방문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스리랑카는 지리적으로 서쪽으로는 아랍과 아프리카에 이른다. 동쪽으로는 동남아시아와 멀리는 중국에 이른다. 이런 이유로 해상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그래서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갈레는 페르시아인, 아랍인, 그리스인, 로마인, 말레이인, 인도인, 중국인이 갈레의 항구를 통해 사업을 하던 서구의 지배를 받기 오래 전부터 유명한 항구였습니다.”라고 했다.
 
정화 제독의 비문과 갈레
 
해상 실크로드로서 갈레는 아프리카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놀랍게도 “1411년, 중국 제독 정화(Zheng He)가 실론을 두 번째로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갈레에 중국어, 타밀어, 페르시아어의 3개 언어로 된 석판 비문인 갈레 삼국어 비문(Galle Trilingual Inscription)이 세워졌습니다.”라고 써 놓았다.
 
명 시대 때 정화가 이곳 갈레를 거쳐 아프리카를 갔다. 그런데 정화는 이곳 갈레를 두 번 방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어, 타밀어, 페르시아어로 된 비문을 남겼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 석판은 어떤 것일까? 검색해 보았다.
 
정화비문은 콜롬보 국립박물관에 있다. 갈레에서 1911년 발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비문의 내용은 무엇일까?
 

 
비문은 정화가 1409년에 세운 것이다. 포르투갈 침략자들이 오기 180년전의 일이다. 비문에는 스리 파다 산에 바친 제물에 관한 것이다. 중국어 비문에는 부처에게 바치는 제물이 언급되어 있고, 페르시아어 비문에는 알라에게 바치는 제물이, 타밀어 비문에는 힌두신 비슈누에게 바치는 제물이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정화비문은 특징이 있다. 그것은 무역을 기반으로 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유럽침략자들과 다른 것이다. 식민지를 만들어 착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지위를 인정하고 교역하자는 것이다.
 
정화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공물을 주었다. 비문 기록에 따르면 “금 1,000개; 은 5,000개; 다양한 색상의 자수 실크 50롤; 다양한 색상의 실크 태피터 롤 50개; 금으로 수놓은 잡색 비단으로 만든 보배기 4쌍, 붉은색 2쌍, 노란색 1쌍, 검은색 1쌍, 골동품 황동 향로 5개; 옻칠에 금색으로 고른 앤티크 황동 꽃병 5쌍, 금 받침대 포함; 5 금 받침이 있는 옻칠 위에 금으로 취한 놋쇠 등불 5개; 주홍색 향로에 옻칠에 금을 입힌 향 그릇과 금 받침과 6쌍의 황금 연꽃; 향유 2,500캐티; 왁스 양초 10쌍; 향기로운 향 10개”라고 한다.
 
갈레에서 스리랑카 사원을 발견했다. 네덜란드 문화유산만 있는 줄 알았으나 뜻 밖에도 불상이 있는 사원을 본 것이다. 백색의 다고바와 함께 있는 사원 이름은 무엇일까? 구글 지도 검색결과 ‘Sri Sudharmalaya Buddhist Temple’임을 알았다.
 

 
이 사원에 대하여 더 검색해 보았다. 검색해 보니 “Sri Sudharmalaya 불교 사원은 Galle Fort에 위치한 불교 사원입니다. 사원에는 18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형 와불과 미니 사리탑이 있습니다. 이 사원은 예전에 교회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종탑을 포함하여 특이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불교 사원은 당시 Galle Fort에 살던 Mudliar이자 후원자인 S.A.Wickramasinghe 씨가 기증한 땅에 1889년에 지어졌습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화가 1409년에 스리랑카를 방문 했을 때 공물을 주었다. 이는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침략해서 수탈해 간 것과 다르다. 그런데 정화는 중국어 비문에서 부처에게 바치는 제물이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화가 스리랑카를 존중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알고 공물을 바친 것이다. 동시에 아랍인들에게 타밀인들에게는 그들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라고 언급해 놓았다. 서양의 침략자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갈레포트 종착지는 등대
 
갈레포트의 종착지는 등대가 있는 곳이다. 갈레포트 최남단 동쪽에 있다. 이를 갈레 라이트하우스라고 하는데 스리랑카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라고 한다.
 

 
등대는 1650년대 후반부터 사용되었다. 가장 남쪽에 있기 때문에 등대로 사용하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초기에는 바위 위에 랜턴이 있었다고 한다.
 
갈레등대는 1848년 영국에 의해서 최초로 세워졌다. 그때 당시 24미터였다고 한다. 불을 밝히면 19키로까지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1936년 소실되었다. 현재 보고 있는 등대는 1939년 다시 지었는데 원래 위치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등대가 있는 곳에서 북쪽 문쪽으로 걸었다. 거리에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로 즐비하다. 갈레포트 안에는 호텔과 게스트하우스가 많아서 여행자의 천국과도 같다.
 

 
거리는 잘 꾸며져 있다. 남국의 이름 모를 식물로 가득 하다. 이파리가 두텁고 윤기가 난다. 어느 열대 나무에서는 꽃이 피었다. 세월이 흘러도 꽃은 피고 진다. 세월이 흘러도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다. 식민지의 잔재는 남아서 이제는 전세계인이 찾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갈레에 기념품 가게가 있다. 여행자들은 기념품을 사기 위해 들어 갔다. 스리랑카 전통 민예품을 파는 곳이다. 가게가 잘 꾸며져 있어서 여행자들이 들어갈 만 하다.
 

 
북문으로 걸어 가니
 
계속 북쪽으로 걸어 갔다. 옛날 식민지 시대 경찰서가 나타났다. 건물 꼭대기에는 1927년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수탁이 그려져 있다. 수탁은 이곳 갈레의 상징과도 같다.
 

 
갈레라는 명칭은 스리랑카어로 황소를 어원으로 한다. 그런데 갈레라는 말은 포르투갈어로 수탁을 어원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갈레를 상징하는 것이 수탁이 된 듯 하다.
 

 
갈레 고등법원 건물도 있다. 2층으로 된 백색 건물이다. 명칭은 ‘Southern province high court Galle’이다. 검색해도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식민지 시대 때 지배자들의 권위 있는 장소였을 것이다.
 
고등법원 앞에 인상적인 나무를 보았다. 가지가 아래로 쳐진 나무이다. 보리수도 이런 모습을 보았다. 인도나 동남아시아에 가면 이런 나무를 본다. 자세히 보니 보리수는 아니다.
 

 
계속 북쪽으로 갔다. 이번에는 오래된 교회를 보았다. 이름은 ‘ALL SAINTS CURCH – GALLE’이다. 1871년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영국 식민지 시절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검색해 보니 성공회 소속 교회이다. 1868년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북쪽 문 거의 가까이에 오래된 호텔이 있다. 이름하여 ‘ROYAL DUTCH HOUSE HOTEL & RESTAURANT’라고 되어 있다. 네덜란드 호텔인 것이다. 2층 규모로 몹시 낡았다. 지금은 호텔로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검색을 해도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번영했을 것이다.
 

 
갈레포트에는 수많은 식민지 유적이 있다. 주로 네덜란드 시대에 건설된 것이다. 여기에 영국 것이 가미 되었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 있다. 식민지 시대 유산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이 되었다.
 
제국주의 무덤 스리랑카
 
지배당한 역사도 역사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일본으로부터 36년동안 지배받았다. 지금도 적산가옥이라는 명칭으로 남아 있다. 이런 것도 유산이다. 치욕의 유산인 것이다.
 
스리랑카에서는 치욕의 유산을 파괴하지 않았다. 치욕의 유산도 유산인 것이다. 무엇보다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외세가 들어 와서 지배하고 착취한 흔적들을 후손에게 보여 주자는 것이다.
 
스리랑카는 서세동점시절 수난을 겪었다. 15세기 말에 포루투갈이 들어 왔다. 포르투갈은 1597년부터 1658년까지 61년동안 스리랑카를 지배했다. 포르투갈령 실론시대이다.
 
17세기 중반에 네덜란드가 들어 왔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1658년부터 1796년까지 138년동안 지배했다. 네덜란드령 실론시대이다. 영국은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1796년부터 1948년까지 152년동안 지배 했다. 영국령 실론시대이다.
 

 
서양의 침략자들은 스리랑카를 351년동안 돌아가면서 지배했다. 그러나 스리랑카는 정체성을 유지했다. 특히 영국식민지 시절 극심한 종교적 차별 정책을 시행했음에도 불교는 살아 남았다. 오늘날 스리랑카는 70프로 이상이 불교신자이다.
 
한국은 일제 36년을 겪으면서 해체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미국이 들어 오고 나서부터는 기독교 국가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스리랑카는 제국주의자들의 351년 지배에도 동화되지 않고 정체성을 지켜 냈다. 어쩌면 스리랑카는 제국주의의 무덤인지 모른다.
 

 
스리랑카가 영국의 가혹한 불교탄압에도 살아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교리의 우수성에 있다. 불교 교리에 있어서 침략자의 종교와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파나두라 논쟁에서 검증된 바 있다. 이 논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스리랑카 사람들은 불교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그 중에 하나가 다르마팔라이다.
 
이번 스리랑카 성지순례는 근대 스리랑카불교 부흥 현장을 보기 위한 목적도 있다. 갈레에 하나의 사원이 있는데 그 사원에서 올코트 대령이 수계를 받았다. 다음 행선지는 올코트 대령이 수계 받은 현장이다. 그리고 파나두라 논쟁의 현장이다.
 
한시간 보았어도 후기는 반나절
 
해외여행을 하면 반드시 후기를 남긴다. 비싼 돈 들여 간 여행이고 귀중한 시간을 투자해서 간 여행이다. 한번 보고 마는 즐기는 여행이 될 수 없다. 귀한 외화를 해외에서 낭비할 수 없다. 후기 없는 여행은 상상할 수 없다.
 
이 나라 저 나라 ‘메뚜기처럼’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는 일 없이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내키는 대로 다닌다. 방콕에 유명 맛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다음날 비행기 타고 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여행기를 기대할 수 없다. 먹고 마시고 노는 사진만 남길 뿐이다.
 
즐기는 여행을 하지 않으려 한다. 성지순례 위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하면 반드시 후기를 남긴다. 비록 한시간 보았어도 반나절을 작성한 후기를 남긴다. 이렇게 남겨 놓으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스리랑카 여행을 한지 8개월 되었지만 기억을 되살려 이렇게 후기를 남긴다.
 
 
2023-07-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