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남의 업(業)에 개입하면 미쳐버린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26. 13:23

남의 업(業)에 개입하면 미쳐버린다

 

 

앉아 있는 것이 가장 편했다. 이래도 편치 않고 저래도 편치 않았는데 방석에 앉아 있으니 몸의 불편함에서 해방되었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어제 세 건의 일이 있었다. 일감 마무리 하는 일과 두 명의 친구 만나는 일이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다. 계속 혼자만 있다가 점심 때부터 저녁 늦게까지 무리 했었다.

 

저녁에 인천친구를 만났을 때 식사를 했는데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새벽에 깨어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경전을 보고 행선을 하는 등 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아침에 샤워를 하면 새로운 기분인데 역시 속수무책이 되었다.

 

오전에 글을 하나 쓰고 잠시 여유를 가졌다. 잠을 잘 자지 못해서인지 졸리웠다. 어느 것 하나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의자 앉아 있어도 불편하고 서 있어도 불편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이래도 불편하고 저래도 불편하면 자리에 앉는 것이다. 방석에 앉아 좌선을 하는 것이다.

 

 

자리에 앉았다. 알람을 한시간 세팅해 놓았다. 최근 며칠 한시간을 채우지 못했다. 오늘만큼은 한시간 앉아 있기로 마음 먹었다.

 

좌선할 때 들뜸이 있으면 앉아 있기 힘들다. 무언가 기대심리가 있을 때 집중이 되지 않는다.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 고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포기를 하면 마음이 편하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가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을 때 마음을 놓아 버린다. 이래도 불편하고 저래도 불편했을 때 한가지 방법은 포기하는 마음으로 가만 앉아 있는 것이다.

 

방석에 가만 앉아 있었다. 가만 앉아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고자 했다. 가능하면 엉덩이 닿음까지 보고자 했다. 그러나 슬금슬금 생각이 치고 들어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생각이 나는 경우도 있다. 때로 전혀 보지 못했던 이미지도 보였다. 이런 경우 배의 부품과 꺼짐, 엉덩이 닿음을 잡고 있으면 힘을 쓰지 못한다. 곧바로 진압된다.

 

명상은 그날그날 다르다. 어떤 날은 쉽게 집중이 되는가 하면 어떤 날은 망상 속에서 보낸다. 가장 좋은 것은 호흡을 잡고 있는 것이다. 마하시 방식을 하기 때문에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흘렀다. 보통 이삼십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집중이 된다. 그러나 오늘은 기별이 없다. 컨디션이 좋으면 머리에서 환함이 느껴진다. 이럴 경우 마치 캄캄한 방에 전등불을 켜는 것과 같다.

 

방에 불이 켜져 있으면 다 보인다. 방이 어두우면 잘 보이지 않는다. 좌선 중에 집중이 잘 되어서 머리가 환해지면 호흡도 잘 보인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도 자동적으로 되는 것 같다.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다. 유튜브를 자주 보는 것도 요인인 것 같다. 총선이 다가와서일까 정치관련 유튜브도 자주 본다. 불과 한달 전에는 이런 일은 없었다.

 

유튜브에서 또 하나 자주 보는 것은 강아지 영상이다. 강아지가 태어나는 것도 자라는 과정에 대한 것을 보면 측은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강아지 영성을 볼 때 쟤네들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라며 의문하게 된다.

 

강아지 영상을 보면 우울하다. 언젠가 나도 강아지로 태어났을 때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남의 일 같지 않아 보인다.

 

유튜브를 보면 근심걱정거리가 아닌 것이 없다. 전철에서 피곤에 지친 사람들을 보면 인생이 고달프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내가 세상의 근심걱정을 다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금강경에 대승정종분이 있다. 2004년 가을 금강경을 외울 때 대승정종분에 이르면 가슴이 벅찼다. 그것은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實無衆生得滅度者)”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내가 다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멸도 하리니 이와 같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없는 중생을 멸도 하되 실로 중생은

멸도를 얻은 자가 없느니라라고 번역된다. 대승보살사상의 진수를 보여 준다.

 

대승보살사상은 중생구제에 있다.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전까지는 결코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각오를 말한다. 입보리행론에서 샨티데바가 “이 세상이 남아있고 중생들이 남아 있는 한저도 계속남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몰아내게 하옵소서!”라고 서원한 것을 보면 가슴을 뛰게 한다.

 

좌선 중에 강아지 영상을 떠올랐다. 배의 부품과 꺼짐, 엉덩이 닿음으로 생각이 치고 들어 오는 것을 원천봉쇄하고자 했으나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 온다. 강아지 영상도 그랬다.

 

유튜브에서 강아지 영상을 보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생에서 도와 과를 이루지 못하면 강아지로 태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울해졌다.

 

요즘 며칠 동안 우울한 기분은 강아지 영상과 관련 있다. 보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인하여 강아지 영상 천지가 되었다. 보다 보면 우울한 마음에 지배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알람이 울렸다. 한시간이 지난 것이다. 특별한 집중이 없이 한시간이 지나갔다. 머리에 환한 것도 없었다. 다만 부품과 꺼짐, 닿음을 보고자 애썼다. 그럼에도 한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이다.

 

더 앉아 있고자 했다. 우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했다. 강아지 영상을 보았을 때 우울한 마음이 일어났는데 이를 해소하고자 했다. 끝장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시간이든지 두 시간이든지 더 앉아 있어야 한다.

 

알람이 울리고 나서도 더 앉아 있었다. 현재 몸 컨디션으로 봐서 앉아 있는 것이 더 편했다. 앉아서 꼼짝 앉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부품과 꺼짐, 닿음을 보는 것이 가장 편했다.

 

계속 달리고자 했다. 마치 세상의 근심걱정을 다 안고 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금강경 대승정종분의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를 떠 올렸다. 샨티데바의 “이 세상이 남아있고 중생들이 남아 있는 한저도 계속남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몰아내게 하옵소서!”라는 문구도 떠 올랐다. 앉은 상태로 점심 너머서까지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십분도 안되어서 그만 두었다. 경전에서 읽은 것이 갑자기 떠 올랐기 때문이다.

 

강아지를 보면 불쌍하다. 전철에서 피곤에 지친 사람들을 보면 측은하다. 이런 것을 볼 때 모두 다 제도해야 한다. 그들을 모두 열반에 들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다름 아닌 남의 업에 개입하는 것이 된다.

 

강아지는 왜 강아지로 태어났을까? 강아지로 태어나서 개로 일생을 보내는 것을 보면 짠하다. 강아지일 때는 귀엽지만 다 자랐을 때는 쳐다 보지도 않을 것이다. 늙어서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까? 한번 태어났으니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이런 것은 사람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강아지는 강아지의 업이 있다. 전철에서 피곤에 찌든 사람은 그 사람의 업이 있다. 그 사람의 업에 개입하면 세상 근심걱정을 다 안고 사는 것이 된다. 그래서일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

 

 

행위의 과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

 

 

부처님은 행위의 과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타인의 행위의 과보, 즉 타인의 업과 업보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미쳐버릴 것이라고 했다.

 

강아지 동영상을 보면서 강아지가 불쌍하게 보였다. 전철에서 피곤에 찌든 사람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게 보였다. 이들 모두를 내가 구원해야겠다는 대승보살정신이 발동되었다. 그러나 역부족이다. 내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의 업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이다.

 

좌선 중에 부처님 말씀이 떠올랐다. 알람이 울린 다음에 여분의 좌선을 하는 과정에서 번뜩 떠오른 것이다. 그것은 앙굿따라니까야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acinteyya sutta)’(A4.77)이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이는 부처의 경계(buddhavisaya), 선정의 경계(jhanavisaya), 행위의 과보(kammavipāka),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변(lokacintā)을 말한다. 이 네 가지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면 미쳐버리거나 곤혹스러울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해결되었다. 답은 부처님 가르침에 있었던 것이다. 남의 업에 개입하면 미쳐버리거나 곤혹스럽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강아지나 삶에 지친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다.

 

 

수행승들이여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행위의 상속자이고행위를 모태로 하는 자이고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다.”(A10.216)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또한 업의 상속자라고 아는 것이다. 이것이 정견이다. 세간적 정견을 말한다.

 

정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는 부처님이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수행승들이여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수행승들이여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M117)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세간적 정견은 다름아닌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업자성정견임(kammassakattā sammādiṭṭhi)을 말한다(kamma)이 자신의 것(sakattā)임을 아는 것이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임을 말한다.

 

업자성정견은 석가모니 부처님만 설한 것이 아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과거세의 거룩한 님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그러나 수행승들이여어리석은 자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거부한다.”(A3.135)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과거에 출현했던 모든 부처님들도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었다.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끝장을 보려 했으나 부처님 가르침이 퍼뜩 떠올라 단숨에 해결된 것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했을 때 남의 업에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 다만 연민의 마음을 내면 그만이다. 남의 업에 개입하면 미쳐버린다!

 

 

2024-01-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