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의 무지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2. 7. 08:52

나의 무지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바람이 이는 잎새에도 괴로워했다는 시가 있다. 요즘 이 말이 사무친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괴로워하는지 모른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것인지 모른다.
 
자신을 합리화하기로 했다. 내가 한 행동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다음 단계는 눈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자신도 설득할 수 있고 상대방도 설득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고자 한다. 올해가 시작될 때 다짐한 것이다. 이는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부끄러움 없는 삶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삶이다. 그러나 자신의 무지로 인하여 타인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괴로운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고민거리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서는 미안한 감이 없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옅어질 것이다. 어제는 참지 못해서 술을 마셨다.
 

 
오계를 지키고자 한다. 가장 힘든 것은 불음주계이다. 행사가 있을 때 들지 않을 수 없다. 산행이 끝난 다음에 고된 운동에 대한 보상심리로 마시기도 한다. 그렇다고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것은 아니다. 분위기를 맞추어 주기 위해서 마신다. 또한 스트레스 받을 때 알코올의 힘을 빌린다. 어제가 그랬다.
 
갈 길이 멀고 멀다. 아직까지도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욕망을 제어할 줄 안다면 성인의 경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나이 먹었다고 해서 모두 지혜로운 자들은 아니다. 나이가 칠십이 되고 팔십이 되도 탐, 진, 치에 절어서 산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불음주계를 어김으로 인하여 파계 상태가 되었다. 계가 파한 상태로 있을 수 없다. 복구해 놓아야 한다. 법회에 가서 오계를 다시 받아 지녀야 한다. 한국불교 절에서는 오계의식이 없기 때문에 테라와다 불교 법회에 가서 오계를 받고자 한다.
 
계는 지키기가 쉽지 않다. 가장 기본적인 오계 역시 지키기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불교 법회에서 오계는 식카빠다라 하여 학습계율인 것이다.
 
어떤 이는 학습계율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어떻게 살생하는 것이 학습계율이며 어떻게 사음하는 것이 학습계율이라는 말인가?”라며 분개하는 사람을 보았다. 살생도 학습으로 하고 사음도 학습으로 하는 것으로 보아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불교에서 모든 계율은 학습계율이다. 재가자의 오계뿐만 아니라 출가자의 구족계 역시 학습계율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계율은 본래 지키기 어려움을 말한다. 또한 계율은 어기면 다시 받아 지님을 말한다. 마치 학습으로 학문이 완성되듯이 계율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성되는 것이다.
 
불교에 오계가 있다면 기독교에는 십계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학습계율에 대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어기면 다시 받아지니면 되는 것이지만 기독교에서 십계는 절대자의 정언명령이다.
 
기독교에서 십계는 어기면 큰일 나는 것이다. 사음하지 말라고 했을 때 어기면 평생 죄의식으로 살아야 한다.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거역할 수 없다.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처럼 불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정언명령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계율은 정언명령이 아니다. 불음주계에 대하여 “술을 마시지 말라.”라고 하면 정언명령이 된다. 정언명령은 준엄한 것이기 때문에 어기면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죄책감 없이 살려면 파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일부 불교인들은 불음주계를 예사로 어긴다. 이렇게 본다면 늘 파계 상태에 있는 것이 된다.
 
오계를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불교인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오계준수는 불자가 되는데 있어서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자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삼보에 귀의 하는 것이다. 오계를 준수하는 것은 필요조건이다. 그 사람이 불음주계를 어긴 상태이어도, 그 사람이 파계인 상태이어도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만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불교인인 것이다.
 
불교에서 불음주계는 학습계율이다. 이는“술 마시는 것을 삼가하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라는 문구로 선언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계는 지키기 힘든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계를 어기면 다시 참회하고 다시 받아 지니는 것이다. 이러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계가 완성될 때까지 하는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평생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계율은 평생에 걸쳐서 완성된다.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특히 올해 들어서 부끄러움 없이 살고자 다짐했다. 자신을 속이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를 잘 지켜야 한다. 오계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참회해야 한다. 그러나 어제는 음주를 했다. 그것도 작정하고 음주를 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신적 압박감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알고 보면 매우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바람에 이는 잎새에 괴로워한 것 같음을 말한다.
 
 
2024-02-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