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세 번의 실수 끝에 방향을 잡았으니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23. 09:14

세 번의 실수 끝에 방향을 잡았으니
 
 
새해부터 실수연발이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른다. 고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렇게 똑 같은 실수가 반복되면 언젠가 버림 받게 될지 모른다.
 
새해가 시작되고 나서 보름이 지나도록 일감이 없었다. 약간 염려가 되지만 두려울 정도는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겹치기로 올지 모른다.
 
마침내 고대하던 일감이 왔다. 마치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는 것 같다. 그런데 인디언기우제는 비가 올 때까지 지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비가 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왜 일이 없을까?”라며 걱정하면 바로 일감이 온다는 사실이다.
 
일이 없던 차에 메일을 받았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재주문인 줄 알았다. 사이즈만 변경에서 발송했다. 이것이 1차 실수가 되었다.
 
도면을 잘 봐야 한다. 도면에 써 놓은 글씨를 잘 읽어 보아야 한다. 도면을 보니 홀막음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2차 실수를 했다. 담당자에게 참으로 면목이 없었다. 나이 든 자가 자꾸 잊어 먹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실수는 한번도 많다. 두 번 실수하면 정신상태를 의심할 것이다. 더구나 나이가 육십이 넘은 자가 일한다고 염려할지 모른다. 이런 것을 잘 알기에 눈에 불을 켜고 실수가 없도록 하고자 한다.
 
세 번째 메일을 보냈다. 어제 월요일 아침에 부리나케 작업해서 보낸 것이다. 이번에는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 왔다. 이쯤 되면 심각한 것이다. 담당자는 패턴 두께가 0.125미리로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홀막음 모델의 경우 패턴 두께가 최소 0.125미리 이상 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로 작년 가을 설계변경을 몇 번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세 번째 실수가 되었다.
 

 
젊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다. 고객사 담당자들은 이삼십대로 다 젊은 사람들이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이 상대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원맨컴퍼니에서는 혼자 모든 것을 다한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육십이 넘은 자가 이삼십대하고 같이 일하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하고 일할 때 무척 주의한다. 나이 먹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자꾸 실수를 하면 속으로 “노인이 자꾸 실수하네.”라는 말을 들을지 모른다.
 
새해 들어서 첫 일감이 생겼다. 그러나 새해부터 실수가 연발되었다. 세 번 실수를 하고 난 다음에 감을 잡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된 것일까? 나이 먹어서 그런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주의력 결핍이라고 볼 수 있다.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런 것 같다. 이는 공부를 해 보면 알 수 있다.
 
최근 빠알리어 문법공부를 하고 있다. 3개월 과정이다. 이제 중반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어학공부는 예습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예습이 없으면 따라가기 힘들다. 예습을 한 다음에 수업에 임하면 복습이 된다.
 
빠알리어문법을 예습할 때 나이를 잊어 버린다. 공부에 몰두 하다 보면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인식되지 않는다. 오로지 공부하는 나만 있을 뿐이다.
 
예습하다 보니 마치 청소년 시절에 영어공부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럴 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빠알리문법 수업시간에는 나이가 여든인 사람도 있다. 모두다 마이크를 끄고 수업을 받는데 이 분은 마이크가 켜져 있다. 그러다 보니 따라 하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다.
 
나이가 여든인 사람은 잘 따라 한다. 선생이 말하면 학생처럼 따라 하는 것이다. 마이크가 켜져 있기 때문에 다 들리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마이크가 꺼져 있다. 그렇게 해야 선생이 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마이크가 켜져 있으면 집안에서 나는 소음도 들리기 때문에 수업에 방해 되는 것이다.
 
나이가 여든이 되어도 마치 중학생처럼 따라 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것을 보았을 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한편 마이크를 켜고 수업에 임하는 것으로 보아 줌수업의 상식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아마 기기 사용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까? 배움에 대한 열정을 보면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배우는 그 순간에는 나이를 잊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실수했을 때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 든 사람 앞에서 나이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 나이 많은 어른 앞에서 나이타령을 하면 허물이 된다. 그런데 나이는 상대적이라는 사실이다.
 
나이에는 절대적인 나이가 있고 상대적인 나이가 있다. 육체적 나이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정신적 나이는 상대적이다.
 
머리가 희다고 해서 모두 장로가 아니라고 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모두 어른이 아닌 것이다. 진짜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 노인이 있다. 노인은 나이 먹어서도 변한 것이 없다. 청소년일 때나 지금이나 정신상태가 똑 같은 것이다. 탐, 진, 치로 사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여든 살, 아흔 살, 백 살의 노인이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한다면, 그를 어리석은 장로라고 합니다.”(A2.37)라고 했다. 이때 노인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 젊은 사람이 있다. 그는 보통 젊은 사람들과 다르다. 마치 어른 같이 보인다. 왜 그렇게 보일까? 이는 “검은 머리를 하고 꽃다운 청춘이고 초년의 젊음을 지니고 나이 어린 청년이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를 슬기로운 장로라고 부릅니다.”(A2.37)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때 청년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머리가 거의 백발이 되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그러나 탐, 진, 치는 여전한 것 같다. 불교를 만나고 나서부터 약간은 누그러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때는 나이를 의식하지 못한다. 머리는 반백이 다 되었지만 언행을 보면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늙어서도 일을 하고 있다. 나보다 나이 든 사람 앞에서 이런 글은 허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것에 대하여 쓰는 것이다.
 
새해부터 실수를 연발하고 있다. 세 번 실수를 반복한 다음에 일을 다시 하고 있다. 젊은 담당자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이 먹은 사람이 실수하는 것에 대하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자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젊은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무엇보다 천천히 하는 것이다. 서두르면 실수하게 되어 있다. 무엇이든지 꼼꼼히 살펴 보아야 한다.
 
사람은 신용이 있어야 한다. 자꾸 실수를 반복하면 신뢰가 가지 않는다. 믿고 맡길 수 없다. 이번에 절실하게 느낀 것이다.
 
어떤 일이든지 한번에 되지 않는다. 일은 단계적으로 완성된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된다. 풀리지 않는 문제도 바깥에 나가 바람 한번 쐬고 들어 오면 해결되는 경우도 있다.
 
일을 하는 도중에 글을 쓰고 있다. 마치 농부가 김을 메다가 잠시 하늘을 바라 보는 것과 같다. 시간이 지나면 일은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과정인 것 같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세상에 태어났으니 그냥 살아 간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향상하는 삶,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번 생에 되지 않으면 다음 생을 기약하면 된다.
 
불교를 종교로 하고 있다. 불교에서 지향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열반이다. 삶의 과정은 결국 열반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열반은 탐, 진, 치가 소멸된 것으로 깨달음의 완성이다.
 
수행자의 삶은 완전한 열반으로 완성된다. 그러기 까지 단계를 필요로 한다.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도 단계적으로 완성된다.
 
삶의 과정에서 뒤를 돌아 볼 필요가 있다. 오로지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성찰하는 삶을 말한다.
 
궁극적인 깨달음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성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현재 서 있는 곳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성장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그렇다. 일도 예외가 아니다.
 
일하는 도중에 있다. 세 번의 실수 끝에 방향을 잡았다. 이제 주욱 이 길로 나아가면 된다. 시일이 해결해 줄 것이다. 이틀 지나면 일은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일은 단계적으로 완성된다. 마찬가지로 깨달음도 단계적으로 완성된다. 오늘 잘 안되면 내일 하면 된다. 다음날 산뜻한 기분으로 하면 효율이 높다. 세 번의 실수 끝에 방향을 잡았으니 이 방향으로 나아가면 된다.
 
 
2024-01-23
담마다사 이병욱