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어느 불상이 부처님 본래면목일까? 무불상시대의 남인도 특별전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4. 2. 1. 12:21

어느 불상이 부처님 본래면목일까? 무불상시대의 남인도 특별전을 보고
 
 
오늘 아침에도 절구차를 한잔 마신다. 쭈그리고 앉아 절구질해서 만든 원두커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 있고 이 세상에서 가장 맛 있는 차이다.
 
절구커피는 아메리카노 보다 더 깔끔하고 라떼보다 더 달콤하다. 쓴맛과 단맛과 신맛의 오묘한 조화이다. 누구나 백권당에 오면 절구커피를 대접한다.
 
사람의 몸은 시시각각 변한다. 몸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당연히 기분 역시 다르다. 오늘은 어제 보다 약간 기분이 업(Up)되어 있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다. 매사에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주효한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한편의 글을 쓰는 것이다. 벌써 18년째 거의 매일 계속되는 일이다. 오늘은 무엇을 써야 할까? 이미 정해져 있다. 어제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회가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페이스북과 카톡방 등 에스엔에스에서 회자 되고 있어서 날 잡아 가보기로 했다. 어제가 그날이 되었다.
 
서울에 가는 것을 서울나들이라고 한다. 안양에서 서울로 가는 것도 서울나들이가 된다. 그러나 저 멀리 남도에 있는 사람이 서울나들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마치 마실 가는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전철과 지하철로 한시간 이내에 갈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오랜만에 왔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찾았다. 추운 겨울철에 실내에서 시간 보내는데 있어서 박물관보다 더 좋은 데가 없는 것 같다.
 
중앙박물관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전철과 지하철만 타면 된다. 무엇보다 이수역에서 박물관까지는 걸을 일도 올라갈 일도 그다지 없다는 것이다. 무빙워크가 있고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박물관 코 앞까지 인도해 준다.
 

 
박물관 건물을 보았다. 네모난 건물이 속된말로 멋대가리 없다. 그러나 공모해서 만든 예술작품과도 같은 것이다. 보는 안목이 없어서 혹평한 것일지 모른다. 내 눈에는 거대한 항공모함처럼 보인다.
 
박물관에는 혼자 갔다. 점심을 먹자마자 출발했다. 오후는 박물관 견학으로 일정을 잡은 것이다. 특별전 명칭은 ‘스투파의 숲’이다. 부제로 신비로운 인도이야기라고 쓰여 있다. 전시기간은 2023년 12월 22일부터 2024년 4월 14일까지 5개월 동안 열린다. 성인 개인 티켓은 5천원이다.
 

 
특별전이 열리는 별관에 들어갔다. 안내인에게 해설사가 있는지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하는 것이 이익이 되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안내인에 따르면 하루에 두 번 해설시간이 있는데 오전 11시와 오후 3시라고 했다.
 
오후 3시에 시작되는 해설을 듣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무려 한시간이 남았다. 다른 데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무료 관람이 가능한 본관으로 이동했다.
 
본관에 가면 3층에 중앙아시아관이 있다. 박물관에 가면 늘 가는 단골코스에 해당된다. 투르판 등 서역에서 온 유물들이 많다. 어떻게 서역유물이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제가 패망한 다음에 총독부에 있는 유물이 그대로 남게 된 것이라고 한다.
 

 
중앙아시아관에 가면 늘 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교유물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늘 그 유물이 그 유물이다. 수장고에 유물이 있다면 교체해서 전시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무료 관람하게 하는 것 같다.
 
국립박물관에는 외국사람들도 찾는 명소가 된 듯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 성지순례 갈 때 그 나라 박물관에 가듯이 외국사람들도 우리나라 박물관에 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훌륭한 관광코스가 된다.
 
엽서카드와 도록을 구입하고
 
시간이 남아 돌았다.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명소라면 기념품을 파는 곳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념품 가게라고 볼 수 있다. 기념품 가게에 간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엽서카드를 사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선물할 때 무엇으로 할지 고민한다. 가장 무난한 것은 먹거리를 선물하는 것이다. 기념품이나 책도 선물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의 취향을 알 수 없을 때는 곤란하다. 그렇다고 돈봉투를 내놓을 수 없다. 무엇이 좋을까? 요즘 생각한 것은 ‘손카’드이다.
 
손카드를 받아 보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선물이다. 정성스럽게 손으로 쓴 글이 있는 카드를 받았을 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감동이다. 손카드는 사람을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틀림 없이 카드 파는 곳이 있을 것 같았다. 내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그것도 고급 카드이다. 관람객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을 대표하는 카드라고 볼 수 있다.
 
카드 가격은 만만치 않다. 생각한 것보다 가격이 훨씬 높았다. 그것은 접이식 카드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그림과 문양이 그려져 있다. 외국사람들이 선물용으로 사기에 좋을 것 같다.
 

 
카드는 두 종류 9장을 구입했다. 한 개에 4천원짜리도 있고 5천원짜리도 있다. 계산해 보니 3만 2천원이 되었다. 그런데 3만원 이상을 구입하면 도록을 무료로 준다고 했다.
 
이집트 특별전 도록을 무상으로 받았다. 도록에는 ‘삶, 죽음, 부활의 이야기’라고 쓰여 있다. 언제 특별전이 열렸는지 알 수 없다. 아마 판매하고 남은 것을 주는 것 같다.
 

 
어떤 이는 도록을 모은다. 전시회가 전람회 갔을 때 도록을 구입하는 것이다. 이런 글을 접했을 때 나도 따라 하고 싶었다. 이번 남인도 특별전도 좋은 케이스에 해당된다.
 
이번에 처음으로 도록을 구입했다. 도록 이름은 ‘스투파의 숲, 신비로운 인도이야기’이다. 가격은 2만 3천원이다. 눈으로 직접 유물을 보고,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나중에 도록으로 확인하면 세 배 즐기는 것이 된다.
 
해설사와 함께 한 남인도 특별전
 
오후 3시가 되었다. 해설사의 해설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이때를 기다리는 듯 했다. 아마 정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삼사십명 되는 사람들이 듣고자 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지만 그 중에는 학자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몇 있는 것 같다.
 

 
해설사는 어디서 본 듯 하다. 얼굴이 낯 익은 것이다. 유튜브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인도관련 전문가인 것 같다. 나이는 칠십 가까이 된 여성이다. 아마 인도나 불교 관련 여성학자가 아닌 듯싶다.
 
이제까지 해설사 없이 전시회를 보았다. 이번에는 해설사를 따라 다니며 보기로 했다. 혼자 설명문을 보면서 관람하는 것과 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듣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해설사는 설명문에 없는 이야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사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남인도에도 불교가 있었다. 이제까지 북인도에만 관심을 가졌다. 성지순례를 가도 북인도에 있는 팔대성지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데칸고원 쪽에도 불교가 있었던 것이다.
 
남인도 특별전은 데칸고원에 있는 불교 유적에 대한 것이다. 주로 스투파에 대한 것이다. 스투파를 이루고 있는 부조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남인도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마우리와 왕조 시기이다. 마우리아 왕조 3대 황제인 아소까 대왕에 의해서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아소까 대왕은 인도전역을 통일했다. 그러나 통일과정에서 전쟁의 참상을 보았다. 남인도 깔링가 전투에서 전쟁의 참상을 보고서 더 이상 정복전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세계에 전파하고자 한 것이다.
 
아소까 대왕은 전세계에 담마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만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행복과 평화를 가져 올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래서 담마위자야(Dhamma vijaya), 즉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천명했다. 몽둥이나 칼을 이용하지 않고 부처님의 담마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한 것이다.
 
아소까 대왕은 부처님 사리를 전인도에 분배했다. 스리랑카 역사서에 따르면 인도 전역에 8만4천 개의 사리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근본 8탑이라 불리우는 사리탑을 해체해서 만든 것이다. 당연히 남인도에도 사리탑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남인도 특별전은 수투파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사리탑이다. 커다란 봉분 안에 사리함이 있고, 그 사리함에는 사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부처님 사리는 경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왜 성지순례를 하는가?
 
부처님은 사리탑을 경배할 것을 말했다. 이는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확인 된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전륜왕의 유체에 대하듯, 여래의 존체에 대처해야 한다.”(D16.112)라고 했다. 그래서 “그리고 큰 사거리에 전륜왕의 탑묘를 조성한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전륜왕의 유체에 대처한다.”(D16.112)라고 했다.
 
불교에 전륜왕이 있다. 전륜왕은 경배의 대상이 된다. 고대인도에서는 전륜왕으로 칭송되는 왕의 탑묘를 사거리에 조성해 놓았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유체도 탑묘로 만들어 경배의 대상으로 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거기에 화환이나 향이나 안료를 올리고 경의를 표하고 마음을 정화시킨다면, 사람들은 오랜 세월 안녕과 행복을 누릴 것이다.”(D16.112)라고 했다.
 
인도성지순례를 다녀 온 적 있다. 경전에서만 접하던 성지를 방문 했을 때 신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사대성지를 방문했을 때 그랬다.
 
부처님의 사대성지가 있다. 탄생지 룸비니, 성도지 보드가야,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열반지 꾸씨나라를 말한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사대성지를 순례할 것을 말했다.
 
신심 있는 불자라면 인도에 있는 사대성지를 순례한다. 한번이 아닌 여러 번 순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왜 성지순례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성지를 순례하는 것에 대하여 “누구든지 이러한 성지순례를 한다면, 그들 모두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의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D16.111)라고 말했다.
 
성지순례를 하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그런데 부처님의 유체가 모셔져 있는 스투파라면 더욱더 경건해질 것이다. 인도 전역에 8만4천개의 사리탑이 세워졌다는데 사람들은 그곳에 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화환이나 향이나 안료를 올리고 경의를 표하고 마음을 정화시켰을 것이다.
 
사타바하나(Satavahana) 왕조의 스투파
 
남인도에 왕조가 있었다. 놀랍게도 불교문화가 화려하게 꽃 피운 왕조가 있었던 것이다. 사타바하나(Satavahana) 왕조가 그것이다.
 
사타바하나 왕조는 기원전 100년 전부터 기원후 220년까지 약 300년동안 존속했던 왕조이다. 기원후 2세기 마우리아 왕조가 무너졌는데 마우리와 왕조의 영향을 받아 불교가 융성했었다.
 

 
남인도에 불교가 전해진 시기는 마우리아 왕조시기이다. 기원전 3세기 중엽 아소까 대왕이 사리와 함께 불교의 가르침도 남쪽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출토 된 부조를 보면 사리함을 싣고 사는 코끼리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신나는 모습이다.
 
불교는 아소까 대왕 시기에 전인도로 퍼졌다. 불교는 부처님의 사리와 함께 전파 되었다. 인도 전역에 사리탑을 세운 것은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을 경배의 대상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현재 남인도에는 스투파가 남아 있지 않다. 산치대탑처럼 완벽하게 복원된 것은 없고 유적과 유물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타바하나 왕조 당시의 불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도록에 설명된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크리슈나강을 따라 기원 전후의 스투파 유적이 집중되어 있다. 이 가운데 퍼거슨의 책에서도 소개한 아마라바티 스투파는 직경이 50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반짝이는 흰 대리석으로 만든 장식 부조가 잘 남아 있다(도55). 댐 건설로 원래 위치에서 옮겨 진 안드라프라데시(Andhra Pradesh) 나가르주나콘다 사원 유적에서 발견된 스투파의 장식 부조도 양적, 질적으로 모두 훌륭하다(도70). 두 유적지 주변으로 수십 여곳의 스투파 유적이 집중되어 있다(8쪽 지도 참조). 게다가 남인도 스투파 유적의 발견은 현재 진행형이다. 카로나타카(Karnataka) 텔랑가나의 카나가나할리와 파니기리 유적은 21세기 들어 새롭게 알려진 곳이다(도73). 이렇게 스투파 유적이 빼곡히 표시된 지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데칸고원 동남부 크리슈나 강을 따라 거대한 스투파가 무리 지어 있는 웅장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실제 남인도 불교사원에 스투파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세워진 시기와 목적은 서로 다르지만, 예배 공간의 중심을 이루는 스투파 주변으로 크고 작은 스투파가 숲을 이루듯 늘어섰다. 불교사원이 강을 따라 하나, 둘 늘어남에 따라 스투파의 수도 늘어나 더 큰 숲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 광경을 멀리서 부감하다 시선을 끌어당겨 스투파로 가까이 다가 보면 그 위에 새겨진 나무와 뱀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드넓은 남인도에 펼쳐진 ‘스투파의 숲’ 속에 살고 있는 ‘나무와 뱀’처럼 말이다.”(도록, 12-13쪽)
 

 

 
도록을 보면 남인도는 스투파의 숲과 같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타파하나 왕조 당시에 불교가 매우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소까 대왕이 추진한 8만4천 사리탑이 허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록에 따르면 남인도에서 스투파가 집중된 곳은 고다바라 강과 크리슈나 강이라고 한다. 특히 사타바하나 왕조의 수도인 아마라바티 스투파는 직경이 50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현재 남인도에 스투파는 남아 있지 않다. 인도에서는 산치대탑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갖가지 부조와 토라는 남아 있다. 토라는 우리나라 사찰의 일주문과 같은 것이다.
 
생명의 연꽃에 대하여
 
성지순례 가면 해설사가 있다. 국내 사찰 순례 갈 때도 해설사가 있다. 박물관에도 해설사가 있었다. 그런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 서사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설명문에 써진 것을 읽는 것과 다르다.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특히 생명의 연꽃에 대한 설명이 그랬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사찰에도 연꽃문양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남인도 사타바하나 왕조 시대 연꽃은 다르다. 부조에 그려진 것을 보면 생명이 넘친다. 왜 그런가? 해설사에 따르면 연꽃이 줄기를 이루어 성장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도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남인도는 열대계절풍 기후에 속한다. 여름이 되면 계절풍을 따라 많은 양의 비가 내린다. 쏟아지는 비는 겨우내 메마른 토양을 적시 고 생기를 되찾은 대지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튼다.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은 매년 같은 때 어김없이 내 리는 비로 흘러 넘치는 법이다. 남인도인들은 이러 한 자연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물이 가득 차 줄지 않는 ‘풍요의 항아리’로 표현하였다. 풍요의 항아리 에서 솟아오르는 연꽃 줄기는 풍요로운 자연 속 싱그러운 생명력을 상징한다.”(도록, 13-14쪽)
 
 
돌에 조각 되어 있는 연꽃을 보면 넝쿨식물을 보는 것 같다. 이는 개별적인 연꽃의 모습이 아니다. 마치 넝쿨이 끊임없이 뻗어 가듯이 연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이는 생명을 상징한다. 또한 풍요를 상징한다. 그래서 도록에서는 “끊어지지 않고 굽이쳐 흘러가는 연꽃 줄기처럼 되풀이 되는 생명의 재생 능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에 깃든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를 믿게 한다.”(도록, 14쪽)라고 설명해 놓았다.
 

 
넝쿨연꽃이 있을까?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넝쿨연꽃이 있다는 것이다. 아잔타 석굴 천정 벽화에도 있고 바르후트 스투파 울타리 기둥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연꽃은 마치 인동초가 넝쿨을 이루어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것 같다. 이에 대하여 도록에서는 “연꽃 한 송이를 큼지막하게 따로 그리는 것에 비하여 인도의 연꽃은 넝쿨로 무리지어 나타난다.”(도록, 28쪽)라고 했다. 스투파 주변에서 참배객들은 이런 연꽃 줄기를 보면서 생명의 축복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무불상시대에 신앙 대상으로 삼은 것은?
 
해설사의 설명은 한시간 동안 진행 되었다. 오후 3시에 시작되어서 정확하게 4시에 끝났다. 일일이 설명문을 보면서 관람하는 것보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보는 것이 훨씬 나았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다 보니 한가지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무불상에 대한 것이다. 기원을 전후하여 3백년 가량 존속했던 사타바하나 왕조는 무불상시대였던 것이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은 97점에 달한다. 그 중에 45점은 남인도 스투파를 장식하던 부조이다. 그런데 부조를 보면 부처님 일대기를 보는 것 같다는 것이다. 탄생에서부터 성도, 초전, 열반에 이르기 까지 사건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부처님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역사에서 무불상시대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부처님 열반 후 오백년 가량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원 후부터는 불상이 출현한다. 그러나 남인도 사타바하나 왕조의 스투파 부조에서는 부처님 상은 보이지 않는다.
 
남인도에서 불상이 출현한 것은 사타바하나 왕조가 멸망하고 난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기원후 220년 까지는 불상이 출현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인들은 무엇을 신앙대상으로 삼았을까?
 
무불상시대에 신앙 대상으로 삼은 것이 있다. 대표적으로 사리를 들 수 있다. 사리는 사리탑 안에 있기 때문에 사리탑이 경배의 대상이 된다. 또 하나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법륜, 족적, 그리고 보리수이다. 그렇다면 무불상 시대에 사람들은 왜 불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부처님 얼굴을 아무리 잘 표현한다고 한계가
 
페이스북을 보면 얼굴 자랑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대부분 잘 생긴 사람들이다. 미남이나 미녀가 얼굴 자랑하는 것 같다. 마치 셀카놀이 하듯이 자신의 외모를 올려 놓는다.
 
사람의 얼굴은 아무리 예뻐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표정도 시시각각 다르다. 대체 어느 것이 그 사람의 본래 얼굴일까?
 
불자들은 부처님을 그리워한다. 경전을 읽으면서 부처님을 생각한다. 부처님은 어떤 분인지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경전에는 부처님에 대한 묘사가 있다. 삼십이상이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의 형상에 대한 묘사를 보면 이상적인 인간상을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경전에는 형상만 묘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목소리도 설명되어 있다. 어떤 것일까? 이는 맛지마니까야에서 “존자 고따마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여덟 가지 요소를 갖춥니다. 또렷하고, 명료하고, 감미롭고, 듣기 좋고, 청아하고, 음조 있고, 심오하고, 낭랑합니다. 그러나 존자 고따마의 목소리는 청중이 있는 곳까지 알려지지만, 그 목소리가 청중을 떠나서까지 퍼져가지는 않습니다.”(M91)라는 설명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그립다고 하여 형상으로나 음성으로 찾아서는 안된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얼굴만 바라 보고 사는 수행승이 있었다. 이에 부처님은 “박깔리여, 그만 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S22.87)라고 말해 주었다.
 
백권당에는 불상이 없다. 명상공간에도 불상은 없다. 그러나 경전은 있다. 사부니까야는 모두 다 갖추었다. 그것도 두 종류의 번역서를 다 갖추었다. 법구경과 수타니파타 등 쿳다까니까야 번역된 경전도 다 갖추었다. 나에게는 경전이 바로 부처님인 것이다. 불상이 필요 없는 이유에 해당된다.
 
무불상 시대에 불교인들은 부처님이 그리웠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불상을 만들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거룩하신 부처님을 인간형상으로 만든다는 것은 자신 없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부처님 얼굴을 아무리 잘 표현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리수 아래 빈 좌대를 보면
 
무불상 시대에는 법륜, 족적, 보리수, 사리탑이 숭배 대상이 되었다. 법륜을 보면서 부처님을 생각하고, 족적을 보면서 부처님을 생각하고, 보리수를 보면서 부처님을 생각하고, 사리탑을 보면서 부처님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무불상 시대의 부조를 이번 남인도 특별전에서 볼 수 있었다.
 
부조 57번을 보면 석가모니 상징을 담은 스투파가 있다. 부조를 보면 송곳니와 말과 의자가 있다. 송곳니는 스투파 안에 조각되어 있다. 말은 부처님이 유성출가할 때 타던 말이다. 의자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룰 때의 금강좌를 말한다.
 

(송곳니)

 

(유성출가 말)

 

(보리수 아래 빈 좌대)

 
 
부조에서 송곳니, 말, 의자가 있는데 이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특히 좌대가 인상적이다. 보리수 아래에 의자만 있는 것이다. 그 의자에 부처님이 앉았을 것이다. 그런데 부조 어디에도 인간의 모습을 한 불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룩하고 존귀하신 부처님을 감히 얼굴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경전에 있는 문구처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라며 일갈하면서,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S22.87)라는 가르침 때문 아니었을까?
 
이번 남인도 특별전에서 본 것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빈의자와 족적이다. 빈의자에는 부처님이 앉아 있지 않다. 족적을 표현한 부조에도 부처님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부처님이 형상이나 목소리에 집착하기 보다는 가르침을 보고 들으라는 의미가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 열반후 오백년이 지났다. 무불상 시대의 무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북서인도 간다라 지방에서 불상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남인도에서도 불상이 출현했다. 그것은 사타바하나 왕조가 망하고 난 다음 이어지는 익슈바쿠 왕조가 등장할 무렵이다. 기원후 3세기의 일이다.
 
어느 불상이 부처님 본래면목일까?
 
해설사의 설명은 불상이 출현할 때 끝났다. 부처님의 얼굴을 표현한 3세기 불상이 그것이다. 상호를 보면 인자하고 거룩한 모습이다. 부처님이 살아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불상의 모습은 다양하다. 한국에는 한국인 모습을 한 불상이 있다. 중국에 가면 중국인 모습을 한 불상을 볼 수 있다. 미얀마에 가면 미얀마 불상이 있고 스리랑카에 가면 스리랑카 불상이 있다. 과연 어느 불상이 부처님 본래면목일까?
 
남인도 특별전은 무불상 시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 동안 유튜브 설명으로 접하던 부조를 직접 보았다. 빈 의자만 있는 것이라든가, 족적만 있는 것, 법륜만 있는 것 등 다양한 것들로 부처님을 상징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처님 형상은 만들지 않았다. 아무리 불상을 잘 만들어도 부처님 본래 모습을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처님 가르침 때문으로 본다.
 

 
매일매일 부처님을 만난다. 매일 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현전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말을 하는 것 같다. 이는 부처님을 형상으로 만나거나 음성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으로 만나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으로 만나는 것이다. 부처님은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S22.87)라고 말씀 하셨다.
 
 
2024-02-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